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42
542회. 실속 있게 살아 보려고요
현천문주 소천우가 금부진 장로의 이름을 들먹이자 공지유가 나섰다.
“문주님, 그 일은 천지문의 금부진 장로가 먼저…….”
소천우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어허! 누가 그걸 모른다더냐. 하지만 천지문에서 그 일을 빌미로 물고 늘어지면 당할 수밖에 없으니 그러는 게 아니냐. 연 대협,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왜요? 그쪽에서 시비를 걸어요?”
“연 대협의 무위를 알고도 그러는 걸 보면……. 소요종에 줄을 댄 것 같습니다.”
그제야 연적하는 소천우가 허겁지겁 뛰어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천지문 뒤에 소요종이 있는 것 같으니 똥줄이 타는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들을 도와줬는데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요?”
연적하의 반문에 소천우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눈만 끔뻑였다.
연적하는 그런 소천우를 빤히 보기만 했다.
그제야 소천우는 연적하의 심사가 불편함을 깨달았다.
혹시 그에게 이번 일의 책임을 지우려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나서 주기를 바라기는 했다.
‘그동안 현천문과 그의 관계가 제법 돈독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인가?’
고민하고 있는 소천우를 대신해 총관 만지홍이 나섰다.
“연 대협, 소요종이 아니더라도 저희 현천문은 천지문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저들이 운문현의 일로 현천문에 앙심을 품고 있으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한 번만 도와 달라’는 말과 함께 만지홍은 머리를 숙였다.
보자마자 ‘분쟁의 원인’부터 앞세웠던 소천우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만지홍이 나서자 분위기는 대번에 부드러워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 연적하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연적하가 못 이기는 척 만지홍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 믿었다.
현천문도들은 그를 까탈스러운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지금까지 딱히 자기주장이 없었기에 고강한 무위와 별개로 쉽게 본 것이다.
하지만 연적하는 녹림도 출신.
자기 몫을 챙기는 게 생활화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흐르는 물처럼 조용히 지낸 건, 이 세계가 낯설어서다.
그러나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공지섭과 조원들의 뒤만 졸졸 따라 다닌 전과 달리 월악산의 산행은 그가 중심이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는 구주(九州)에서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았다.
다른 무인들을 만났고, 상인들을 접했으며, 영지 선초가 구주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은 그동안 자신이 호구처럼 굴었다는 사실이다.
소천우는 ‘천년화령적지’를 받고 입을 씻었다.
그나마 공지섭은 금 한 냥이라도 주었지만, 소천우는 그냥 낼름 삼켰다.
그 귀한 상품의 영지 선초를 말이다.
‘천년화령적지’를 떠올린 연적하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천관산맥에서 구한 영지 선초를 소요종의 고수에게 바쳤다면서요? 그분에게 부탁하면 되잖아요?”
만지홍은 감히 답하지 못하고 소천우를 슬쩍 보았다.
그런 정치적인 이야기는 총관이 아니라 문주가 나서서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소천우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소요종에 부탁을 하면 좋겠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더 큰 일에 쓰고 싶어서 아끼는 중이었다.
닭 잡는 데 왜 소 잡는 칼을 쓴단 말인가!
은하고검 천승학은 현천문의 존망이 걸린 일에나 사용하는 게 맞았다.
“천지문은 연 대협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랴부랴 찾아뵈었던 것입니다.”
“천지문의 뒤에 소요종이 있는 것 같다면서요.”
“연 대협은 소요종 종문 제자를 이기셨잖습니까.”
“그러니까 또 소요종 제자를 물리쳐 달라?”
“이번 일을 도와주시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소천우가 자존심을 버리고 머리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연적하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은 지난번에도 했잖아요? 이번에도 또 같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
소천우는 계면쩍은 얼굴로 웃기만 했다.
‘뭘 원하느냐?’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혹시라도 맨입으로 넘어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어서다.
천관산맥에서 조건 없이 도와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래 줄 것 같아서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분위기에 떠밀려 승낙할 상황이지만 연적하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알고 보면 낭인이나 마찬가지거든요? 낭인 알죠?”
순간 소천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낭인은 기본적으로 돈을 따라가는 무인인 까닭이다.
“어이쿠! 곧 종문 제자가 되실 연 대협을 어찌 낭인에 비하겠습니까?”
소천우가 입에 발린 말을 했지만 연적하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낭인보다 못하죠. 종문 고수와 소문주님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좋은 일이 있었는데, 내 삶은 여전히 개털이잖아요? 오죽하면 독안귀마가 있는 월악산을 뒤지고 다녔을까.”
“…….”
노골적인 연적하의 말에 소천우와 만지홍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실속 있게 살아 보려고요.”
눈치를 보던 만지홍이 물었다.
“실속이라 하심은?”
“낭인처럼 돈이라도 좀 받아야죠. 계속 죽 쒀서 개만 줄 수는 없잖아요. 아, 그렇다고 소문주님이 개라는 소리는 아니니까 오해 마시고요.”
“어, 얼마를 원하십니까?”
만지홍이 멍하니 서 있는 문주를 힐끔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린고비인 그는 아예 넋이 나간 얼굴이다.
종문의 고수만큼이나 강한 연적하니 큰돈이 들어갈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내가 시세를 몰라서 그러는데, 얼마 정도에 낭인을 고용하나요?”
순간 넋 나간 얼굴로 있던 소천우가 끼어들었다.
“낭인의 경우 보통은 일당으로 계산합니다. 하루에 은자 한두 냥 정도지요.”
연적하가 소천우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래서 나 같은 고수도 하루에 은자 한두 냥이라는 건가요? 참고로 나는 누가 내 뒤통수를 후려치면 가만 안 둡니다.”
그의 은근한 협박에 소천우가 급히 답했다.
“그럴 리가요. 연 대협께서 낭인의 일당을 궁금해하시는 줄 알고 그랬 습니다. 연 대협 같은 고수라면……. 어디를 가도 하루에 은자 다섯 냥은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은자 다섯 냥을 주겠다는 소리다.
연적하가 공지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지유가 맞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적하는 그녀에 대한 믿음으로 은자 다섯 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하루에 다섯 냥을 받는 것으로 하지요. 동의하시면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죠.”
계약서라는 말에 소천우가 눈을 끔뻑였다.
고수의 말이 법인 세상에서 계약서를 쓰자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 대협, 굳이 계약서를 쓰실 이유가 있습니까? 저희가 약조를 어기면 연 대협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텐데…….”
“아, 계약서를 안 써도 돼요?”
“보통의 낭인들과는 당연히 씁니다만 연 대협은 그런 낭인이 아니시니까요. 종문의 제자들은 평생 계약서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도 될 정도로 약속을 잘 지키나 봐요?”
“…….”
소천우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은 전혀 그런 것과 관계가 없다.
종문의 제자들은 단지 귀찮아서 계약서 따위를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속세의 일은 일탈과 같은 것이었다.
종문에 있다가 속세의 추억이 밀려오면 잠깐 하산해서 즐기다 가는 식이다.
그러니 책임과는 거리가 멀다.
약속도 잘 잊고, 내키는 대로 속세의 삶을 살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연적하도 당연히 그러려니 했는데 잘하면 계약서를 써 줄 모양이다?
“저어, 연 대협께서 쓰시겠다면 계약서를 준비하겠습니다.”
“안 할래요. 종문의 제자들도 안 하는 짓을 내가 왜 해요? 내가 그들보다 못한 것 같잖아요.”
연적하는 엉뚱한 부분에서 자존심을 세웠다.
소천우는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두 번 다시 계약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럼, 저는 연 대협만 믿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해결해 주십시오.”
소천우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총관과 함께 안채로 돌아갔다.
문주와 총관이 물러가자 연적하 일행은 다시 객사로 이동했다.
잠시 후 객사 앞에서 공지유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럼 연 대협, 저희는 이만…….”
막 물러가려는 공지유와 유익현을 연적하가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예?”
공지유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연적하는 주섬주섬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내가 물어본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내악에서 영기가 깃들어 있는 노란 과일을 땄거든요. 이것도 값이 좀 나가는지 봐 줘요.”
연적하가 모르는 척 ‘천년지령선과(千年地靈仙果)’를 꺼내 보였다.
세 개의 노란 과일을 보자마자 공지유가 소리쳤다.
“어머! ‘천년지령선과’ 같은데요? 유 사제, 봐 봐. ‘천년지령선과’ 맞지?”
“예, ‘천년지령선과’네요. 이거도 ‘천년화령적지’만큼이나 비싼 상품의 선과인데. 연 대협, 축하드립니다.”
‘천년화령적지만큼이나 비싸다’는 말에 연적하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약초학에 밝은 공지유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런데 덜 익은 걸 따 오셨네요. 이건 그냥 노랗기만 하잖아요? 잘 익은 건 표면에서 광채가 난다고 하더라고요.”
“어? 정말 그러네? 쯧쯧! 아깝다. 아까워.”
유익현도 옆에서 혀를 찼다.
“덜 익은 거는 못 써요?”
연적하의 물음에 공지유가 자세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덜 익은 선과는 약효가 절반에 못 미친대요. 그래서 가격도 절반으로 뚝 떨어져요. 잘 익기를 기다려서 따셨으면 못해도 하나당 금자 백 냥은 받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저건 덜 익었으니까 오십 냥도 안 될 거예요.”
“아! 그래요?”
연적하는 똥씹은 얼굴로 세 개의 선과를 보았다.
은근히 속으로 기대했는데 잘 받아 봐야 금자 백오십 냥이라니…….
돌이켜 생각하니 독안귀마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그때는 그냥 선과를 내줘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덜 익은 걸 보고 그랬던 모양이다.
‘뭐 그래도 백오십 냥이 어디야.’
칠십 냥을 홍익방에 가져다줘도 팔십 냥이나 남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당을 받겠다고 소문주를 몰아붙인 일이 후회가 된다.
‘거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때문에 야박한 소리를 했나?’
‘자갈이 열 번 구르는 것보다 바위가 한번 구르는 게 낫다’더니 딱 그 짝이다.
낭인 생활 일 년을 하는 것보다 영지 선초 하나 캐는 게 더 이득이겠다.
연적하의 침묵이 길어지자 공지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어, 이문을 좀 더 보시려면 소요종에 직접 파는 게 나으실 거예요. 아니면 현에서 가장 큰 약재상에 넘기셔도 되고요.”
“소요종에 직접 팔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수미성 불우산에 종단이 있어요.”
“멀어요?”
“석 달은 걸릴 거예요.”
“그럼 그냥 약재상에 넘겨야겠네요.”
연적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추위에 석 달 동안이나 여행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급한 게 아니라면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내년 봄에 불우산에서 ‘비승과해(飛昇過海, 재능과 깨달음을 보는 시험)’가 열리잖아요. 그때 가셔서 직접 처분하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공지유는 연적하가 당연히 ‘비승과해’에 도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흠.”
연적하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구주는 넓다.
홍익방 방주는 수약주의 십삼 개 성을 조사하는데 일 년쯤 걸린다고 했다.
그런 식이라면 구주를 조사하는 데 최소한 구 년이 걸리는 셈이다.
그물코가 큰 그물로 대충 훑는 게 그렇다.
급한 마음에 맡겨 놓았지만 자신이 직접 찾으러 다니는 것만 못할 게다.
그러니 그들과 별개로 자신도 남궁연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
구 년이 걸리든, 구십 년이 걸리든…….
문제는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를 종문이다.
‘왕들의 하늘’에 와서 지난 몇 달 동안 벌써 종문의 고수를 셋이나 만났다.
조만간 천지문의 일로 또 얽힐지도 모른다.
문득 독안귀마의 말이 떠올랐다.
-좋다. 종문 제자들이 네 영기의 실체를 알게 되면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모두 네 영기를 탐낼 테니까. 너를 위해서라도 종문의 제자가 되는 게 나을 것이다.
-종문에 들어가면 적어도 하나의 종문에서는 너를 보호해 줄 테니까. 물론 그 전에 네가 속한 종문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소요종의 ‘비승과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종사가 되면 누님을 찾는 데 도움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