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15
315회. 지고도 이기는 법
연적하는 녹림도치고 술을 즐기지 않는다.
구천노도 심통의 표현에 의하면 술로 입가심을 하는 정도다.
더더군다나 폐가에서의 술자리다.
‘맛도 더럽게 없네.’
시고 쓴맛이 강해 입에 맞지 않았다.
확실히 자신은 달달한 향설주(香雪酒)가 취향이었다.
그는 슬그머니 술잔을 내려놓고 남진무사 동유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요?”
그러자 동유수가 아쉬운 얼굴로 입에서 술잔을 뗐다.
“허어, 그리 급하게 일 이야기를 해야겠소?”
“일이라니요? 나는 녹림인데.”
연적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동유수의 말을 들으니 문득 파천마군이 떠오른다.
파천마군도 번거로운 일을 맡기기 전에 꼭 저런 식으로 말했었다.
“녹림은 황상의 백성이 아니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리로 튀나요?”
“연 공자와 내가 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오.”
“어이쿠! 사양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총채주님에게 코가 꿰여서 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이젠 남의 일에는 가급적 나서지 않을 거예요.”
“나서야 할 게요.”
“왜요?”
연적하가 도발적으로 동유수를 응시했다.
‘나서긴 뭘 나서. 내가 싫다면 그만 아닌가?’
그러자 동유수는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연 공자의 외숙이 어찌 지내시는지 아시오?”
“하아! 그래서 천지맹에 와서 일 많이 해 줬잖아요. 뭘 더 바라세요?”
“흥분하지 마시오. 본관은 외숙의 근황을 아느냐고 물어본 것뿐이니.”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알고 보면 좋은 일이니 긴장하지 마시오.”
“뭔데요?”
“연 공자의 사촌동생인 유화 소제가 조만간 혼인을 할 모양이오.”
“아, 그래요? 잘됐군요. 그런데 그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죠? 초대하면야 가 보기는 하겠지만.”
“그럼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하십시다. 지금은 지금은 본관과의 만남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니.”
연적하가 신경질적으로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뭐? 일 이야기가 어쩌고 하더니 선입견을 가졌다고? 이게 말이야 방귀야.’
상대가 녹림도였다면 곡소리가 나게 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적하는 한 잔 술로 답답함을 일단 배 속에 구겨 넣었다.
금의위와 척을 지면 녹림은 물론 객잔까지 탈탈 털리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연 공자를 찾아온 것은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요.”
“일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었어요?”
“일 이야기는 사실 급한 게 아니라오. 그보다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확인하고 싶소.”
“소문요?”
“유명교와 천지맹이 전쟁을 끝낼 거라는 소리를 들었소. 어떻게 된 일이오?”
연적하는 대답에 앞서 동유수의 안색을 살폈다.
금의위에서는 천지맹을 이용해 유명교를 박살 내려 했다.
그런데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로 전개됐다.
천지맹이 막심한 피해를 보고, 급기야 전쟁까지 끝내려 하니 말이다.
“그게 실은…….”
연적하는 천지맹에서 열린 회의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그리고 오늘 유명교와 종전 협상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소문이 참 빠르네요?”
“관인과 교류하는 무림인이 많기 때문이오.”
“아, 그렇구나. 교류…….”
연적하는 할 말이 없었다.
강호(江湖)는 생각처럼 독립적인 세계가 아니다.
무림인들은 겉으로 관부를 비난하면서도 뒤로는 그들을 도왔다.
‘하긴 나도 그중에 하나니 할 말 없지.’
어쩌다 이렇게 금의위와 깊숙이 엮이게 됐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금의위를 만나도 이전처럼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으니 말 다했다.
‘가만, 그런데 동유수의 낯빛이 어둡지 않다?’
제구실을 못 한 천지맹으로 인해 실망해야 하는데 그는 담담해 보였다.
“금의위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표정이 밝네요?”
“물론 미흡한 점은 있지만 아직 천지맹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왜요? 천지맹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는데.”
“그보다는 궁금한 게 있소.”
“또 뭔데요?”
동유수가 연적하의 눈을 응시했다.
연적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진중한 분위기를 보니 왠지 지금부터가 본론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연 공자는 풍지산에서 교주를 만났소?”
“그런데요?”
동유수는 대답 대신에 갑자기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순간 작은 방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묵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커덩. 철커덩. 철커덩. 철컹!
깜짝 놀란 연적하는 술상을 엎으며 벌떡 일어났다.
콰당.
“무슨 짓이에요!”
연적하는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어느새 덜렁거리던 작은 창문이 철판으로 꽉 막혀 있었다.
사방에서 난 소리로 보아 문짝도 막힌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작은 방에 갇혀 버린 것 같다.
노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렇다고 동유수를 베지는 않았다.
그도 함께 갇혔다는 것은 살의가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일어선 동유수가 덜렁거리는 창문을 손으로 잡아 뜯어냈다.
그리고 철판을 손으로 세게 두드렸다.
쾅. 쾅.
“기문진식으로 작동하는 철판이오. 보다시피 두께가 무려 일 촌(약 3센 티)이나 되는 무쇠외다. 그러니 때려 부수고 나갈 생각은 하지 마시오.”
“왜 이러는 건데?”
연적하의 말이 짧아졌다.
그는 동유수에게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한때나마 동지라고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철판 외부는 이 나라 최고의 법사들이 만든 항마부(降魔符)로 도배를 했소.”
“아, 그러니까 왜?”
“그건 연 공자가 교주를 만났기 때문이오.”
순간 연적하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혹시 금의위에서 교주의 언령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천하십대고수인 무상도제 장무덕까지도 부지불식간에 홀리는 언령이니 겁이 날 게다.
“혹시 내가 언령에 당했을까 봐 그러는 거예요?”
동유수의 눈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언령을 알고 있다니 조금 안심이 된다.
그래도 동유수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맞소. 연 공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에 나는 목숨을 걸었소. 지금부터 부적 하나를 연 공자의 몸에 붙일 것이오.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겠소.”
“무슨 부적인데요?”
연적하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확실히 동유수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다.
만약 자신이 언령의 주박에 걸린 상태라면 그는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동유수가 품 안에서 괴황지 하나를 꺼냈다.
괴황지에는 피처럼 붉은 주사로 기이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파령멸진부(破靈滅盡符)요. 교주의 언령을 깨뜨리기 위해 만들어진 부적이외다. 연 공자가 언령의 주박에 걸려 있다면 조금 고통이 뒤따를 거요.”
말과 함께 동유수는 번개처럼 파령멸진부를 연적하의 가슴에 박았다.
퍽.
“윽!”
연적하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부적을 때려 박듯 붙일 때 아파서 내지른 소리가 전부였다.
머쓱한 얼굴로 지켜보던 동유수가 부적을 회수해 품 안에 도로 넣었다.
“만약 언령에 당했다면 부적은 언령과 함께 불에 탔을 것이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연 공자가 언령에 당하지 않았다고 믿었소.”
“부적보다 주먹이 더 아팠어요.”
“그건 처음으로 하는 일이다 보니……. 자자, 그쯤하고, 자리를 옮깁시다.”
동유수가 주먹으로 철판을 몇 차례 짧게 끊어쳤다.
그게 신호였던 듯 이번에는 사방에 붙어 있던 철판이 떨어져 나갔다.
동유수가 안내한 곳은 바로 옆집이었다.
옆집은 폐가와 달리 깨끗했지만 술과 안주는 동일했다.
동유수가 빈 잔에 회계운로를 따르며 물었다.
“그럼, 이제 하다가 만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풍지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소?”
“어디까지 말해야 돼요?”
연적하의 물음에 동유수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핫! 내 숱한 무인들을 만나 봤지만 연 공자 같은 사람은 처음이오. 솔직히 말하리다. 지금 연 공자와 우리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있소. 천지맹은 물러설지 모르나 우리는 끝까지 갈 거요. 연 공자는 어떻소? 강요하지는 않으리다. 연 공자가 가고 싶은 곳까지만 말해 주시오.”
연적하는 동유수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만약 그가 남김없이 말하라고 했다면 오히려 감추었을지 모른다.
‘가고 싶은 곳까지라…….’
솔직히 총채주에게 등 떠밀려 천지맹까지 오게 되었다.
분명히 시작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연적하는 팔문팔상진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동유수는 의외로 육정육갑의 신력과 이매망량에 대한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팔문팔상진을 겨우 빠져나가서 교주를 만났어요. 심 노인이 중독당해서 해약이 필요했거든요. 그것만 아니었으면 절대 선녀암에는 가지 않았을 거예요.”
“교주가 선선히 해약을 주더이까?”
“백두마군 중에 하나를 산 채로 데려오라는 조건을 내걸더라고요. 그러기로 하고 해약을 받았죠.”
“그 말은 혹시…….”
“맞아요. 유명교에 내분이 일어났어요. 물론 교주가 전쟁을 중단하려는 이유가 내분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그럴 줄 알았소.”
“그럴 줄 알았다고요?”
연적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유수를 보았다.
‘총사 놈도 모르는 일을 금의위가 안다고? 어떻게? 유명교의 내분은 염탐조만 알고 있는데.’
“교구현과 풍지산 인근에 사람들을 심어 두었소. 염탐조 보다 며칠 앞서 백두마군 넷이 풍지산에 올랐다고 하더이다. 백마사에 있어야 할 그들이 은밀하게 풍지산으로 간 이유가 무엇이겠소? 백마사에서 내분이 일어났으니 은밀히 교주를 만나야 했겠지. 그렇지 않소?”
‘아하! 이제 보니 그 네 사람이 배은망덕한 사람들이구나. 그런데 교주는 왜 그들을 죽이지 않았지? 팔문팔상진과 교주의 무위라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적하에게 동유수가 거듭 물었다.
“아니오?”
“맞아요. 그 네 명의 백두마군들 이름이 뭐죠?”
연적하는 길게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맞다고 했다.
백두마군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 것만 알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다.
“혼세검마, 악불, 적월, 혼철혈귀요.”
연적하의 눈이 빛났다.
역시나 ‘적월’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저 네 사람이 배은망덕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유명교의 내분을 알게 된 동유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빨리 돌아가서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다.
금의위 남진이 천지맹 창설에 일조했으니 이보다 큰 공도 없었다.
“연 공자, 천지맹은 실패한 게 아니오. 천지맹이 아니었다면 유명교가 내분을 일으켰겠소? 천지맹과의 전쟁이 저들을 갈라 놓았던 거요.”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교 내분을 그렇게 해석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천지맹에 공을 돌리면 자신도 면이 선다.
“유명교에 내분이 일어났다면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하니 그만 일어나십시다.”
마음이 달아오른 동유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고로 결과가 드러나기 전에 먼저 보고서를 올려야 공이 되는 법이다.
그의 위치에서 유명교 내분과 천지맹을 연관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연적하도 미련 없이 일어섰다.
동유수는 떠나기 전에 연적하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이번 일에 연 공자의 공이 크오. 연 공자가 녹림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어찌 천지맹이 만들어졌겠소? 우리 남진에서는 공을 독식하지 않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게요.”
포상할 테니 입을 맞추자는 소리다.
“뭐 그렇게까지…….”
연적하가 멋쩍게 웃었다.
총채주와 금의위 사이에서 줄타기 한 것밖에 없는데 이게 웬 횡재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