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8
58회.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소리야
행수 정운관의 얼굴이 절망으로 검게 물들었다.
오봉산채의 호걸들을 다섯이나 죽였으니 보상금이 얼마나 들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독심낭인 황요명이 멍하니 서 있는 정운관에게 소리쳤다.
“풀어 새끼야!”
“아, 예, 예, 그래야지요. 어이쿠! 호걸님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정운관의 호들갑과 함께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연적하는 낙양오협을 사로잡고, 화양상방은 쫓아냈다.
신의대 대주 풍천도 양무기가 낙양오협의 석방을 위해 고두배(叩頭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머리로 땅바닥을 세 번 두드리는 것)까지 하며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떠나기 전에 행수 정운관은 풍연초에게 사죄의 뜻으로 무려 오백 냥이나 내놓았다. 사망한 도적 한 사람당 백 냥씩 물어 준 셈이다.
채주인 풍연초는 낙양오협의 관리와 감시를 독심낭인 황요명에게 맡겼다. 사실 별호에 독심이 들어간 황요명만큼 그 일을 잘 해낼 사람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풍연초의 선택은 옳았다.
황요명은 낙양오협에게 산공분이 든 물을 실컷 마시게 한 뒤, 점혈까지 해서 숙소에 몰아넣었다. 무자비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처리한 것이다.
도적들 사이에 ‘낙양오협을 잡아 두고 있어도 되는가’를 두고 잠깐 말이 나왔지만, 곧 수그러졌다. 오봉산채의 도적들은 연적하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오봉산채의 도적들은 본 적도 없는 군자검보다 함께 생활하는 연적하를 더 경외했다. 어떤 이는 군자검도 연적하의 상대가 안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해가 질 무렵.
풍연초는 오봉산 제일봉으로 연적하를 찾아갔다.
연적하는 산봉우리 끝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허허로워 풍연초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구경만 해야 했다.
한참 만에 눈을 뜬 연적하가 고개를 돌렸다.
“형님, 내가 나이를 먹긴 먹은 거 같아요. 이젠 허무한 게 뭔지 알 것 같거든요. 오늘따라 구천여일진경의 연공이 전보다 더 잘되네요.”
풍연초는 쓸쓸해 보이는 연적하의 표정에 일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연적하의 곁에 털썩 주저앉아 지는 해를 함께 바라보았다.
“제 이름을 ‘붉은 노을[赤霞]’이라고 지은 사람이 아버지래요. 그래서 그런지 노을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요. 그런데 웃긴 게 얼굴은 기억이 안 나는 거 있죠?”
“너무 어릴 때 봤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설마 저녁 먹으러 오라고 부르러 온 거예요?”
“그것도 있고…….”
풍연초가 말끝을 흐렸다.
낙양오협을 언제까지 잡아 둘 건지 물으러 왔는데, 미안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풍연초가 물었다.
“와룡장의 연씨 성을 가진 아가씨 있잖아. 검술이 눈에 익던데……. 아우와 관계있는 거지?”
연적하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답했다.
“배다른 누나예요.”
“아, 그랬군.”
그제야 풍연초는 연적하가 왜 그렇게 분노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연 아우, 녹림은 말야. 나쁜 짓을 해도 욕먹고, 좋은 짓을 해도 욕먹어. 무슨 말인지 알아? 그냥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소리야.”
“푸흐흐흣!”
연적하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맞는 소리다.
사람들은 앞에서는 호걸 어쩌고 하다가도 돌아서면 도적이라 욕했다. 악독하기로 소문난 하탕진의 삼악산채나 오봉산채나 어차피 욕먹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날 저녁.
연적하는 낙양오협을 앞마당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평상에 걸터앉아 땅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낙양오협을 내려다보았다.
“이봐, 애송이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들어 온 거야? 녹림이 우습지?”
이소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이제 그만 우리를 보내 주는 게 어때요? 화양상방은 다 돌려 보냈잖아요?”
“그들은 배상금으로 오백 냥을 내놓았어. 너희들도 돈을 지불해. 그럼 내보내 줄게.”
“지, 지금 우리에게 돈을 내놓으라는 건가요?”
이소민은 물론 낙양오협들이 눈을 부릅떴다.
강호행을 나간 정파의 신진고수들이 녹림에 잡혀 배상금까지 지불한다고?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이번 생에서는 협객의 꿈을 접어야 한다.
둘째인 오중산이 펄쩍 뛰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세상천지에 이런 경우는 들어 본 적이 없소!”
첫째인 황동엽이 사정하듯 말했다.
“소형제, 제발 그러지 맙시다. 솔직히 우리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호에 나왔소. 그러다 보니 수중에 돈이 별로 없소이다. 가진 걸 다 내놓고 가라면 그렇게 하겠소. 그 이상은 무리요. 아니, 불가능하오.”
듣고 있던 연적하가 냉소를 쳤다.
“흥!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의 집에서 받아 낼 생각이니까. 우리는 돈이면 돼.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돈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헐! 그거야말로 섶을 지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생각이오. 나야 그저 그런 문파지만 여기 이 소저는 의천문주님의 영애요. 소형제도 의천문의 이름은 들어 봤을 거 아니오? 군자검 님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면 당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응, 괜찮아. 군자검이건 소인검이건 난 안 무서워. 여차하면 달아나면 되거든. 그런데 달아나기 전에 너희들의 목을 잘라 줄 거야.”
“그, 그러고도 오봉산채가 무사할 것 같소!”
“우리는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 돼. 천하에 오봉산만 있는 건 아니잖아?”
다소 억지스러운 말이지만 황동엽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저들이 달아나기 전에 자신들을 죽일 거라는 사실이다.
다른 낙양오협들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심각해졌다. 뒤늦게 ‘가문에서 구출하기 전에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연적하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자아, 그럼 지금부터 자신의 몸값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말해 봐. 너부터.”
연적하의 손이 황동엽에게로 향했다.
“하아! 우리 팔선문은 부자가 아니오. 솔직히 은자 오백 냥도 벅차오.”
“알았어. 오백 냥. 그다음.”
두 번째로 지목당한 대연문의 대제자 오중산은 ‘삼백 냥’을 불렀다.
연적하는 선선히 받아들였다.
“다음 사람.”
눈치를 살피던 칠양문의 손상극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이백 냥?”
그러자 이번에도 연적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이소민은 울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이봐요. 내가 잡혀 있는 걸 알면 정말 큰일 나요. 그러니까 그냥 보내 줘요.”
“얼마라고?”
연적하가 딴소리를 하자 이소민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았어요. 어디 한번 맘대로 해 봐요. 난 백 냥.”
홧김에 아무렇게나 내지른 금액이다.
순간 낙양오협의 시선이 연적하의 입으로 향했다.
팔선문의 제자가 오백 냥인데 의천문주의 딸이 백 냥을 불렀다.
과연 저 도적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 줄까?
아니면 더 큰 금액을 요구할까?
“알았어, 백 냥.”
연적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다.
그러자 황동엽이 억울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소형제! 나도 오백 냥이 벅차다고 하지 않았소? 좀 금액을 낮춰 주시오.”
“얼마를 원하는데?”
한참 머리를 굴리던 황동엽이 답했다.
“나도 백 냥?”
“그래 그럼.”
연적하는 금액으로 흥정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낙양오협은 저 도적의 목적이 돈에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뭘까?
한순간 황동엽이 흠칫 놀란 얼굴로 제 목을 움켜잡았다.
혹시 배상금은 핑계에 불과한 게 아닐까?
어쩌면 낙양오협의 가문이 쳐들어오기 전에 자신들을 죽이고 튈지도 모른다.
곰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다.
사실 낙양오협을 인질로 잡았다는 것부터가 이미 오봉산채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예를 중시하는 낙양오협의 가문에서 순순히 돈을 주고 무마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 연적하가 연설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마지막이군. 너는 얼마지?”
“하아! 나도 백 냥.”
순간 연적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지. 너는 나에게 칼질을 했으니까 그보다 더 내야 해.”
“어, 얼마를 원하는 거냐?”
연설주의 음성이 떨렸다.
고강한 무공과 달리 재물욕이 없는 맹한 놈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와룡장의 사정은 외부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매우 열악하다. 어머니가 하루 종일 장부를 옆에 끼고 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금 와룡장은 한번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걸 알기에 연설주는 속이 타들어 갔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있는 건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은자 천 냥.”
“미친! 안 돼! 그런 돈은 절대 없어! 의천문도 백 냥인데 왜 나만 천 냥을 내야 하냐고!”
연설주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얗게 질린 연설주와 달리 황동엽의 얼굴에는 살짝 혈색이 돌았다. ‘어쩌면 정말로 돈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말했잖아. 나에게 칼질을 한 대가라고. 돈을 내지 못하면 넌 오봉산채에서 살아야 해. 시집갈 나이가 된 것 같으니 쓸 만한 도적을 소개 해 줄 수도 있어.”
“무슨 그런 개소리를! 소형제. 아니, 소협! 제발 그러지 마. 와룡장에는 그 정도의 돈이 없어.”
“그럼 넌 저놈하고 신방을 차려야 할 거야.”
말과 함께 연적하가 황요명을 가리켰다.
그러자 황요명이 입을 헤벌쭉하게 벌리며 소리쳤다.
“저요? 감사합니다! 형님!”
연설주가 놀란 눈으로 두 도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린 도적의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보니 농담은 아닌 것 같다.
‘이곳에서 능욕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연설주에게 이소민이 말했다.
“연 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의천문에 융통을 부탁해 볼게. 잘될 거야.”
연설주는 지금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엔 낙양오협의 가문이 오봉산채를 토벌하러 올 거라고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럼 너희 목을 베고 달아나겠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바뀌었다.
이젠 다들 어떻게든 배상금을 내고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아마도 본격적인 복수전은 그 이후에나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지금은 ‘어떻게든 은자 천 냥을 마련해야만 한다’는 소리다.
날벼락 같은 통보가 어머니에게 갈 걸 생각하니 혀를 물고 자결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겨질 가족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
고개를 떨군 연설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숙소로 돌려보내진 낙양오협은 밤새도록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들의 절박한 심정은 훗날 가족들이 가슴을 쥐어뜯을 정도로 애절한 편지를 만들어 냈다.
한편 그 속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오봉십걸의 위험성도 강조되어 있었다.
황동엽의 편지 중 한 구절을 보면 이랬다.
[섣불리 자극하면 우리가 먼저 살해당할 겁니다. 오봉십걸은 그러고도 남을 악적입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으니 부디 배상금부터 보내 주십시오. 제발요.]날이 밝자 연적하는 발 빠른 산적 다섯에게 낙양오협의 편지 배달을 맡겼다.
***
낙양.
해거름 무렵, 삼십 대 중반의 검객이 지친 얼굴로 성내로 들어왔다.
화양상방 신의대 대주 양무기였다.
그는 오봉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정운관 행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상단을 나왔다. 낙양오협의 가문에 명예롭지 못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지쳤지만 그는 쉬지도 못하고 의천문으로 향했다. 문주인 군자검과 만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