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9
59회. 천 냥의 빚
급한 마음과 달리 의천문에 다가갈수록 풍천도 양무기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하아! 그나저나 어떻게 첫마디를 떼어야 하나.’
군자검 이연익에게 ‘문주님의 딸이 녹림에 잡혀 있다’는 소식을 전하려니 눈앞이 캄캄했다.
자신이 아무 관계없는 제삼자면 상관없다.
하지만 자신은 낙양오협의 강호행을 적극 지원했다. 보기에 따라서 그들이 포로가 된 데에는 일정 부분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돌아 버리겠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한숨을 푹푹 쉬다가 고개를 드니 코앞에 의천문의 현판이 보였다.
늦은 밤, 의천문의 의사청에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다. 인의대협으로도 불리는 의천문 문주 군자검 이연익과 풍천도 양무기였다.
양무기의 이야기가 끝나자 의천문 문주 군자검 이연익이 조용히 되물었다.
“그러니까, 내 딸이 화양상방과 함께 오봉산채를 토벌하러 갔다가 사로잡혔다?”
“송구합니다. 제가 만류했어야 하는데…….”
양무기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차분한 음성과 달리 이연익의 전신에서 진득한 살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군자검이라더니 화를 낼 때조차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고개를 떨군 양무기의 귀로 씹어 뱉는 듯한 이연익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지인 그가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조절하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오봉십걸에 대해 본 대로 말해 보게.”
양무기는 그날 자신이 목격한 것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전달했다.
“……그 도적이 박도를 휘두르자 일진광풍이 일어났고, 모든 게 한순간에 끝났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녹림삼존이 떠올랐습니다. 저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연익이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고작 십 대 후반밖에 안 되는 도적이 녹림삼존의 무위를 지녔다?”
정파에서 녹림의 무위를 평가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최고는 천하십대고수인 파천마군, 그다음이 전대 거마인 녹림삼존, 그다음이 십이마군, 그다음이 녹림채주, 나머지는 그냥 잡도둑이다.
“예…….”
양무기도 자신의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본 대로 전할 수밖에.
또 그래야 자신과 낙양오협이 굴복한 게 말이 된다. 녹림삼존은 칠파이문의 장문인쯤은 돼야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고수가 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지?”
“지난해에 갑자기 등장해서 오봉산 일대를 장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문으로는 무당파의 천지상인께서도 당해 내지 못하셨다고…….”
양무기는 상대가 녹림삼존급이라는 걸 한 번 더 강조했다. 낙양오협은 몰라도 천지상인이라면 그 무위가 이미 알려진 고수다. 그가 당할 정도면 확실히 십이마군의 윗줄이라는 소리였다.
“자네의 말이 맞다 쳐도 이해할 수가 없군. 고작 녹림삼존급의 무공으로 내 딸을 잡아 두었다고? 의천문이 두렵지 않다는 건가?”
“…….”
양무기는 말없이 머리만 조아렸다.
어떤 말을 해도 이연익의 화만 돋운다는 걸 알아서다.
그런 양무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군자검 이연익이 문득 말했다.
“그런데 강적을 만난 사람치고 상처가 없군.”
“부끄럽습니다. 너무도 압도적인 무위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무극문에 갈대 같은 사람이 있었구먼. 풍뢰도는 무극문의 입구에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하던데.”
무극문의 문주인 풍뢰도 장강호는 오동나무처럼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 이연익은 그에 빗대어 싸우지도 않고 도적에게 투항한 양무기를 비난하고 있었다.
수치심에 천풍도 양무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젠장, 그럼 싸우다 죽었어야 한다는 말인가.’
양무기는 다소 억울했지만 이연익의 심정을 생각해 꾹 참았다. 칠파이문의 장문인에게 딸이 산채에 잡혀 있는 것처럼 화나고 치욕적인 일도 없을 테니까.
***
남직례성 남경.
정의맹 총단.
맹주의 집무실에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얼굴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정의맹 맹주 풍뢰도 장강호와 총사인 신기수사 제갈승운이다.
“지난해 부양에 있는 수월상방의 상단이 검은 옷을 입은 자들에게 거의 몰살당한 적이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공백 대사의 일로 추측해 보건대, 그들은 흑암대였던 것 같습니다.”
“흐음! 결국 유명교가 다시 꼬리를 드러낸 것인가!”
장강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정의맹은 이십여 년 전 유명교와 싸운 적이 있다. 그 당시 우여곡절 끝에 승리했지만, 수뇌부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참월검객 연무룡과 검왕 남궁벽이 아니었다면 월하선자의 존재도 몰랐을 것이다.
정의맹과 유명교 사이에는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비사가 있다.
정의맹에는 네 개의 무력 단체가 있다.
척마대, 멸사대, 의기대, 천추대가 그것이다. 그들은 칠파이문의 정예들로 하나의 부대가 군소 문파 하나를 상대할 수 있었다.
유명교가 아직 세상에 알려지기 전, 강남 지역을 책임지던 의기대는 신원 미상의 납치범들과 조우한다. 의기대는 ‘그들을 추적하겠다’는 전서구를 보낸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도 누구의 짓인지 밝히지는 못했지만, 정의맹 수뇌부들은 유명교의 짓으로 생각하고 있다. 납치를 하는 범죄 집단 중에 의기대를 없앨 수 있는 곳은 유명교뿐이니까.
“맹주님, 공백 대사의 말대로라면 하남성에서만 수백 명의 승려가 사라졌습니다. 도사들까지 합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될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이십 년 전에 투항했던 유명교도가 한 말이 기억나십니까?”
“인신 공양으로 초능을 얻는다고 하던 그 해괴 맹랑한 소리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유명교에는 초능을 가진 고수가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총사께서는 그 말을 믿소?”
“유명교도들이 그토록 광적으로 인신 공양에 매달리는 걸 보면 완전히 허황된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역천의 마공서들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장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교도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지만, 총사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허면 총사의 생각은 어떻소?”
“목 잘린 목내이가 여주에서 발견되었다면 그 근방에 유명교의 교당이 있을 겁니다. 마침 의천문에 의기대가 있으니 그들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강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쯧! 또 의기대라니…….”
이십여 년 전에 실종된 의기대가 떠오른 모양이다.
“그 부분이 신경 쓰이면 이번에는 의천문에 추가 지원을 요청하시지요.”
“그렇게 합시다. 의기대를 두 번 잃고 싶지는 않소.”
“의천문만으로 부족할 수도 있으니 인근 문파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지적이오.”
장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기대는 소림사와 의천문의 정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의천문의 입장에서는 중복된 일이니 지원 인력이 부족할 수도 있었다.
그날 밤, 정의맹 총단에서 긴급한 연락에 쓰는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
낙양 동편 언사.
와룡장.
점심 무렵, 대청마루에 나와서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백미주에게 하인 하나가 다가갔다.
“마님.”
“무슨 일이냐?”
“조금 전 낯선 남자가 마님께 전하라며 서신을 맡기고 갔습니다.”
말과 함께 하인이 편지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백미주는 편지를 받자마자 별생각 없이 읽어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읽은 백미주가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하인에게 소리쳤다.
“당장 가서 무백이를 오라고 해! 어서!”
안주인의 서슬에 놀란 하인은 연무백을 찾아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잠시 후 연무백이 나타났다.
백미주는 들고 있던 편지를 연무백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봐! 네 동생 연주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오봉산채에 잡혀 있단다! 몸값으로 얼마를 요구했는지 아니? 자그마치 천 냥이야! 천 냥!”
편지를 주워 읽는 연무백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주가 오봉산채에는 왜 갔으며, 오봉산채는 또 무슨 담력으로 그녀를 인질로 잡았단 말인가?
와룡장의 무력은 이미 평범한 녹림 산채를 넘어섰는데 말이다.
‘백세상방에서 일하는 제자를 통해 하남성에 소문이 났을 텐데, 왜?’
처음에는 놀라서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녹림 주제에 와룡장을 능멸했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그러나 연무백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머니가 흥분한 상태에서 자신까지 그러면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없어서다.
“어머니, 낙양오협이 모두 인질 상태라고 하니 공동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일단 의천문으로 가시지요.”
“가면? 그곳에 가면 천 냥이 생긴다더냐? 네 동생 설주를 어떻게 할 거야? 잘난 그 입으로 말해 봐!”
와룡장 앞으로 들어오는 돈이 한 달에 백오십 냥이다. 그중 오십 냥을 월봉으로 지급하면 백 냥이 남는다. 그 백 냥이 순수익은 아니다.
와룡장에 있는 제자들과 일꾼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데 매달 오십 냥이 소요된다. 아끼고 아끼면 한 달에 오십 냥을 손에 쥘 수 있다. 최소 이 년은 모아야 천 냥을 만들 수가 있다는 소리다.
엄청난 금액 앞에서 백미주는 이성을 잃었다.
“말해 봐! 천 냥을 어디서 마련할 거냐고! 너도 네 아비와 똑같은 놈이야!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지! 그러면서 남들을 위하는 척! 착한 척! 정작 제 혈육은 녹림에 잡혀갈 때까지 방치해 두고서! 지긋지긋한 연가 놈들 같으니! 너희들 때문에 내가 제명대로 못 살아! 못 산다고!”
연무백은 답답해 미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지금 저 말은 어머니의 본심이 아닐 것이다. 분노해서 나오는 대로 쏟아 내고 있을 뿐이다. 알면서도 어머니의 말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박혔다.
***
낙양.
의천문.
이른 아침부터 의천문의 객청은 외부 손님들로 가득했다. 자식들이 직접 쓴 ‘살려 달라’는 편지를 읽은 낙양오협의 부모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와룡장의 여주인인 백미주와 와룡검객 연무백도 있었다.
그런데 평소 고개 빳빳하게 들고 다니던 백미주가 웬일로 조용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돈 때문이다.
낙양오협의 가문들은 체면과 자식의 미래를 위해 오봉산채의 협박을 외부에 알리지 못했다. 그건 백미주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막 뻗어 나가는 와룡장을 위해서라도 그 일은 조용히 처리해야 했다.
팔선문, 대연문, 칠양문, 의천문 등은 금액이 적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와룡장은 달랐다.
백미주는 자그마치 천 냥이나 되는 돈을 바로 마련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아야 했다.
바로 그때, 고맙게도 이연익이 자청해서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면 모든 일에 눈치가 보인다.
여장부 백미주가 소금에 절인 채소처럼 축 늘어진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험.”
의천문 문주 이연익이 나타나 헛기침을 터뜨리자 술렁거리던 객청은 이내 잠잠해졌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이유로 이 자리에 모였소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오봉산채의 도적들을 때려잡고 싶으나……. 사람을 살리는 일이 먼저니 참읍시다. 복수는 인질들을 구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낙양오협의 가족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 역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임에 동의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가족의 생명이 달린 일인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봉산에 가는 인원은 각 가문당 한 명으로 제한했으면 하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있고, 우리 쪽의 숫자가 많으면 도적들이 놀라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다른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오.”
“그게 좋겠습니다.”
“맞습니다. 토벌할 게 아니라면 그래야 합니다.”
다들 이연익의 의견에 동의했다.
지금은 체면이나 자존심보다 자식들의 생명을 구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