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62
262회. 누님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천지맹.
의천각.
유시 초(오후 5시).
화용독심 남궁연은 연적하의 집에서 돌아온 후로 숙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청운검 남궁천의 비무 요청도 피곤하다며 거절했다.
남궁천이 의아한 눈으로 남궁연을 보았다.
낮에만 해도 멀쩡했는데 오후에 다시 본 그녀는 어디서 악전고투라도 치르고 온 얼굴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어디 아픈 건 아니냐?”
“괜찮아요. 그냥 조금 지친 것뿐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사흘 후에 출정식이 있는데 아프면 안 되지. 이번 임무가 특별히 위험하다고 해서 아버지도 너만 믿고 있는데.”
“오라버니.”
“응?”
“오라버니는 진 소저를 처음부터 좋아했나요? 아니면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갑자기 그건 왜?”
“그냥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감정이 궁금해서요.”
남궁천은 무심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나 남궁연답게 이성 간의 사귐마저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녀에게 끌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좋아한 것 같다고.”
“왜요?”
“너도 알겠지만 나 정도의 배경과 능력이면 호감을 표시하는 미녀들이 많아. 그런데 그녀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끌린 적이 없어. 여러 번 만나 감정이 싹텄다면 그녀들 중에 누군가와 맺어졌을 테지.”
“첫눈에 반했다는 건가요?”
“비슷해. 좋아하는 사람을 마침내 좋아하게 됐다고나 할까.”
“어렵군요.”
남궁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니?
이해하지 못할 말은 없는데 왜 이렇게 복잡한지 모르겠다.
단순한 오라비의 말인데 어째 주역(周易)을 연구할 때보다 더 난해하다.
“언젠가 너도 알게 될 날이 있을 게다. 그럼 나는 이만 슬슬 나가 봐야겠다. 진 소저 일행이 저녁을 먹으러 나올 때가 돼서.”
“함께 드시기로 한 거예요?”
“아니, 우연히 만나려면 준비를 좀 해야 되거든.”
“아…….”
남궁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에게 호감을 보인 미녀들 다 어쩌고 저 생고생인지 모르겠다.
남궁천이 나가자 남궁연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처음 진 소저를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다니.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은 지금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연적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는 자신에게 ‘엄마’라고 했다.
머리가 뛰어나다는 게 좋은 것만도 아니다.
남궁연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도 십오 년 전 연적하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의 감촉이 생생하다.
그가 학대받고 있음을 알게 되던 때의 감정은 물론.
울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이의 눈망울에 비친 자기 모습까지도.
그래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을 마침내 좋아하게 되었다니.
여섯 살의 연적하를 상대로 좋아한다니 뭐니 하는 감정을 가질 리가 있나.
“하아!”
‘연적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충격만 받은 건 아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나인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잠깐 했었다.
하지만 그건 찰나지간에 사라졌다.
연적하가 자신을 ‘엄마’나 ‘구천현녀의 화신’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다.
그래서 더욱 연적하에게 여자로 다가가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남연객점의 남수경이라는 아가씨겠지?”
함께 생활했다고 하더니 오라비처럼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객점 이름까지 두 사람 성을 따서 지을 정도니 분명 그 아가씨이리라.
남궁연은 습관처럼 주역을 펼쳤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뭐라도 보고 있어야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무심코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문 밖에서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연 누님. 안에 계세요?”
연적하의 음성이다.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자 남궁연은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마구잡이로 책장을 넘기던 그녀는 널뛰던 심장이 가라앉자 차분하게 말했다.
“들어오렴.”
조용한 음성이다.
하지만 내공이 초범입성(超凡入城)의 경지에 든 연적하에게는 천둥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연적하가 남궁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미안함을 감추기 위해서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왔어요. 조금 전 칠파이문의 기찰대에서 무영신투 백교라는 늙은이를 잡아갔어요. 어젯밤에 누가 법보를 도둑맞았는데, 백교가 그 사람 주변을 좀 얼쩡거렸나 봐요. 증거도 없고, 훔치는 걸 본 사람도 없는데, 도둑이니까 일단 잡아간 분위기예요. 백교가 속한 산채에서 억울하다고 찾아왔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섣불리 덤볐다가 그 늙은이가 진범이면 저만 바보 되는 거라서.”
“백교를 만나고 왔구나?”
“어? 어떻게 알았어요?”
“백교를 완전히 신뢰하는 것 같지 않아서. 너라면 만나 보고 그런 생각을 했겠지.”
“예, 아까 뇌옥에 들러서 훔쳤냐고 물어봤거든요. 자기 말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죠. 원래 그 늙은이가 거짓말도 잘하고, 잘 훔치거든요.”
“여래신주를 도둑맞은 건 나도 들었어.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크기의 법보라서 마음먹고 숨기면 찾아내기 어려울 거야.”
“하아! 어쩌죠? 그냥 있기도 뭐하고, 천지맹을 뒤집어엎자니 그것도 영 그렇고.”
“후후.”
남궁연이 갈등하고 있는 연적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여섯 살의 꼬마가 녹림과 천지맹을 손에 쥐고 흔들 날이 올 줄이야.
오라비는 ‘좋아한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지만 자신은 다르다.
여섯 살의 그가 내일의 영웅이 될 줄 몰랐던 것처럼, 좋아하는 마음도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마음은 십인십색인 모양이다.
“왜 웃으세요? 난 고민돼 죽겠는데.”
“드러난 건 복잡해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실제는 그렇지 않아.”
“누님은 누가 훔쳐 갔는지 알아요?”
“그건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기로 하자. 우선은 백교라는 사람에 대해 말해 봐. 그를 처음 알게 된 날부터 오늘 잡히기 전까지.”
“음, 저도 오봉산채에서 잠깐 같이 지낸 것뿐이라 잘은 몰라요. 그냥 손버릇이 나빠서 도적들 물건도 종종 훔쳐 갔다는 거? 어느 날 오봉산채가 위험해지니까 적풍채로 옮겨갔어요. 그뒤로는 못 봤고요. 아 참, 오늘 낮에 심 노인에게 술을 사 줬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마지막으로 잡혀갔어요. 제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예요.”
“하나가 더 있어. 어제는 제마대 무허산인의 주위를 맴돌았다는 거. 그렇지?”
“아, 네. 그걸 깜빡했네. 맞아요. 그런데 겨우 그런 게 범인을 잡는 데 도움이 돼요?”
“천지맹의 제마대는 용담호혈과도 같아. 무영신투라고 해도 훔쳐 가기 어려울 거야.”
“그럼 범인은 다른 사람이라는 건가요?”
“하지만 그의 행적이 공교로운 걸 보면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지는 않아.”
“공교롭다고요?”
“무허산인의 주변을 맴돈 거나, 잡혀가는 날 심 선배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니야. 그건 의도하지 않으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
“역시 백교가 훔쳐 간 거예요?”
“말했다시피 무영신투라고 해도 제마대에 들어가 훔쳐 가기는 어려워.”
“아, 어렵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 하지만 당장 그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니까, 며칠 기다려 봐.”
“사흘 후가 출정식이잖아요?”
“그전에 끝날 수도 있어.”
남궁연의 얼굴에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연적하는 홀린 듯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더 밉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왜?”
연적하가 갑자기 딴청을 부리자 남궁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니에요.”
고개를 흔들던 연적하는 문득 심통이 한 말을 떠올렸다.
-공자님, 그러지 마시고 남궁 소저를 만나면 딱 한 마디만 하십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님입니다’라고. 그럼 끝납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말 그 말을 해도 괜찮은 걸까?
행여나 어색한 관계가 되어 다시 만나기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
그러다 문득 그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연 누님.”
“응?”
“누님은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 안 궁금해요?”
“…….”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당황한 남궁연은 급히 주역으로 손을 뻗었다.
두툼한 책을 만지자 겨우 진정이 된다.
공자는 주역을 읽은 지 삼 년 만에 지천명(知天命), 즉 하늘의 뜻을 깨달았다고 하던가.
애써 다른 생각에 몰두하려는 그녀의 귓가에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님은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관심이 없으시죠?”
“그게 무슨 소리야?”
되묻는 남궁연의 음성이 가볍게 흔들렸다.
관심이 없을 리가 있나.
너무 많아서 고민인 것을.
“저에게 누굴 좋아하는지 묻지 않으셔서요. 만약 누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저는 그가 누군지 무척 궁금해서 물어봤을 거예요.”
“관심이 없는 게 아니야. 그냥 언제고 네가 알려 주기를 기다린 거지.”
“아! 그랬구나.”
연적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남궁연이 자신을 배려해 묻지 않았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누님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연적하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남궁연을 힐끔거렸다.
화용독심, 십전무후 등은 남궁연의 무공과 머리, 그리고 미모를 가리키는 말들이다.
그런 그녀에게 기웃거리는 남자가 어디 한둘일까!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사람들이 자주 모이니 그들과 친해진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깜짝 놀란 남궁연은 부지런히 책장을 넘겼다.
팔락. 팔락. 팔락.
두 사람 사이에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주역의 마지막 뒷장까지 다 넘기고 나서야 남궁연의 입이 열렸다.
“주역은 음(陰)과 양(陽)에 관한 책이야. 한 번은 음하게 하고 한 번은 양하게 하는. 그렇게 음양으로 순환하도록 하는 도(道)라고 할까. 그래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하지. 천지만물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고,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복잡한 소리에 머리를 긁적이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저는 무식해서 어렵게 설명하면 못 알아듣는데…….”
“아니, 이건 어려운 말이 아니야. 그냥 음양의 자연스러운 이치에 관한 거라니까.”
“아,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시구나.”
연적하는 그렇게 지레짐작했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주역에 관해 강론이라니?
그녀는 남녀 간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게 분명하다.
한결같은 그녀의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다.
‘이런 누님에게는 죽어도 말 못 해.’
연적하는 마음을 비우고 남궁연의 강론에 귀를 기울였다.
“……삼라만상이 무궁한 변화를 일으키는 건 양과 음의 이질적인 두 기운이 상호작용을 해서야. 그 둘의 모순과 대립이 전혀 새로운 현상을 이끌어 내지.”
‘네가 양이라면 나는 음이야. 너와 나는 맺어지거나 헤어지겠지?’
남궁연은 음양에 빗대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설사 상대가 신기수사 제갈승운이라 해도 알아듣지 못할 방법으로 말이다.
그래도 주역으로 고백하는 남궁연의 얼굴엔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