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91
291회. 빛 좋은 개살구
무척현.
해거름 무렵.
양류객잔으로 팔 남 일 녀가 들어섰다.
풍지산으로 가는 연적하와 십전무후 남궁연 일행이다.
탁자를 닦고 있던 점소이 왕소가 쪼르르 달려가 낯선 손님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쇼!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왕소는 손님들 중에 가장 나이가 젊은 청년, 연적하를 빤히 보았다.
얼떨결에 연적하가 일행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왕소는 지체하지 않고 창가 자리로 손님들을 이끌었다.
창가 자리에 간 사람들은 적당히 흩어졌다.
무상도제 장무덕과 비슷한 연배의 곤륜삼선이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연적하, 남궁연, 구천노도 심통도 한자리에 모였다.
심통의 옆자리에 귀영자군과 시산마도 혁무춘이 따로 자리를 잡았다.
왕소는 탁자를 순서대로 다니며 주문을 받았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귀영자군과 혁무춘의 순서가 되었을 때다.
멀뚱멀뚱 보고 있던 연적하가 그를 불렀다.
“어이, 점소이 형제.”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이분들 주문을 마저 받고 가겠습니다.”
“거기는 주문 안 받아도 돼.”
“예?”
왕소가 의아한 얼굴로 연적하와 두 노인을 번갈아 보았다.
분명히 일행 같아 보이는데 주문을 받지 말란다.
두 노인의 몰골이 초췌해서 뭐라도 더 챙겨 주고 싶은데 말이다.
“그 두 늙은이는 이따가 먹을 거야. 거긴 아예 신경도 쓰지 마.”
왕소는 무심코 두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막 ‘그래도 되겠느냐?’고 물으려는데 혁무춘이 먼저 말했다.
“가라. 여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냐.”
“아, 예, 예.”
당황한 왕소는 굽실거리며 얼른 주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기다리던 음식이 나오고,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됐다.
귀영자군과 혁무춘은 진한 음식 냄새를 맡으며 쉬지 않고 차만 마셔 댔다.
‘하아!’
물배를 채우던 귀영자군은 암암리에 한숨을 흘렸다.
살짝 쉰 건량 대신에 모처럼 사람다운 음식을 먹나 싶었는데 그것도 틀린 모양이다.
그때 객잔으로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왔다.
모두 여섯 명의 중년인들이었는데, 독하게 생긴 얼굴에는 칼자국이 요란했다.
하남육적이라 불리는 사파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두 개의 자리에 나누어 앉자마자 각종 음담패설을 쏟아 냈다.
오죽하면 귀영자군이 슬쩍 남궁연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녹림이야 워낙 판이 더러워서 느낌도 없었지만 그녀는 남궁세가 사람인 까닭이다.
하지만 남궁연은 소란을 피하고 싶은지 한쪽 귀로 듣고 흘리는 분위기였다.
염탐조의 움직임을 감추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그동안 맺힌 게 많았던 귀영자군은 마음속으로 잡놈들을 응원했다.
음식이 나오자 음담패설도 흐지부지 끝났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하남육적의 첫째인 낭아도 녹병비가 먹다 말고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이번에는 녹림이 줄을 잘못 섰어. 정파 놈들이 아니라 유명교와 손을 잡았어야지.”
둘째인 거령도 목운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큰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현무대가 산서성에서 몰살을 당했다지 않습니까? 정주에 이제 오백이나 남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녹림이 멍청한 짓만 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정의맹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텐데 말이죠.”
“파천마군도 늙어서 판단 능력이 떨어진 거 같아. 이럴수록 십이마군이 잘해야 하는데. 그 병신들은 아부하는 거 빼면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원.”
“파천마군이 죽기 전에 총채주 자리를 물려받으려면 열심히 똥꾸멍을 빨아 줘야죠. 크하핫!”
첫째와 둘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셋째 수라겸 파연래가 질 수 없다는 듯 한마디 보탰다.
“지금쯤 똥구멍이 다 헐어 문드러졌을 겁니다.”
순간 다섯 사내는 입안에 들었던 음식까지 뿜어내며 크게 웃었다.
‘이 미친놈들이!’
사내들의 조롱에 귀영자군이 막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순간이다.
주제는 금방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숨넘어갈 듯 꺽꺽거리며 웃던 첫째 녹병비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머리 좀 굴린다는 놈들은 죄다 낙양으로 몰려가고 있다지 않더냐? 하루라도 빨리 유명교에 투신해 눈도장을 받아 두겠다는 거지. 이젠 좌우 살필 것 없이 무조건 유명교가 답이다.”
“맞습니다. 녹림도 결국 발을 뺄 거라는 말이 있던데, 그래 봐야 늦은 거죠. 유명교에서 녹림을 곱게 볼 리가 없습니다. 거긴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 거예요.”
둘째 목운파의 말에 셋째 파연래가 아는 척을 했다.
“그게 다 총순찰인지 뭔지 하는 어린 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놈이 가만히 있는 유명교를 들쑤시고 다녀서 결국 정의맹과 손을 잡게 된 거잖습니까? 하여간 어린 놈의 새끼들은 생각이 없다니까요. 멀리 내다볼 줄도 좀 알아야지. 그 새끼 때문에 녹림만 젓 됐죠.”
금방이라도 뛰어나가 사내들을 쳐죽이려던 귀영자군은 화를 가라앉혔다. 사내들이 연적하를 욕하자 조금 더 들어 주기로 한 것이다.
‘뭐가 어쩌고 어째?’
지금까지 남의 일처럼 듣고 있던 연적하가 사내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남궁연이 나직이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모르고 떠드는 거니까.”
사실 연적하는 총채주 파천마군의 부탁으로 싸웠다.
하지만 그건 십이마군 정도 되는 위치가 아니면 알지 못할 고급 정보였다.
“예.”
연적하는 똥이라도 씹은 얼굴로 마지못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애써 무시하려 할수록 사내들의 이야기가 더욱더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런데 파천마군이 왜 그런 애송이를 총순찰에 앉혔나 모르겠습니다.”
“그야 당연히 흑수선 때문이지. 사위가 될 놈이니까 위에서 끌어 준 거 아니냐.”
“와아! 그놈이 흑수선의 남자라는 소문은 들었는데. 정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겁니까? 그놈이 흑수선 위에서 떡방아를 찧었다고요? 씨벌!”
“너무 배 아파 하지 마라. 유명교와 척을 진 놈이라 오래 못 갈 게다. 파천마군이 늙었지만 그 정도 분별력도 없겠느냐?”
이번에는 남궁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흑수선과 연적하를 그런 식으로 엮어서 말하는 게 영 듣기 싫어서다.
그녀는 상체를 틀어 사내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던 중에 씩씩거리던 둘째 목운파와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사내의 입이 헤 벌어지자 불쾌해진 남궁연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목운파의 가슴에 불이 붙은 뒤였다.
그는 여자를 본 순간 머릿속에 아무것도 안 떠오를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맹세코 살아생전에 처음 보는 미모였다.
언젠가 먼 발치에서 보았던 흑수선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라니!
음심이 동한 목운파는 슬쩍 여자의 일행을 헤아려 보았다.
셋이다.
그것도 어린놈 하나와 늙은이 하나.
혹시 일행이 있을까 싶어 주변의 다른 자리도 유심히 살폈다.
두 자리에 늙은이들이 있었지만 같은 일행으로 보이지 않았다.
‘흠! 도검을 보니 무림인들 같은데…….’
하지만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전부 달랐다.
늙은이 넷은 정파 분위기지만, 다른 둘은 한눈에 봐도 사파였다.
노는 물이 다르니 같은 일행일 리가 없다.
둘째인 목운파가 자꾸만 어딘가를 훔쳐보자 첫째인 녹병비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는 얼굴이라도 있느냐?”
“큰형님, 흑수선보다 열 배쯤 더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녹병비는 조금 전까지 목운파가 힐끔거리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고 긴 머리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비록 뒷모습뿐이지만 균형이 잘 잡힌 몸매였다.
“여자의 얼굴이 어떻기에?”
“큰형님도 보면 말이 안 나올 겁니다. 저런 얼굴은 처음 봅니다.”
“그 정도냐?”
녹병비가 관심을 보였다.
둘째 목운파는 여섯 의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흑수선을 본 사람이다. 그런 그가 흑수선보다 아름답다고 했으니 정말 뛰어난 미색이리라.
그때 입과 몸이 가벼운 셋째 파연래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형님들, 소제가 가서 우리와 합석이 가능한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물론 ‘가서 끌고 오겠다’는 소리다.
다섯 남자는 큰소리로 웃으며 그의 행동을 부추겼다.
셋째 파연래가 자리를 뜨자 첫째인 녹병비는 벌써부터 입맛을 다셨다.
이쪽의 소리를 들었을 법도 한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건 저들이 자신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이미 여자는 자신들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연래가 어슬렁어슬렁 여자 쪽으로 다가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다.
연적하가 물고 뜯던 닭 뼈를 귀영자군에게 집어 던졌다.
‘쉬익!’ 하는 파공성과 함께 뭔가 날아오자 귀영자군은 황급히 한 손으로 낚아챘다.
‘으윽!’
무슨 놈의 공력이 이렇게 강한지!
뼈를 잡고 있는 손바닥이 찢어진 것처럼 얼얼했다.
이걸 놓쳤다면 머리에 박혔을 거라고 생각하자 소름이 오싹 돋는다.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귓구멍을 뚫어 주려고 그랬지. 저놈들이 총채주님 욕을 그렇게 해 대는데 듣고만 있더라? 십이마군의 첫째라면서? 파천마군 님이 이걸 알면 꽤나 실망할 텐데.”
“저는, 저들의 대화가 수상쩍어서 더 캐내 보려고 기다린 것뿐입니다.”
귀영자군은 옹색한 변명을 했다.
‘너를 욕하기에 더 들어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수상쩍기는 개뿔. 유명교로 몰려가는 사파 떨거지들이 어디 한둘이야? 조용한 데 끌고 가서 좀 다져 놓고 와. 일각(15분) 안에 돌아와야 할 거야.”
“일각요?”
“응, 늦으면 다른 데로 샛다가 온 거라고 생각할게. 그때는 오늘 먹은 거 다 토해 놔야 할 거야.”
귀영자군과 혁무춘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각이면 다른 짓은커녕 저놈들을 다져 놓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귀영자군과 혁무춘은 바람처럼 달려가 하남육적의 혈도를 점했다.
그리고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그들을 옆구리에 끼고 밖으로 날랐다.
귀영자군과 혁무춘은 정확히 일각 안에 돌아왔다.
피에 젖은 손을 닦지도 못하고 온 걸 보면 얼마나 급하게 서둘렀는지 알 만도 하다.
심통이 조금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사파 고수들이 낙양으로 몰려가는 것 같은데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냅 둬. 막는다고 안 갈 사람들도 아니잖아. 이젠 흐름이 유명교 쪽으로 완전히 넘어갔는데 뭘.”
“그야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가 녹림까지도 유명교로 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가면 가라지.”
“공자님,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유명교에서 공자님의 목에 건 포상금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절대로 녹림을 그냥 받아 주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총채주님이 공자님을 앞세운 것도…….”
심통은 말끝을 흐렸다.
너무 불경스러운 내용인지라 입 밖에 내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파천마군은 이런 날을 대비해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녹림의 칼을 맡긴다’고 했지만 그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지금도 실질적으로 녹림을 움직이는 건 십이마군들이었다.
연적하를 버리는 패로 사용한 건지 아닌지는 오직 총채주만 알리라.
근심하고 있는 심통에게 남궁연이 말했다.
“그 문제는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 전에 유명교에 큰 변화가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변화라면 어떤?”
그러나 남궁연은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유명교에 연관된 산풍고(山風蠱)의 괘는 또 다른 의미도 품고 있다.
예컨대 산이 윗사람이면 풍은 아랫사람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합하지 못하여 반목함으로 독[蠱]이 생겼다면…….’
산풍고가 가져올 충격의 크기에 따라 유명교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