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25
525회. 피로 회복에 좋아요
공지섭의 만류에도 연적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피해 다니면 돼요. 월악산이 손바닥만 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천관산맥에도 영물과 신수가 있다면서요? 어차피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예요.”
“연 대협, 천관산맥에 비하면 월악산은 뒷동산이나 다름없습니다. 천관산맥의 신수와 월악산의 마물을 비교하시면 안 됩니다.”
“그쯤은 저도 알아요. 마물을 어떻게 신수에 비교하겠어요?”
연적하의 말에 공지섭이 인상을 찌푸렸다.
산의 규모가 달라 위험하다고 한 건데 어째 엉뚱하게 받아들인 느낌이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냅다 달아나면 되잖아요.”
“저어, 그런데 동행자들도 둘이 있습니다만.”
“양쪽 옆구리에 한 사람씩 끼고 달리죠 뭐.”
순간 공지섭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른 두 사람을 옆구리에 끼고 달아나다니? 그렇게 간단히 피할 수 있다면 마물이 아니다.
“연 대협, 조금 멀더라도 차라리 천관산맥이 낫지 않겠습니까?”
“월악산까지는 거리가 어떻게 되는데요?”
“말을 타고 사흘이면 닿는 거리입니다.”
사흘이란다.
연적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월악산으로 갈게요.”
“…….”
확고한 그의 태도에 공지섭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월악산을 고집하다니 보기보다 강단이 있다.
‘생김새는 사내치고 여리여리한데…….’
공지섭은 처음으로 ‘연적하가 겉보기와 달리 거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출발은 언제쯤 하시겠습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시간 끌 거 없죠. 오늘 출발할 테니까 준비 좀 시켜 줘요.”
“오늘요?”
공지섭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런 중대한 일을, 말 나오자마자 마치 마실이라도 나가듯 쉽게 결정하다니!
이렇게 진행 속도가 빠른 사람은 처음이다.
사나흘 정도 계획을 세운 뒤에 움직이는 게 보통인데 빨라도 너무 빠르다.
생각 없이 그냥 몸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인 걸까?
“연 대협, 장거리 여행이 될 겁니다.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사나흘은…….”
“에이, 준비할 게 뭐가 있어요. 건량만 있으면 되지. 참! 월악산이 있는 곳까지 마차가 있나요? 전에 도시와 도시 사이를 마차가 다닌다고 들었는데.”
“공화현까지 가는 마차가 있습니다만, 월악산은 거기서도 한참을 더 가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말을 이용하곤 했지요.”
“말이라, 현천문에서 빌릴 수 있죠?”
“어렵지 않을 겁니다. 본문에서 관리하는 말이 이십여 필 되니까요.”
“그럼, 말 세 필에 건량 하루 치만 챙겨 줘요. 나머지는 가면서 구하면 되니까.”
“저어…….”
“예?”
“아, 아닙니다.”
공지섭은 ‘돈은 있으십니까?’라고 물으려다가 그냥 얼버무렸다.
그에게 돈이 한 푼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가는 경비 말인데요.”
“예.”
공지섭은 연적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침내 돈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경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생각일까?
“그 누구더라? 유 뭐라고 했는데…….”
“유익현요?”
“아, 맞다. 유익현. 그 사람이 ‘영지 선초’를 캘 수 있게 데리고 가 달라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보호해 줄 테니까, 그 대신 현천문에서 경비를 내라고 하세요. 그래 봐야 숟가락 두 개 더 얹는 거니까 얼마 들지도 않잖아요.”
“그, 그렇기는 합니다.”
공지섭은 연적하의 말에 수긍하면서 한편으로 그가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새색시처럼 고분고분 지내더니, 갑자기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
처음부터 다른 종문 제자들처럼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면 모를까?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하니 맞춰 주면서도 한편으로 얼떨떨하다.
“설마 문주님이 돈 한 푼 없는 나한테 짐까지 떠맡기려고 하진 않겠죠. 그 정도로 양심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안 되지. 출발 준비가 끝나면 알려 줘요. 객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예? 예!”
공지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비를 대지 않으면 현천문을 뒤엎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경우에 어긋난 요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주의 자리까지 거론하다니.
멀어져 가는 연적하를 보고 있던 공지섭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대가 없이 도와줘서 퍼 주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기야 돌이켜 보면 모두가 지나치긴 했다.
‘천년화령적지’는 물론 ‘장생불사 곰의 쓸개’까지 얻고서 입을 싹 닦지 않았나 말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암시장에서 번 돈의 일부를 연적하에게 줘야 할 것 같다.
‘금자 오십 냥에 팔았는데 얼마를 줘야 하나.’
고민하던 공지섭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조원들을 따로 불러서 논의해야 할 것 같다.
***
여행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연적하가 문주의 자질까지 거론하며 추진하는 일을 두고 왈가왈부할 사람은 없었다.
특히나 당사자인 소천우는 이 일로 연적하의 눈 밖에 날까 봐 직접 여행 준비를 챙겼다.
점심을 먹으려고 객사를 나서는 연적하에게 공지섭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연, 연 대협!”
“예?”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무 때라도 출발하시면 됩니다.”
“어이쿠! 빨리 끝났네요?”
연적하는 자기가 협박에 가깝게 몰아붙인 걸 까맣게 잊고 놀란 얼굴을 했다.
“문주님께서 직접 챙겨 주셔서 그렇게 됐습니다.”
“아이고 고마워라. 사람들을 시키면 될 텐데 뭘 그렇게까지 해 주셨대요?”
공지섭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저렇게 순진한 인사에 속으면 안 된다.
‘조금 전까지 문주님을 협박하던 사람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는 몸을 흠칫 떨고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점심은 드시고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공지섭은 이제 식사를 하라는 말도 조심스러웠다.
“어차피 먹어야 하니까 먹고 가지요. 그런데 경비 문제는 어떻게 정리가 됐어요?”
기다렸다는 듯 공지섭이 답했다.
“앞으로 모든 비용은 유익현이 지불할 겁니다. 혹시 연 대협께서 자금 관리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에요. 귀찮게 무슨 그런 것까지. 나는 그냥 ‘영지 선초’만 캘 거예요.”
“그러는 게 나을 겁니다.”
공지섭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적하가 돈 관리를 맡으면 그건 그거대로 골치가 아프다.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 남은 돈이 얼마인지 묻기가 괴로운 까닭이다.
연적하가 점심 식사를 마치자 공지섭이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공지유와 유익현이다.
간편한 복장의 유익현과 달리 공지유는 어디 나들이라도 가는지 화려한 차림이었다.
심지어 가벼운 화장까지 했는지 입술은 붉고, 분 냄새까지 났다.
연적하가 무심코 코를 킁킁거리자 공지유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외출할 일이 있었거든요.”
“아, 네.”
연적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 두 사람과 눈을 맞췄다.
“들어서 알겠지만 월악산으로 갈 거예요. ‘독안귀마’라는 마물이 있다고 하니 정신 바짝 차리시고요. 그럼 슬슬 출발해 볼까요?”
짧은 소개말을 끝으로 연적하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공지유는 슬쩍 공지섭을 보았다.
‘보호해 줄 테니 걱정 마라’ 따위의 격려를 기대했는데, 정신 바짝 차리란다.
공지섭은 자신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돌아섰다.
유익현이 공지유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사저, 이대로 그냥 가도 괜찮을까요?”
“그럼 뭐 다른 수가 있니?”
공지유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연적하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뒤를 따르는 것도 정문까지만이다.
말에 올라탄 뒤로 공지유는 연적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그녀 외에 월악산까지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다.
해거름 무렵.
신당(神堂) 앞을 지나던 공지유가 갑자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힝!
급하게 멈춰 선 말이 신경질적으로 투레질을 했다.
저만치 지나갔던 연적하가 돌아와 물었다.
“왜요?”
“더 가면 쉴 곳이 없어요. 언젠가 이곳을 그냥 지나갔다가 후회한 기억이 나요.”
“아, 그럼 쉬어야죠.”
연적하는 순순히 말에서 내려 신당으로 걸어갔다.
“이건 무슨 건물이에요?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데.”
“팔왕 중에 특별히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사당이에요.”
불가(佛家)의 ‘사천왕’을 떠올린 연적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도 ‘사천왕’은 있나 봐요?”
“훗! 농담이시죠? 구주에서 ‘사천왕’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적하가 자신 없는 얼굴로 물었다.
“지국천왕(持國天王), 광목천(廣目天王), 증장천(增長天王), 다문천(多聞天王)?”
공지유가 눈을 끔뻑였다.
“그런 왕도 있어요?”
역시나다.
연적하가 계면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냥 아무 말이나 해 본 거예요.”
공지유는 연적하가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고범천왕(孤梵天王), 공허천왕(空虛天王), 북명천왕(北冥天王), 광욕천왕(狂欲天王) 중에서 어느 한 분을 모신 신당이에요.”
“건물만 보고 알 수 있어요?”
연적하의 물음에 뒤따르던 유익현이 답했다.
“신당 문에 조각된 네 개의 짐승이 ‘사천왕’을 상징해요. 그중에 누구인지는 들어가서 봐야 알고요.”
“아 그래?”
연적하는 열아홉 살인 유익현에게 말을 놓았다.
하지만 공지유는 한 살 차이지만 여자라서 그런지 선뜻 반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 사람은 신당의 안쪽 마당까지 말을 끌고 들어갔다.
특별히 제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관리하는 사람도 없는데 굳이 신당 밖에 세워 둘 이유가 없어서다.
공지유가 정면에 서 있는 전각으로 다가가 씩씩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실례 좀 할게요! 어머. 광욕천왕이셨네.”
호기심에 연적하가 공지유의 어깨 너머로 전각 안을 살펴보았다.
거대한 날개가 달린 사내의 발치에 벌거벗은 네 명의 여자들이 앉거나 서 있었다.
벌거벗은 남녀의 상을 본 연적하는 계면쩍은 얼굴로 돌아섰다.
하지만 공지유나 유익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두 사람은 익숙한 동작으로 향을 피웠다.
뒤이어 정성껏 절까지 마친 공지유가 전각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 대협, 들어오세요.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가 가요.”
“신당 안에서 막 자도 돼요?”
“다른 사천왕들은 그러면 안 되는데요. 광욕천왕의 신당은 괜찮아요. 오히려 쉬었다가 가라고 만든 곳인데요 뭐.”
“쉬었다가 가라고 만들어요?”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전각 안쪽 곳곳에 잠자리의 흔적이 널려 있었다.
심지어 회수하지 않은 이불까지 보였다.
“특이한 신당이네요?”
“아, 처음 와 보시나 보다. 본래 광욕천왕은…….”
공지유가 설명할 때, 절을 마친 유익현이 슬며시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저는 주변에 땔나무가 있는지 한 바퀴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유익현이 나가자 공지유가 설명을 이어 갔다.
“광욕천왕은 ‘사천왕’이면서 다산(多産)과 관계된 남신(男神)이기도 해요. 본래 도색(桃色)을 밝히는 신인데, 그런 쪽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믿게 된 거죠.”
“도색요?”
점입가경이다.
세상에 무슨 그런 신이 있단 말인가!
꾸며 낸 이야기 같았지만 그녀의 진지한 얼굴을 보니 사실인 모양이다.
갑자기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코끝에 와 닿는 은은한 향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았다.
“향 냄새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 광욕천왕의 신당에서 쓰는 향에는, 뭐랄까, 심신을 나른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어요. 그래서 피로 회복에도 좋답니다.”
느낌이 꼭 미혼향 같은데, 피로 회복에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