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59
359회. 언령과 언법
유시 말(오후 7시)경.
오룡궁으로 올라가는 산길 초입에 젊은 남녀가 나타났다.
연적하와 십전무후 남궁연이다.
‘오룡궁’이라고 적힌 이정표 앞에서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렸다.
남궁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백 의원은 괜찮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독에 해박한 의원을 찾아볼게.”
“당가의 독을 해독할 만한 의원이 있을까요?”
연적하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약사여래 백일운은 삼보절명 당운망이 인정한 약사였다. 그정도 실력의 의원이 있을지 모르겠다.
“있을 거야.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으니까. 내가 찾아볼게.”
남궁연의 말에 연적하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녀는 자신이 한 달 넘게 헤맨 남암궁에서 반나절 만에 백일운을 찾아냈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백일운만 한 의원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이 퉁퉁 부은 얼굴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으려면 말이다.
“부탁……드릴게요.”
연적하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지금까지 누구에게 부탁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어 혀가 말리는 느낌이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내가 중독되면 너도 그럴 거잖아.”
“그래도…….”
멋쩍은 얼굴로 남궁연을 보던 연적하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못난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서다.
그가 시선을 회피하자 남궁연이 그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에 묻어요, 누님. 흡!”
남궁연의 작은 입술이 연적하의 입을 막았다.
깜짝 놀란 연적하는 장승처럼 서서 눈만 끔뻑거렸다.
곧 멀어지려니 생각했는데 남궁연은 오히려 강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
계향초 냄새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향긋한 체향이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뒤늦게 용기를 낸 연적하가 살그머니 손을 뻗어 남궁연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움찔 놀란 남궁연이 입술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네가 어떤 모습을 하든 내 눈에는 똑같아. 그러니까 기운 내. 알았지?”
연적하가 뻘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경공술을 펼쳐 한순간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
오룡궁.
남채고.
연적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경전을 펼쳐 놓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에게 천상동이 다가갔다.
“왜 그러고 있느냐? 문답식이 지났다고 벌써 농땡이냐?”
“누가 농땡이래요? 괜히 친한 척하지 말고 저리 가요.”
연적하가 손사래를 쳤지만 천상동은 아예 연적하의 옆에 걸터앉았다.
“오늘 낮에 본 소저가 아른거려서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오는 모양이지?”
“…….”
넘겨짚긴 했지만 맞는 말인지라 연적하는 일순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천상동이 킬킬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그 소저가 누군지 안다면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게다.”
“누군지 알아요?”
“검왕의 금지옥엽이자 강호에서 십전무후라 불리는 남궁연 소저다. 너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넘볼 여자가 아니라는 말씀이지.”
“알았으니까 저리 가요. 친하지도 않은데 왜 자꾸 달라붙어요?”
“너 얼굴의 부스럼 때문에 남암궁을 기웃거린다면서?”
“누가 그래요?”
“누가 그러긴 소문이 파다하게 났구먼.”
“이런 젠장!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댁이 무슨 상관인데 그래요?”
“내가 남암궁에 잘 아는 약사가 있는데 그의 약이라도 먹어 볼 테냐?”
“물론 공짜는 아니겠죠?”
“당연하지. 세상에 어느 약사가 공짜로 약을 지어 준다더냐?”
연적하는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남암궁에 들어갈 정도의 약사면 보통은 넘는다.
‘백일운은 독이 아니라고 했는데, 좋은 약을 먹으면 상태가 좀 호전되려나?’
연적하가 갈등하자 천상동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생각해 보거라. 상대는 남암궁의 약사다. 그들에게서 약 얻기가 쉬운 줄 아느냐? 천만의 말씀. 약제당의 당주도 남암궁의 약사라면 한 수 접어준다.”
결국 연적하는 그의 꼬임에 넘어갔다.
“그래서 얼만데요?”
“너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십 냥만 받으마.”
“뭐라고요? 이십 냥이라고요?”
연적하의 목소리가 커졌다.
낭인 몸값으로 오십 문 받던 걸 생각하면 은자 이십 냥은 거금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모르느냐? 비싼 약일수록 비싼 값을 하는 법이다. 돈이 없다면 모를까? 있으면서 왜 그렇게 벌벌 떠느냐?”
“생각 좀 해 볼게요.”
“그래, 그 부스럼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게다.”
그 말을 끝으로 천상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만황주 곁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연적하는 손으로 우둘투둘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자신의 얼굴이지만 정말 싫었다.
‘누님은 이 얼굴에 어떻게 입을 맞췄지?’
남궁연의 부드러운 입술을 떠올리자 가슴이 요동쳐서 견딜 수가 없다.
연적하는 경전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선선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쳐 왔다.
“이젠 여름도 다 갔구나.”
문득 금의위 남진무사 동유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가오는 원소절(元宵節, 음력 1월 15일)에 건국사(建國寺)에서 큰 제사가 있소. 그 제사를 주관하는 자가 유명교의 현장 법사외다.
금의위 소기(小旗)인 진우생(이유화의 남편)은 그 일에 투입될 게다.
동유수가 굳이 그 일을 이유화의 혼인식에 와서 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북진에서 실패할 정도의 일이니 남진에게도 어려울 것이다.
“젠장, 이 얼굴로 나설 수도 없고. 미치겠네.”
남은 시간이라고 해 봐야 석 달.
마음이 급해지니 천상동의 이야기가 자꾸만 귓가를 맴돈다.
***
연적하는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오룡궁으로 달려가니 은은한 촛불 아래에 청불노가 앉아 있었다.
“오늘은 늦었구나?”
“예,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준비를 늦게 했습니다.”
“십전무후를 만났으니 들뜰 만도 하지.”
청불노의 말에 연적하는 멋쩍게 웃었다.
“네 얼굴을 보고 많이 놀라더냐?”
“놀라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점심도 못 먹고 남암궁으로 끌려갔다니까요.”
“무당산에 대해 십전무후보다 잘 아는 사람도 없으니 그랬을 테지. 사람을 찾는 일에 진척은 있었고?”
“누님 덕분에 찾기는 찾았어요.”
“오호! 그래서? 백일운이 뭐라고 하더냐?”
“중독된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잘된 일인데 표정이 왜 그모양이냐?”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연적하는 백일운의 상태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불 꺼진 화로에 부채질을 하질 않나.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더라고요.”
“쯧쯧! 수도로도 나이는 막지 못했구나.”
“그러니 명현 현상이라는 말도 영 믿을 수가 없어서요.”
“그가 명현 현상이라고 했느냐?”
“예.”
그러자 청불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음! 그렇다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예? 왜요?”
“나이를 먹으면 본래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법이니라. 그 말은 간혹 제정신일 때가 있다는 소리지. 그는 의원이다. 너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병증부터 확인했을 게다. 그러니 완강하게 아니라고 한 게지.”
“그럼 제 얼굴은 왜 점점 나빠지는데요?”
“백일운의 말대로 명현 현상이든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게다.”
“독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제가 이렇게 됐다는 건가요?”
“너도 한번 차분히 생각해 보거라. 낙월독정에 당한 것 말고, 특이한 일을. 이상한 걸 먹었거나, 혹은 이상한 경험을 했다거나…….”
곰곰 생각하던 연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쩝,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걸 집어 먹은 기억이 없는데…….”
“허면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딱히, 아, 유명교 교주를 만난 적이 있어요.”
유명교 교주라는 말에 청불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유명교의 술법은 술사들 사이에 유명했다.
특히나 오룡궁에서는 얼마 전 관부에 몇 가지 부적을 공급한 적도 있다.
그것도 교주의 언령을 깨는 부적을.
언령에 생각이 미치자 청불노는 언법(言法)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검결지로 연적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갈(喝)! 공야자와 청불노의 이름으로 명한다! 사특한 기운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휘이이이-.
청불노의 손끝에서 일어난 무형의 기운이 연적하를 쓸고 지나갔다.
강력한 파장에 연적하의 상체가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놀랍게도 연적하의 얼굴에 변화가 찾아왔다.
줄줄 흐르던 진물이 멈추고, 퉁퉁 부어 있던 얼굴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얼굴은 다시 처음처럼 부풀어 올랐다.
순간 청불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아! 이런 언령이라니!”
연적하도 한순간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감지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령이라고?
“스승님, 제가 언령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 정확히는 언령의 저주에 당한 것 같구나. 그런데 이상하구나. 유명교 교주의 저주라 해도 사조님과 나의 언법이라면 깨뜨릴 수 있는데……”
잠시 생각하던 청불노가 연적하를 보았다.
“혹시 너 유명교 교주에게 뭔가를 약조하고 지키지 않은 것이 있느냐?”
“예, 백두마군 하나를 잡아다 주기로 했어요.”
“저런! 만약 유명교 교주가 일방적으로 건 언령이라면 조금 전에 깨졌을 게다. 하지만 약속을 통해 네가 언령의 주체가 되어 풀 수가 없구나.”
“헉! 그러니까, 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요?”
“그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으로 언령의 저주를 받았다고밖에……. 저주란 본디 나쁜 것을 더욱 나쁘게 만들지. 너의 경우 명현 현상이 질병처럼 들러붙은 모양이다. 중독되지 않았다는 백일운의 진단이 맞았구나.”
“그럼, 약속을 지키면 풀리는 건가요?”
“언령에는 거짓이 없으니 그렇게 될 게다.”
“허! 말 한마디가 그렇게 무섭군요.”
“네가 배울 언법도 유명교주의 언령과 비슷하다. 거짓을 말할수록 힘이 약해져 종내는 사라지고 말지. 말에 책임을 지는 자일수록 언령의 힘이 무서운 법이다. 그러니 책임질 말만 하는 게 좋을 게다. 너의 언법을 위해서라도.”
“예…….”
연적하는 언령의 무서움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약속 하나를 뒤로 미룬 것 때문에 몸이 이 지경으로 망가지다니?
***
산서성.
교구현.
풍지산 선녀암.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유명교주 팔황신모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심령에 외부에서 강한 충격이 전해진 탓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팔황신모는 마당으로 나가 밤하늘을 살폈다.
하지만 천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흐음. 누굴까?”
자신의 심령에 이렇게 강한 타격을 준 술사가 있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의 경지에 근접한 법력을 가졌다니,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도 든다.
그도 불로불사를 꿈꾸고 있을까?
가만히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던 팔황신모의 눈에서 안광이 번득였다.
‘내일이로군.’
‘왕들의 하늘’에서 청류신이 물고 올 소식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