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32
332회. 이름이야 같을 수도 있지
단 한 번의 만남이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진우생이 그랬다.
그는 방문 틈으로 엿본 이유화의 꽃 같은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전심전력으로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만약 이유화를 엿보기 전의 그였다면 혼례는 깨지고, 진씨 일족의 앞길도 막막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칸집이 진우생을 구했다고 볼 수 있다.
인연이란 그렇게 예측 불허다.
혼례식이 끝난 뒤 연적하는 이유화에게 은자 천 냥을 축하금으로 주었다.
자신에게 남은 돈의 거의 전부였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당분간 무당파에서 지낼 거니까, 집에 일 생기면 그리로 연락해.”
“네.”
이유화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단지 혈육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걸 받았다.
조용히 외숙의 집을 빠져나가는 연적하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이제 매제(妹弟)가 된 진우생이었다.
“형님, 감사합니다.”
나이는 세 살이나 많았지만 진우생은 연적하를 ‘형님’이라 불렀다.
“감사는 무슨. 잘 살기나 해요.”
“예.”
“그리고…….”
연적하는 복잡한 눈으로 진우생을 보았다.
금의위 소기(小旗)라니 현장 법사의 일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할 게다.
연적하가 말을 하다 말고 머뭇거리자 진우생이 조심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유명교와 관계된 일에는 가급적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유명교라고 하셨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진우생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적하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소기라서 아직 원소절의 계획에 대해서 알지 못하나 보다.’
만약 그가 원소절의 계획에 대해 알았다면 쉽게 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우생과 헤어진 연적하는 바로 석장촌을 떠났다.
길을 가다가 객잔이 보이면 객잔에서 묵고, 없으면 노숙을 했다.
한여름인지라 좁은 객잔보다 노숙이 더 좋은 날도 있었다.
무당산까지의 경비를 제외한 모든 돈을 이유화에게 준 터라 짐은 늘어나지 않았다.
***
하남성.
영하(颖河) 강변의 사장촌.
해거름 무렵 한 청년이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연적하다.
허리춤에 조롱박 하나와 청강 장검을 매단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낭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 초입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힐끔거렸다.
“뭘 이렇게 쳐다본대? 민망하게.”
중얼거리던 그는 가까운 객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식당에 가득한 손님들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본래 음식이 맛있는 집일수록 손님도 많은 법이니까.
객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음식 냄새와 온기가 훅 하고 밀려왔다.
역시나 객점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야아, 장사 잘되네.”
그래도 객점 주인이라고 손님들 많은 것부터 눈에 들어왔다.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점소이가 다가왔다.
상도 또래의 점소이를 보니 남연객점이 더 생각났다.
“어서 오세요. 혼자세요?”
“어.”
“빈자리가 없는데 합석도 괜찮죠?”
“그래.”
연적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점소이는 씩씩하게 앞장섰다.
이 남 일 녀가 앉은 자리 앞에서 점소이가 양해를 구했다.
“저어, 혼자서 온 손님이 계신데 합석을 시켜 드려도 되나요?”
이 남 일 녀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합석은 기본이었다.
연적하는 선객들에게 눈인사를 한 뒤에 빈자리에 걸터앉았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점소이의 물음에 연적하는 탁자를 힐끔 살폈다.
남의 자리에 합석을 한 터라 시킬 수 있는 요리가 많지 않았다.
옆사람이 먹고 있는 양고기가 올라간 국수를 보니 괜찮을 것도 같다.
“나는 양육회면(羊肉烩面) 하나.”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점소이가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갔다.
연적하는 찻물을 마시며 탁자 위의 요리를 감상했다.
딱히 눈 둘 데가 없어 그런 것뿐인데 그게 불쌍해 보였나 보다.
이십 대 초반의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음식이 남을 것 같으니 먹어도 돼요.”
연적하가 망설이자 그녀 옆에 있던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 거들었다.
“소형제. 회면이 나오기 전에 맛이라도 봐. 다 먹지는 말고. 하하.”
연적하가 어려 보이자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은 슬쩍 말을 놓았다.
연적하는 더 사양하지 않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 있으려니 자꾸 침이 고여서 꼴깍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감사합니다. 맛만 볼게요.”
연적하는 접시에서 만두[灌汤包] 하나를 집었다.
젓가락으로 얇은 만두피를 찢는 순간 안에서 국물이 홍수처럼 흘러나왔다.
그걸 본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소형제가 뭘 좀 아네. 그거 하나면 면과 고기와 탕을 먹는 것과 같다고.”
“아, 예.”
연적하는 건성으로 답한 뒤 숨 쉴 틈도 없이 만두를 흡입 했다.
하나를 먹으니 뭔가 허전하다.
연이어 우육탕(牛肉汤)과 호랄탕(胡辣)까지 한 국자씩 퍼서 후루룩 먹었다.
그리고 미분증육(米粉基肉, 돼지고기에 쌀가루를 입혀 찐 음식)을 접시에 쓸어 담았다.
그쯤 되자 이십 대 중반의 남자가 넌지시 한마디 했다.
“소형제,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할라.”
사실 누가 봐도 체할 정도의 속도는 아니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정도껏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눈치가 보인 연적하는 살짝 데친 청채(靑葉) 따위로 손을 뻗었다.
탁자에 평화가 찾아오자 이십 대 초반의 여자가 슬쩍 운을 뗐다.
“그런데 소형제는 어디에서 왔어요?”
“정주요.”
“아, 정주. 거기 요즘 시끄럽지 않나요? 천지맹이 거기에 있다고 하던데.”
연적하는 마치 한 마리 순한 소처럼 청채를 입에 물고 눈을 껌뻑였다.
젊은 여자가 천지맹과 유명교의 전쟁을 ‘시끄러운 것’으로 표현해서다.
“천지맹과 유명교의 전쟁은 끝났어요.”
“정말요? 그럼 강호가 또 한차례 뒤집어지겠네요.”
전쟁이 끝났다는데 여자는 ‘그럼 강호가 뒤집어지겠다’고 했다.
연적하는 여자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쟁이 끝났는데 왜 강호가 뒤집혀요?”
“이제부터 다시 크고 유명한 방파들이 강호 분쟁에 뛰어들 테니까요. 그들이 유명교를 상대하는 동안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아.”
그런 의미였구나!
연적하가 탄성을 흘리자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 불쑥 끼어들었다.
“소형제, 작은 물고기들 싸움에 고래가 끼어들면 어떻게 되겠어? 진짜 큰 풍파가 일어나는 거야.”
연적하는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강호의 상식과 다른 이야기에 조금 당황했다.
정파의 유명한 문파들이 풍파를 일으킨다는 말을 들으니 뭔가 야릇하다.
‘이름 없는 작은 방파들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구나.’
하기야 그들의 입장에서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는 감히 상대하기 어려운 고래이리라.
여자가 눈을 끔뻑이고 있는 연적하를 빤히 보았다.
“소형제는 무슨 일로 여길 온 거예요?”
“저는 그냥 지나가던 길이에요.”
‘지나가던 길’이라는 그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건 낭인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인 까닭이다.
낭인들은 뚜렷한 목적지 없이 다닌다. 그러다가 일거리가 생기면 일을 하곤 한다.
여자가 확인하듯 물었다.
“낭인?”
“비슷해요.”
연적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문적인 낭인은 아니지만 몇 번이고 낭인 일을 했으니 아니라고 하기도 뭐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본래 남연객점의 공동 주인인데, 무당산에 술법을 배우러 가는 길이다’라고 하느니 낭인이라는 게 나았다.
낭인이라는 말에 여자가 관심을 보였다.
“어디에서 무공을 배웠어요?”
“가전무공이에요.”
그러자 지금껏 묵묵히 먹기만 하던 삼십 대 장한이 연적하를 힐끔 쳐다보았다.
“검을 쓰는 집안이라니 대단하구먼. 어디인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낙양의 와룡장요.”
“흐음! 어디선가 들어 본 듯도 한데.”
삼십 대 장한, 장위안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십 대 중반의 일수한과 백옥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적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낙양에서 제법 유명했었는데. 모르시는구나.”
장위안이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 모두 남직례성에서 온 사람들이라 하남성의 일은 잘 모른다네.”
“아, 그러시구나. 그럼 혹시 남궁세가는 아세요?”
“알다마다. 남직례성에서 남궁세가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헤헤.”
연적하는 남궁세가를 안다는 말에 괜히 실실 웃었다.
“소형제는 남궁세가를 아는가?”
“알죠. 강호의 사대세가 중에 하나잖아요.”
장위안이 피식 웃으며 다시 음식으로 관심을 돌렸다.
때마침 점소이가 양육회면을 들고 왔다.
연적하가 시킨 음식이 나오자 네 사람 사이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연적하가 양육회면을 절반쯤 먹고 한숨 돌릴 때다.
일수한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소형제, 이것도 인연이니 통성명이나 할까? 나는 둘째인 일수한, 이쪽은 막내인 백옥조, 그리고 저분은 대형인 장위안이야. 남직례성에서는 청주삼협이라고 불리고 있지.”
“저는 연적하라고 합니다.”
연적하라는 말에 백옥조가 ‘풉’하고 음식을 뿜었다.
“에이, 더럽게. 막내야, 왜 웃어?”
“아니, 요즘 가는 곳마다 연적하라는 이름이 너무 많아서요.”
백옥조의 말에 일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남직례성에서 하남성에 오는 동안 연적하를 다섯 명쯤 만난 것 같다.
“이름이야 같을 수도 있지. 소형제, 혹시 그 전에 쓰던 이름이 있어?”
“두비[邑比, 멍청이]?”
연적하가 이 남 일 녀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실제로 여섯 살까지 계모와 배다른 형제들은 그를 ‘두비’라 불렀다.
순박해 보이는 얼굴로 ‘두비’라고 하자 청주삼협은 크게 웃었다.
이름이 ‘두비’라니, 연적하라는 이름을 사칭할 만하지 않은가!
백옥조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소형제는 그냥 ‘연적하’라고 하는 게 낫겠어요. ‘두비’는 정말 아닌 것 같아요.”
“그래, 내가 봐도 ‘두비’는 아니다. ‘적하’가 백번 낫지. 소형제, 누가 그런 엉터리 이름을 지어 준 거야?”
“큰어머니가요.”
“큰어머니? 큰 숙모? 아니면 계모?”
“계모요.”
계모라는 말에 세 사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못된 여자네.”
“그러게 말이에요.”
측은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던 백옥조가 물었다.
“소형제, 혹시 지금 하고 있는 일 있어요?”
“지금은 없는데요?”
“잘됐다. 그럼 우리랑 같이 일해요! 큰 오라버니 그래도 되죠?”
백옥조가 대형인 장위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위안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더니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치지 않게 잘 보살펴 주어야 한다.”
장위안은 연적하가 비루해 보여서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연적하는 어차피 수중에 돈이 떨어져 가던 차인지라 거절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요?”
“건원표국의 소지웅 행수를 돕는 일이에요. 우리와 함께 사흘만 그를 지켜 주면 돼요.”
사흘이라면 별문제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남직례성에서 왔다는 청주삼협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초면인데 합석은 물론, 음식을 나눠 주고, 큰어머니 욕까지 하다니!
지금까지 큰어머니를 욕한 사람들 중에 나쁜 사람은 없었다.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