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9
39회. 오라버니가 하고 싶었던 일은 뭐예요.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던 연적하가 말했다.
“아, 그거? 구룡번신이라는 건데. 간단히 말하자면 내 몸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어. 기경팔맥과 신맥에 있는 그 용들을 하나씩 깨워 주는 거야. 아홉 마리를 다 깨우면 풍운조화가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하소백이 동그랗게 눈을 치켜떴다.
“어머! 풍운조화요?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그런데 신맥은 뭐예요?”
기경팔맥은 알지만 신맥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연적하가 검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리켰다.
“어, 머릿속에 있다는데 말해 줘도 모를 거야. 육감 같은 걸 관장하는 거야.”
“아, 네.”
하소백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때의 연적하만 생각해도 어마무시한데, 풍운조화라니?
상상이 되질 않는다. 흑의를 입은 무인들이 찍소리 못 하고 쓰러진 것도 이해가 간다.
두 사람의 대화 중에도 비무는 치열하게 전개됐다.
비무는 광도인군이 휘두른 도에 상대가 나뒹구는 것으로 끝났다.
점심 무렵.
녹림대회라고 하지만 식사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오봉십걸들은 준비해 두었던 육포와 건량으로 대충 허기를 채웠다.
식사를 마친 오봉십걸들이 그늘을 찾아가기 직전에 풍연초가 말했다.
“내가 알아봤는데, 비무는 사흘 후에야 끝난다고 하더라. 앞으로 사흘 간은 꼼짝없이 만사평에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나한테 자꾸 언제 끝나냐 묻지 말고 여유 있게 구경들 해라.”
“예.”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오봉십걸들은 두세 명씩 무리지어 흩어졌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고 있는 연적하에게 하소백이 따라붙었다.
“오라버니, 어디 가세요?”
“어, 그냥 한 바퀴 돌아보려고.”
“그럼 저도 같이 가요. 혼자서는 무서워서 못 돌아다니겠더라고요.”
남자들에게 당할 뻔한 경험이 있는 하소백에게 만사평은 꽤나 부담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든지.”
연적하 역시 그녀의 과거를 알기에 거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만사평을 돌아다녔다.
절반쯤 돌았을까?
하소백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여자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러게.”
연적하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 바퀴 정도 도는 동안 백여 명의 여자를 보았다. 나머지도 사정이 비슷할 테니 대략 이백여 명쯤 될 것 같다. 천 명 중에 이백여 명이 여자라니! 그러고 보면 오봉산채의 여자가 적은 편이다.
“어머, 저 사람들 적사채 같은데요? 맞죠?”
하소백의 손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연적하가 슬쩍 보니 정말 적사채의 도적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하소백과 연적하만 적사채를 발견한 건 아니다.
뒤늦게 연적하를 본 적사채 도적들이 굳어진 얼굴로 소곤거렸다.
잠시 후 적사채 채주 통천혈부 혁련후가 연적하를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갔다.
“이런이런, 구면이신데 표사가 아니었나 봅니다. 어느 곳의 형제십니까?”
하소백이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우리는 하남성 오봉산의 오봉산채예요. 표사들과는 방향이 같아서 잠깐 동행한 것뿐이랍니다.”
“아하! 이제 보니 오봉산채 분들이셨구려. 산채들 간에는 지켜야 할 규율이 있는데……. 그날은 왜 우리 적사채의 산행에 훼방을 놓으신 건지?”
하소백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연적하를 힐끔 보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연적하는 모르는 일인 양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속이 뒤집어진 혁련후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다.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 시비를 걸고 욕을 하는데 그냥 있을 수 있어요?”
마침내 연적하의 입이 열렸다.
혁련후는 일순 할 말이 없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궁금하면 또 나한테 시비를 걸어 봐요. 내가 패나 안 패나. 그때는 그래도 같은 녹림이라고 많이 봐준 건데. 오늘은 안 봐주려고.”
연적하가 할 말 다했다는 얼굴로 빤히 혁련후를 올려다보았다.
갈수록 짧아지는 말투에 혁련후는 ‘울컥’ 했지만 애써 감정을 다스렸다. 솔직히 저 어린놈의 무공을 당해 낼 자신이 없어서다.
거칠게 숨을 내뿜던 혁련후는 말없이 홱 돌아서 가 버렸다.
말싸움이 싱겁게 끝나자 멀리서 구경하던 산적들도 관심을 끊었다.
그들 중 몇은 혁련후를 꼼짝 못 하게 만든 나이 어린 도적을 두고 수군거렸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연적하를 알아보는 도적이 없으니 진도가 막힌 것이다.
“오라버니, 괜찮을까요?”
하소백은 이글거리던 혁련후의 마지막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경험상 저런 식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꼭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탁 형님이 전에 이런 말을 했었어. 이런 거 저런 거 다 신경 쓰면 도둑질 못 해 먹고 산다고.”
“와아. 뭔가 심오한데요?”
“신경 쓸 것 없어. 칼 밥 먹는 사람이 싸움을 두려워하면 되나?”
“아아! 그렇구나. 그런데 오라버니는 이 일이 마음에 들어서 하는 거예요?”
“이 일?”
하소백이 얼굴을 붉히며 설명했다.
“산채에서 하는 일요.”
“아, 도적질?”
직설적인 연적하의 말에 하소백은 피식 웃었다.
“네.”
“아니, 그냥 먹고살려고 하는 건데?”
“그럼 원래 오라버니가 하고 싶었던 일은 뭐예요?”
“글쎄, 뭐였을까?”
연적하가 아련한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창고에 갇히기 전 배다른 형제들과 나뭇가지로 싸움 놀이를 할 때 자신의 역할은 산적이었다. 그때 강호의 협객이던 연무백과 연승백, 연설주에게 무던히도 맞았다.
‘나도 협객이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형제들은 단 한 번도 그걸 시킨 적이 없다.
창고에 갇혀 지내던 때는 그냥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꿈이니 희망이니 따위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냥 넓은 마당이나, 언사의 장터가 그리웠다.
돌이켜 보니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소백이 대답을 재촉했다.
“없었어요?”
“어, 그러는 너는 뭔데?”
“저는 작은 찻집을 여는 거였어요.”
“그런 거로 먹고살 수 있어?”
“어머, 오라버니 다루(茶樓)가 얼마나 돈이 되는지 모르시는구나. 한 번도 안 가 보셨어요?”
“어. 차는 음식점에 가니까 공짜로 주던데. 그걸 돈 내고 사 먹는단 말야?”
“객점에서 주는 건 그냥 싸구려고요. 고급 차는 맛도 좋고 비싸다고요.”
“그렇구나.”
연적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소백이 작은 주먹을 꼭 말아 쥐며 다짐하듯 말했다.
“저는 나중에 돈을 모으면 꼭 다루를 열 거예요. 오라버니는 특별히 공짜로 마시게 해 드릴게요.”
“고맙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오봉십걸들의 자리다. 이철산과 나란히 앉아 있던 한채연이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든다.
연적하는 처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둘째 날.
녹림대회의 비무에서 이변이 생겼다. 대별산채의 떠오르는 신진고수 추혼혈도 이무진이 십이마군인 적안축군을 꺾은 것이다.
상석에 앉아 구경하던 파천마군 석무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 자리쯤은 내줘도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적안축군의 패배는 시작에 불과했다.
저녁까지 계속된 비무에서 혈천진군, 만상신군, 소수유랑, 사영술군까지 탈락해 모두 다섯 명이나 고배를 마시고 만 것이다.
체면이 땅에 떨어진 석무해는 누가 봐도 성난 얼굴로 하루를 마감했다.
***
셋째 날.
십이마군 중에 둘이 또 떨어져 다섯만 남았다.
총 일곱 명의 십이마군이 떨어지고 대별산채의 추혼혈도, 삼도산채의 냉면검귀, 광풍채의 귀영도살, 동호 수채의 탈명혈장, 장강수채의 장강 일괴가 살아남았다.
십이마군 다섯에 다른 산채의 도적 다섯이다.
만사평의 도적들이 최후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할 때다.
갑자기 석무해가 비무의 종료를 선언했다.
도적들은 ‘다섯 명의 마군이 떨어질까 봐 끝낸 거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감히 석무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천하십대고수를 꼽을 때 항상 석무해의 이름이 포함되는 까닭이다.
석무해는 끝까지 남은 다섯 명의 십이마군을 호법, 그리고 나머지 다섯을 순찰에 임명했다. 그렇게 해서 녹림은 하나의 거대한 단체로 묶였다.
녹림대회의 마지막 날 밤에는 만사평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신진고수 다섯을 배출한 산채와 수채는 잔치 분위기였다.
채주들은 벌써부터 안면을 익히려고 다섯 곳의 산채와 수채를 돌아다녔다.
십이마군은 석무해의 직계 제자들이라 대하기 어려웠지만 다섯 명의 순찰들은 다르다. 채주들은 순찰들의 뒷배가 약하니 조금만 관심을 쏟아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떠들썩한 바깥과 달리 석무해의 천막은 고요하기만 했다.
석무해와 십이마군이 빙 둘러앉았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가장 먼저 떨어진 적안축군이 풀죽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총채주님, 면목 없습니다. 추혼혈도라는 놈의 공력이 그렇게 높을 줄 몰랐습니다. 그 정도 고수라면 몰랐을 리가 없는데……. 이해가 안 갑니다.”
떨어진 다른 십이마군들의 변명도 대동소이했다.
다섯 명의 고수는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그 정도 고수가 지금까지 녹림에서 이름을 날리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이미 십여 년 전에 녹림에서 최고수 소리를 듣던 십이마군의 입장에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십 년 전에 최고수였고, 그 뒤로 암천 수라진경이라는 희대의 무공까지 익혔는데 패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음풍묘군이 자신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봉산채의 연적하라는 놈도 갑자기 툭 튀어나왔지만, 그놈의 과거는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러려니 하겠는데……. 추혼혈도, 냉면검귀, 귀영도살, 탈명혈장, 장강일괴는 정말 그저 그런 놈들 아니었습니까? 고작해야 성급 고수들이었는데 이번에 보니 엄청나더군요.”
다른 십이마군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곰곰이 생각하던 석무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희들의 말이 맞다. 그놈들이 너희를 이기려면 지난 십여 년 동안 암천수라진경보다 더 뛰어난 무공을 익혔어야 한다. 그러나 강호에 그런 무공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럼 그놈들의 그 뛰어난 내공은 대체 어디서 왔다는 건지.”
역시 패한 혈천진군이 조심스럽게 한마디 거들었다.
“패한 처지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그들의 무공초식에서 뛰어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저희들처럼 그들도 특별한 내공을 익힌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냉면검귀의 검과 마주쳤을 때 단전이 찌르르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추혼혈도의 도법은 그저 그랬는데, 도기가 끔찍할 정도로 파괴적이었습니다.”
“저도…….”
패배한 십이마군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있던 석무해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아! 암천수라진경보다 뛰어난 무경은 소림사의 달마진경이나 무당파의 진무경 정도밖에 없다. 그런 무경이 다섯 곳에서 출현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번 일은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야. 너희가 은밀하게 다섯 명의 뒷조사를 좀 해 줘야겠다.”
음풍묘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면 오봉산채의 연적하는 어찌할까요?”
“연적하와 다섯 순찰들의 무공에 유사점이 있더냐?”
잠시 생각하던 음풍묘군이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에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는 내공만큼이나 지법도 뛰어났습니다. 현묘한 움직임에 저의 음풍백골조가 완전히 봉쇄되었으니까요.”
“흠!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적사채에서 찾아와 오봉십걸들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고 갔다. 아무래도 만나 봐야 할 것 같구나. 네가 그를 불러오도록 해라.”
“예.”
그 뒤로 석무해는 십이마군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렸다.
잠시 후 십이 미군들이 석무해의 천막을 떠났다.
***
자정 무렵, 연적하는 음풍묘군과 함께 석무해의 천막을 찾았다.
“너는 나가 있거라.”
석무해의 지시에 음풍묘군은 읍을 해 보인 후 밖으로 나갔다.
천막에 석무해와 연적하만 남았다.
녹림의 총채주 석무해와 오봉산의 도적 연적하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