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80
280회.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 낸다.
정파 대표들의 회의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고 끝났다.
지금의 천지맹 전력으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파 대표자들이 하나둘씩 통천각을 떠났다.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이 앞서가고 있는 무상도제 장무덕에게 급히 다가갔다.
“장 대협.”
“무슨 일인가?”
“개인적으로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이 되시는지요?”
“괜찮네. 말해 보게.”
제갈승운은 정파 대표들이 모두 사라지자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가주로서 본가 제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는지 알고 싶습니다.”
“말했다시피 팔황신모와 싸우는 동안 몰살당해서……. 볼 수 없었네.”
“그럼 가는 동안의 일들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출정식 때의 모습밖에 알지 못합니다.”
잠시 제갈승운을 보던 장무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라는 게 뭔지 알 것도 같았다.
한순간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기억을 하나라도 더 갖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어느 날 제갈가 소가주 천명검과 모용세가의 능운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네. 두 집안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지? 둘이 어찌나 다정하게 다니던지. 현무대 모두가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지.”
“…….”
제갈승운은 먹먹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풍지산에서 돌아오는 대로 제갈성과 모용미를 맺어 줄 계획이었다.
그런 뒤에 둘을 제갈가로 보내려 했건만, 한발 늦어 버렸다.
“교구현에 도착한 날, 꽃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속삭이는 걸 본 게 마지막이네. 자네 아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네.”
장무덕은 속으로 ‘저승으로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을 걸세’라고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큰 위로가 됐습니다. 장 대협에게도 큰 아픔이었을 텐데, 너무 제 생각만 한 것 같아 면목이 없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제갈승운의 인사에 장무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현무대 대주였기에 대원의 가족을 위해 해 줘야 하는 일이었다.
제갈승운과 헤어진 장무덕은 곧바로 무극문의 숙소로 갔다.
그는 남아 있던 무극문 관계자들에게 먼저 돌아가 봉문하라고 일렀다.
몇 안 되는 무극문 관계자들은 일다경(약 20분) 만에 짐을 꾸려 떠났다.
허허로운 표정으로 텅 빈 전각을 보던 장무덕은 의천각으로 향했다.
***
의천각.
절간 같던 남궁세가의 숙소인 의천각은 때아닌 손님들로 시끌벅적했다.
위기를 직감한 방파의 대표들이 십전무후 남궁연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몰려든 까닭이다.
그들은 더 이상 총사인 제갈승운의 식견을 믿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제 자식과 식솔들까지 사지로 몰아넣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이라 떠들어 댔다.
뒷물결은 남궁연이고 앞 물결은 제갈승운이었다.
그렇게 제갈승운을 저만치 뒤로하고 남궁연이 부상했다.
하지만 남궁연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손님들을 만나 주지 않았다.
그녀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가족과 연적하뿐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혹시나 하고 의천각을 기웃거렸다.
덕분에 의천각은 남궁연과 만나기 원하는 사람들로 밤낮없이 붐볐다.
“시끄럽네요.”
차를 홀짝거리던 연적하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깥은 이제 막 마당으로 들어오는 사람, 돌아 나가는 사람, 담장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청운검 남궁천이 턱을 세우며 말했다.
“남궁세가의 저력을 뒤늦게 알아보고 저러는 거지. 우리는 한번 뒤통수 맞은 정도로 봉문하지 않거든. 한 대를 맞았으면 열 대쯤 돌려줘야 무림세가라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냐? 연아야?”
남궁천의 허세에 남궁연은 피식 웃기만 했다.
실상은 반대였다.
유명교에 열 대쯤 맞았다면, 한 대 정도나 돌려줬을까?
그래도 연적하는 남궁천의 기개 어린 말에 그저 감동한 얼굴이었다.
“형님, 그런 건 녹림과 비슷하네요. 우리도 원수는 뼈까지 발라 먹으라고 하는데.”
“그러냐? 녹림에도 쓸 만한 게 있다니까. 그런데 적하야.”
“예?”
“사파 분위기는 좀 어떠냐? 이번 일로 정파는 발칵 뒤집혔는데.”
“이쪽도 비슷해요. 벌써부터 유명교와 협상을 하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어요.”
사실 사파 입장에서는 유명교에 원한이 없었다.
그런 만큼 중과부적인 지금 슬며시 발을 뺐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협상을? 유명교가 순순히 응할까?”
“그놈들은 아쉬울 게 없는데 그러겠어요? 더구나 제 문제가 걸려 있어서.”
“네 문제?”
“유명교에서 제 목에 포상금까지 걸었잖아요. 심 노인은 제가 그들에게 눈엣가시라서 선선히 협상에 응할 리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기도 하겠다.”
남궁천이 근심 어린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다.
유명교가 파천마군에게 사파와 연적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그는 사파를 선택할 것이다.
사람들은 잠깐 그를 비난하겠지만 이내 잊으리라.
그런 게 세상의 이치다.
하지만 정작 연적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보다 못한 남궁천이 넌지시 물었다.
“대책은 있고?”
“무슨 대책요?”
“혹시라도 파천마군이 너를 유명교에 넘기려고 하면 어쩔 거야?”
“에이, 설마요. 그 노인네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데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렇죠, 누님?”
연적하의 물음에 남궁연은 금방 답하지 않았다.
그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 말 모두 일리가 있어요. 적하야, 훗날 천지맹이 유명교와 협상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 너도 파천마군만 믿지 말고 대비책을 세워 뒤.”
“대비책요?”
“그래, 파천마군의 약점을 알아 둔다거나, 그에게 네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인식시켜 준다거나 하는. 그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도…….”
남궁연은 말끝을 흐렸다.
그 반대는 너무도 급진적이라 연적하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었다.
“그 반대로 생각한다는 건 뭐예요?”
“강호에서는 어제의 적이 내일은 친구가 될 수도 있거든. 정의맹이 녹림과 손을 잡은 것처럼.”
“아!”
연적하는 남궁연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남궁연은 혹시라도 그가 다르게 받아들일까 봐 자세히 설명했다.
“파천마군이 널 버리려 한다면, 네가 유명교에 투신하는 것도 괜찮다고 봐. 유명교 교주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어쩌면 너를 적대시하지 않을지도 몰라. 누가 알겠니? 사람의 속을.”
듣고 있던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아. 그건 좀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한창 싸우고 있는 유명교에 투신하라니? 너무 나간 거 아니냐? 그들은 남궁세가의 원수라고.”
“오라버니. 만약 천지맹이 유명교와 평화협정을 맺으면, 우리도 더 이상 유명교를 적대시할 수 없어요. 그때 가서 누가 적하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적하에게 ‘너 혼자 천하를 상대로 싸우라’고 하실 거예요?”
“끙! 그건 또 그거대로 말이 안 되네.”
남궁천이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까지 ‘천지맹이 유명교와 평화 협정을 맺는다’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동생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하기야 지금의 남궁세가로는 천지맹이 어떤 선택을 해도 막지 못하겠지?’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털컥 내려앉았다.
천지맹과 수도자들을 제물로 바치는 유명교가 공존하는 세상이라니?
그거야말로 천하무도(天下無道)의 다름 아니다.
도(道)가 사라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남궁천이 저도 모르게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 때다. 문밖에서 남궁세가의 제자 하나가 목에 잔뜩 힘을 싣고 말했다.
“소가주님. 안에 계십니까?”
“무슨 일인가?”
“무상도제 어르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무상도제라는 말에 남궁천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로 나갔다.
정말 무상도제 장무덕이 허연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채 마당에 서 있었다.
남궁천은 황급히 읍을 하며 말했다.
“어르신, 가친께서는 지금 출타 중이십니다. 행선지를 따로 말씀해 주시지 않아서…….”
“허허. 괜찮네. 자네의 부친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닐세. 안에 십전무후와 연 공자가 있다고 들었네만.”
“예. 모처럼 셋이서 한담을 나누고 있던 중입니다.”
“잘됐군. 이 늙은이도 그 자리에 끼고 싶은데 가능하겠는가?”
“어이쿠! 가능하다마다요. 오히려 저희에게는 영광입니다. 안으로 오르시지요.”
남궁천이 마루 끝까지 나가 장무덕을 맞이했다.
외부 손님을 받지 않는 것도 정도가 있다.
무상도제와 같은 대협객의 방문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다.
장무덕은 생기발랄한 남궁천을 한 번 슥 쳐다본 후에 마루로 올라섰다.
방으로 들어간 장무덕은 상석으로 안내되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남궁천, 남궁연, 연적하도 뒤따라 앉았다.
남궁천을 포함해 다들 천지맹에서 알려진 사람들인지라 따로 소개는 필요 없었다.
백발 백미의 무상도제 장무덕은 전대의 원로 고수로 그 기도가 남달랐다.
자연히 남궁 남매와 연적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내가 좋은 시간을 뺏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먼.”
장무덕의 다소 뻔한 빈말에 남궁천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휴! 아닙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좋은 시간이 어디 있다고요.”
“아니야, 오늘은 내가 들을 생각으로 찾아왔네.”
“예? 듣기 위해 오셨다고요?”
남궁천이 남궁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장무덕도 동생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모양이다.
장무덕은 내친김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실은 오늘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대표자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었다네.”
장무덕은 회의 내용을 간추려 말했다.
어차피 특별한 결과가 있었던 게 아닌지라 이야기는 금방 끝났다.
“……총사는 팔황신모가 천두마왕이 되기 위해 풍지산에 남아 있다고 했네. 하지만 나는 그것에 그다지 동의가 되지 않아서 말일세.”
장무덕은 말을 끊고 남궁연과 두 남자를 보았다.
남궁연이 시종일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임에 비해, 남궁천과 연적하는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뭘 알고 저러는 건지…….’
두 청년에게 묻고 싶었지만 시원치 않은 대답이 나올 것 같아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팔황신모가 천두마왕이 되면서 신화지경에 든 것 같거든. 솔직히 천하십대고수 모두가 신화지경을 꿈꾸지만 그건 인간으로는 오르기 어려운 경지라네. 천두마왕쯤 되거나, 그에 버금가는 기연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팔황신모가 풍지산에 남아 있는 이유로 그것만 한 게 없음은 나도 동의하네. 그러니 총사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그쪽으로 굳어진 거겠지.”
남궁천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천두마왕인 팔황신모가 풍지산에 남아 있는 이유를 알고 싶으신 거군요?”
“그렇다네. 아무래도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 마녀가 이미 천두마왕이라면 그렇겠네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남궁천이 연적하와 남궁연을 힐끔 바라보았다.
‘짐작 가는 게 있다면 뭐라도 말해 보라’는 눈빛이다.
연적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왠지 저는 알 것 같은데요? 풍지산이 좋아서 눌러앉아 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사실 저도 정주에 객잔을 하나 가지고 있거든요. 거기에만 있으면 뭐랄까? 몸과 마음이 편안해서 다른 데는 별로 가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나름 경험에서 우러난 말이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장무덕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가볍게 눈을 찡그리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