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4
44회. 귤과 탱자
물론 구밀복검이라는 별호답게 심양각은 입에 발린 말을 잘한다. 그러나 그것도 고수를 상대로 그렇다는 거다. 하수에게는 염라대왕이 따로 없었다.
그런 심양각이 저 남자의 지시를 따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정말 방통인가?’
삼절검 이상문은 반신반의한 눈으로 방통이라 불리는 노인을 살폈다.
한순간 이상문의 눈이 번득였다.
방통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붉은 도갑을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 년 전.
의천검객 고천과 복양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심양각이 기루에서 살인하는 걸 목격했다. 그날 심양각은 단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한 무인의 목을 날렸다.
전광석화 같은 그의 칼질에 말리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뒤늦게 잡으려 했지만 그는 한번 칼을 섞은 뒤 창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창밖으로 반쯤 빠져나간 그를 찌르자, 그는 저 붉은 도집을 휘둘러 막았다.
그때 생긴 자국이……, 있었다.
붉은 도갑에 남겨진 자국을 보자 그날의 일이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른 풍운대 동료들과 달리 자신은 그와 한차례 칼을 섞었기에 확신할 수 있다. 저 늙은이는 방통이 아니라 구밀복검 심양각이다!
이상문은 검 손잡이를 잡으며 소리쳤다.
“구밀복검 심양각! 오늘은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일촉즉발의 순간.
심양각은 숨을 멈추고 이상문만 바라보았다.
풍운대원들이 자연스럽게 반점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그런 소란 중에도 대주인 의천검객 고척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고척은 칠파이문으로 불리는 의천문의 제자다. 의천문은 의천검존이 세운 문파로 제자들 대부분이 관이나 군에 진출했다. 특이하게 무림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고척이 그중 하나였다.
의천검존은 소년 시절 소림사에 출가했다가 훗날 전진교로 개종한 기인이다. 불가와 도가의 무공에 통달한 그는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 냈다.
현천팔극신공과 팔극신공이 그것이다.
고척은 지금 암암리에 팔극신공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오늘은 달아 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소리와 함께 밀려온 기이한 암경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풍운대는 정의맹의 무력 조직으로 대주의 명령이 절대적이다. 물론 공격당할 때는 자유롭게 반격하지만, 선공만큼은 대주의 명이 있어야 한다.
이상문은 최후의 선을 넘기 전에 고척의 허가를 기다렸다.
그건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다.
반점의 입구를 틀어막고 교묘하게 심양각을 둘러싼 무사들은 고척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압력에 당장이라도 짜부라질 것 같은데 어떻게 입을 연단 말인가!
지금 그의 시선은 심양각의 일행으으로 보이는 무인들을 차례로 훑고 있었다. 자신에게 암경을 쏟아 내는 사람이 누군지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암경이란 다른 말로 유형화된 기운이다.
고수라고 누구나 다 암경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암경은 그가 의형살인, 즉 ‘뜻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림십대고수라 불리는 사람들이라면 혹 모를까?
어지간한 고수들은 꿈에서나 가능한 것이 의형살인이다.
고척은 내력으로 버티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지, 단순한 경고인지 알고 싶어서다.
한편 연적하는 나름 만족한 얼굴이다.
녹림대회 때 파천마군 석무해에게 당한 걸 한번 써먹어 봤는데 효과가 괜찮은 것 같다.
이것 역시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대를 압박하는 생각을 강하게 했더니 마치 뒤통수라도 맞은 것처럼 바로 반응한다.
‘오! 이거 쓸 만한데?’
싸우기 귀찮거나 누군가를 몰래 괴롭히고 싶을 때 써먹으면 좋을 것 같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연적하와 고척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고척은 본능적으로 저 소년이 자신에게 암경을 발산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믿기 어렵지만 본래 어린아이와 여자와 노인을 조심하라고 하지 않던가!
상대를 확인한 고척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체불명의 소년이 자신에게 살의를 품은 것 같지는 않아서다.
그렇다면 이건 경고다.
고척은 애절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만 멈춰 주시오! 제발!’
간절한 바람이 통했나 보다. 태산 같은 암경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푸하! 살았다.’
한숨 돌리고 있는 고척에게 연적하가 말했다.
“아저씨,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저 사람은 방통이에요. 알았죠?”
뜬금없는 연적하의 말에 이상문이 버럭 소리 질렀다.
“오해는 무슨 오해! 저 늙은이는 하남성의 마두 심양각이다! 오 년 전에 내가 저 마두를…….”
이상문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고척이 묵직한 중저음으로 그를 만류한 것이다.
“이상문, 그만하고 돌아와라. 저 늙, 험, 노인은 심양각이 아니다.”
“대주님? 맞다니까요! 도갑에 자국이 있습니다. 오 년 전에 제가 검으로 찔렀을 때 저 마두가…….”
“어허! 그만하고 오래도. 너희도 모두 자리로 돌아가라.”
고척의 명령에 입구와 주변을 지키고 있던 대원들이 하나 둘 움직였다.
마지못해 자리로 돌아온 이상문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대주님! 저놈은 정말 심양각입니다. 믿어 주십쇼. 도갑에 나 있는 칼자국까지 확인했습니다.”
“귤을 회수 이남에 심으면 귤이 되지만 회수 이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
“예?”
이상문은 고척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마두를 때려잡는 자리에서 갑자기 왜 귤과 탱자가 나온단 말인가?
“귤과 탱자는 비슷해 보이지만 맛과 향이 완전히 다르다. 심양각과 방통은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거론하지 마라.”
“…….”
이상문은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건지, 아니면 심양각과 방통은 같은 사람이라는 건지 헷갈렸다.
고척이 이상문의 탁자 앞에 찻물을 흘려 글자를 썼다.
닥쳐[閉嘴].
그제야 이상문은 고척이 다른 이유로 모른 척한다는 걸 알았다.
이상문도 눈치가 영 없는 사람은 아닌지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봉십걸들이 먼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고척은 열한 명의 남녀가 반점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쳐다봤다가 시비라도 일어나게 될까 봐 꺼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고척이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들은 갔나?”
“예.”
그제야 고척의 입에서 ‘파하’ 하고 격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갔군. 갔어. 다행이야. 비룡문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기이한 일이로군. 비룡문도들은 사파의 인물로 보이지 않았는데.”
이상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맑고 담백했다.
“심양각이 과거를 숨기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흠!”
고척은 심양각과 함께 다니는 비룡문도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의 고수가 심양각에게 끌려다닐 리도 만무하고. 그들은 대체 어떤 관계일까?
“그런데 대주님, 왜 심양각을 놓아 준 겁니까?”
“그들 중에 하나가 의형살인의 수법으로 나를 압박했다.”
의형살인이라는 말에 이상문은 눈을 부릅떴다.
그 역시 무림인이라 그 경지가 뭘 의미하는지 알았던 것이다.
“헐! 비룡문에 그런 고수가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요.”
“자네는 비룡문이라는 문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 그 정도 고수가 있는데 나도 처음 듣는 문파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쯧.”
풍운대는 천도문과 승천문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급파된 정의맹 무력 부대다. 정의맹의 입장에서는 저런 뛰어난 문파의 출현이 은근 부담된다. 정의맹의 입김이 전혀 닿지 않는 문파니 말이다.
“저런 문파와는 절대로 얽히고 싶지 않아. 얽혀서도 안 되고.”
“진즉에 알았으면 저도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
이상문도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의형살인의 고수 앞에서 심양각 따위를 잡겠다고 설쳐 댔다니 소름이 돋는다.
***
합비.
화용독심 남궁연이 범인으로 천도문의 패산도 황염동을 지목했을 때 황염동은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정당한 비무 중에 죽었다’고 했다.
승천문은 발칵 뒤집어졌다.
같은 정파지만 천도문과 승천문은 암암리에 경쟁하는 관계였다. 그러던 차에 벌어진 일이라 대화로 수습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천도문에서는 부랴부랴 두 사람의 결투 중에 일어난 일로 규정하고 무마하려 했다. 사실 객관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승천문에서 피해자 가족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천도문에서 결투로 몰아가니 피해자 보상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하지만 결투 중에 일어난 일로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는 일은 없다. 만약 그랬다면 무림인들이 눈만 마주쳐도 칼부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도문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거절하자, 승천문에서는 문하생들을 불러 모았다. 곧이어 승천문에서 천도문으로 쳐들어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즈음 정의맹 풍운대가 합비에 도착했다.
다음 날, 천도문과 승천문의 긴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가라앉았다.
풍운대의 중재로 천도문은 삼절검 등초의 가족에게 은자 백 냥을 지불했다.
그렇게 간단히 끝날 사안이 아니었지만 의외로 천도문은 고개를 숙였다.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비룡문이 승천문을 돕는다’는 말 때문이다.
실체는 모호하지만 비룡문의 존재감은 컸다. 표사들이야 허풍이 심하니 무시할 수 있지만, 풍운대의 이야기까지 귓등으로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합비를 뒤흔들던 천도문과 승천문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났다.
중재는 성공적으로 했지만, ‘천도문의 보상금 지불’은 정의맹 내부에서 오래도록 회자됐다. 성공적인 중재와 달리 내부 평가는 좋지 않았다. ‘결투의 상대에게 보상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이유에서다. 절대 강자인 칠파이문 입장에서 패자에 대한 보상은 꽤나 불편한 결말이었으니까.
***
하남성.
주구.
열한 명의 남녀가 초겨울의 바람을 맞으며 관도를 터벅터벅 걷고 있다. 오봉십걸들이다. 하남성에 들어온 뒤로는 왠지 표정이 다들 시들하다. 여행이 슬슬 끝나 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런 모양이다.
관도에 박힌 이정표를 보며 여섯째인 장소봉이 중얼거렸다.
“어이쿠! 벌써 주구가 코앞이네. 이제 열흘이면 오봉산에 도착하겠는데.”
“벌써요?”
막내인 하소백은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동안 강호의 여협 흉내를 냈는데 이제 그러지 못하게 돼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다.
한채연이 웃으며 하소백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왜? 계속 돌아다니고 싶어?”
“언니는 싫어요?”
“싫은 건 아닌데. 사람이 어떻게 평생 떠돌아다닐 수 있겠니?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지.”
집이라는 말에 하소백은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아직 그녀에게 산채는 집이 아니다. 그저 의지할 곳이 없어서 머무르는 곳일 뿐. 최근 들어 그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언니, 앞으로도 계속 산채에서 살 거예요?”
“왜? 어디 갈 데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이젠 어디 가서도 살 수 있겠다’는 자신은 있어요. 무공도 배웠고, 석 달 넘게 노숙까지 해서 그런지 겁이 안 나요. 언니는 안 그래요?”
“그렇긴 하지.”
한채연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은 무얼 해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역시 무공과 그 간의 고생 때문인 것 같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연적하가 한마디 했다.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뭘 해도 도둑질보다는 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