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79
279회. 종교적인 일
하남성.
정주.
칠리하촌.
천지맹.
정오 무렵.
정문 경비를 서던 천지맹 호위무사 이신이 동료 왕소삼을 툭 건드렸다.
“왕 형, 누가 이리로 오는데?”
“내버려 둬.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야?”
“그렇긴 하지만…….”
이신이 말끝을 흐렸다.
칠파이문과 오대세가가 천지맹에 상주한 뒤로 수상한 사람이 아니면 신분 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워낙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라 이신은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잠시 후 상대의 얼굴을 본 이신은 저도 모르게 구부정하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헛! 현무대 대주님 아냐?”
이신의 말에 왕소삼은 급히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규칙적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현무대 대주 무상도제 장무덕이었다.
그런데 평소의 깔끔한 모습과 달리, 마치 개방의 원로를 보는 듯하다?
풀어 헤쳐진 머리와 먼지에 절은 얼굴, 그리고 검게 얼룩진 더러운 상의까지.
이신과 왕소삼은 장무덕의 처참한 행색에 놀라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그는 누가 봐도 패잔병이거나, 사지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낭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신과 왕소삼은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허리만 깊게 수그렸다.
스윽.
장무덕이 핏발 선 눈으로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이신과 왕소삼은 장무덕이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입을 잘못 노렸다가 겨우 얻은 일자리를 잃게 될 것 같아서다.
***
장무덕의 귀환은 천지맹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쉰두 명의 현무대 고수 중에 단 한 사람만 살아 돌아온 까닭이다.
하루아침에 문주와 장문인과 가주와 후계자를 잃은 무극문, 소림사, 모용세가, 제갈가는 초상집이 되었다.
무극문은 장무덕이 살아 돌아왔지만 문주와 직계가 모두 죽어 봉문의 위기에 처했다.
그건 모용세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용세가는 가문의 핵심이 한날한시에 사라져 남궁세가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제갈가의 경우 후계자와 정예를 모두 잃어 단숨에 일반 병가로 전락해 버렸다.
더불어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은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통천각.
무림의 중대사를 논의하기 위해 열네 명의 정파 고수들이 모였다.
칠파이문과 오대세가의 대표들이 통천각 분위기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좌중을 둘러보던 장무덕이 계속해서 말했다.
“……유명교 교주는 자신을 팔황신모라고 했소. 그녀가 거느리고 있던 여덟 명의 절정고수 이름이 팔황인 것으로 보아 그것과 연관이 있어 보였소. 신모가 무얼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무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보름쯤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말하고 있는 지금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현무대를 일각(15분) 안에 몰살시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것도 고작 여덟 명이?
“그 뒤로는 앞서 말한 대로요. 내가 교주와 싸우는 동안, 현무대는 팔황에게 몰살당했소.”
장무덕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한마디 한마디 씹어 뱉듯 토해 냈다.
총사 제갈승운은 멍한 눈으로 장무덕만 바라보았다.
현무대가 몰살당했다는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제갈가 소가주와 호법과 최고 인재들의 죽음을 ‘몰살’이라는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천지맹 맹주인 무극상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팔황신모가 사오십 대로 보였다고 하셨는데, 그 나이에 신화지경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로환동을 했거나 주안술이 뛰어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신화지경이 아니고서야 호신강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소? 강기뿐이 아니오. 그녀는 의형검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소.”
장무덕은 팔황신모가 펼치던 청룡과 적룡을 떠올렸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의형검기였다.
술법 따위로는 자신의 전신공력이 담긴 직도황룡(直提黃龍)을 박살 낼 수 없다.
다시 생각해도 그것은 검기 대 검기의 싸움이었다.
“단언컨대 팔황신모는 주술뿐 아니라 무공으로 이미 신화지경에 들어갔소. 그녀는…….”
장무덕은 팔황신모가 자신에게 한 제안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언제라도 나를 찾아오거라. 특별히 너에게만은 깨달음을 나눠 줄 터 이니.
잠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유혹은 강했다.
장무덕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그녀는 천하십대고수들보다 강하오.”
“…….”
그의 충격적인 마지막 한마디에 대표자들은 한순간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둑이 터진 듯 술렁거렸다.
한차례 소란이 지나간 뒤에 누군가 물었다.
“팔황이라는 자들의 무위가 어느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장무덕이 고개를 돌려 말한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소림사의 공지 대사였다.
기찰대 대주로 천지맹에 남아 있던 그가 소림사 대표로 참석한 모양이다.
“그들은 백두마군과 십두마병의 중간쯤 되는 무위라 하더이다.”
“팔황의 무위가 정말 그 정도라면, 천지맹이 유명교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일곱 명의 백두마군도 힘든데 팔황까지 더해지면, 천지맹의 패배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팔황신모가 이런 말을 하더이다. 자신은 천하 제패에는 뜻이 없다고.”
“허면 그 마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잠시 멈칫하던 장무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자신이 바라는 것은 득도라고 했소.”
“득도요?”
공지 대사가 황당한 얼굴로 장무덕을 보았다.
그건 희대의 무림공적인 유명교주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무당파 장문인 영결상인이 끼어들었다.
“팔황신모가 무림에 뜻이 없다고 한 말은 거짓이 아닐 겁니다. 삼십 년 전에 강남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가 그들의 인신 공양(人身供養)을 치죄하다 생긴 것이고, 최근의 일들은 과거에 대한 복수니까요.”
그러자 공지 대사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반박했다.
“무림에 뜻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무림의 패권에는 관심이 없을 수 있지요. 허나 그들의 악행은 천하인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저들은 그걸 알면서도 지금까지도 인신 공양을 하고 있습니다. 천하인들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뜻이지요. 패권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천하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빈승은 모르겠습니다.”
공지 대사의 말에 영결상인이 변명처럼 말했다.
“빈도 역시 그걸 부인하지는 않소. 다만 이번 유명교와의 싸움은 과거처럼 직접적인 패권 다툼이 아님을 말한 것뿐이외다.”
공지 대사는 속이 부글거렸지만 참았다.
패권 다툼이 아니라고 하지만 유명교는 이미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엎어치나 메치나 같은 소리인 셈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장무덕이 입을 열었다.
“동도들께 미안하지만, 우리 무극문은 오늘부로 봉문에 들어갈 것이오.”
무거운 침묵이 통천각을 감돌았다.
그때 천지맹에 남아 있던 모용세가의 원로 모용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모용세가도 오늘부로 봉문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무쪼록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모용세가의 봉문 선언에 대표자들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세가는 현무대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이었다.
가주는 물론 소가주를 포함한 가주의 직계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지금으로서는 앞으로 모용세가가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모용문은 대표자들에게 읍을 해 보인 후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장무덕에게로 향했다.
먼저 봉문 선언을 한 장무덕의 거취가 궁금했던 것이다.
“비록 무극문은 봉문하지만, 노부는 복수를 위해 천지맹에 남을 것이오.”
“어려운 결단 내려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맹주인 무극상인이 공손이 습을 해 보였다.
“별말씀을. 이후로 노부는…….”
장무덕이 말을 끊고 잠시 삼 대의 대주를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것이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 천지맹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거취를 결정했었다.
“주작대와 함께 행동하도록 하리다. 물론 맹주와 주작대 대주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말이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남궁 대주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무극상인의 물음에 검왕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상도제와 같은 절대고수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로서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 대협,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장무덕은 무림의 선배인지라 남궁벽의 태도는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무덕도 묵례로 화답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무극상인은 총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봉문한 모용세가만큼이나 제갈가 역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제갈가는 군소 방파에서 지방의 병가(兵家)로 추락했다.
그간 쌓은 제갈가의 공이 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총사 자리를 지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맹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제갈승운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사의 자리라도 지키려면 그에 맞는 능력을 보여야 했다.
“장 대협, 유명교 교주인 팔황신모는 지금도 여전히 풍지산에 남아 있습니다. 혹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모르네.”
제갈승운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본래 별호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팔황신모도 그럴 것입니다. 팔황은 그 마녀가 부리는 여덟 명의 고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모는 무엇이겠습니까?”
“…….”
대표자들은 계속 말하라는 듯 제갈승운에게 집중했다.
“그 전에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주작대에 청류신이라는 술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천지맹을 떠났지요. 이유는 그녀의 법보가 염매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염매가 무엇인지는 이미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갈승운이 대표자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칠파이문과 사대세가 대표들이 넘어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청류신이 바로 풍지산 선녀암 출신입니다. 조사를 해 보니 그녀는 자신의 스승을 신모라고 불렀더군요. 아마도 팔황신모의 신모는 거기서 나온 것 같습니다.”
“아!”
대표자들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신모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육신이 아닌 영혼의 어머니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그 마녀가 유명교 교주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팔황신모는 풍지산에서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종교적인 일이라는 게 무엇이오?”
전진파 장문인 무종상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재도 진행 중인 천지맹과의 싸움보다 더 중요한 종교적인 일이 있을까?
“십두마병과 백두마군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두가 따지고 보면 인신 공양으로 만들어진 괴물들이 아닙니까? 풍지산을 두고 죽음의 산이니, 지옥문이 열리느니, 세상의 종말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지요? 팔황신모는 그곳에서 천두마왕이 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천두마왕’이라는 말에 대표자들이 술렁거렸다.
“지금도 무위가 신화지경에 이르렀다는데 천두마왕까지 된다면 그야말로 무림의 종말이 아닌가!”
“천두마왕이란 스스로 염마왕이 된다는 소리가 아니오?”
“그럼 지옥의 문이 열린다는 게…….”
“과연! 염마왕을 불러낸다는 소리였구먼. 그 마녀는 현세를 지옥으로 만들 셈인가!”
장무덕은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신화지경에 든 팔황신모의 무위를 고려하면 그녀는 이미 천두마왕이다.
‘쯧, 제갈승운. 그대는 항상 잘 나가다가 엉뚱한 길로 빠지는구나.’
장무덕은 어쩌면 그게 제갈승운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십전무후 남궁연과 연적하를 만나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