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86
586회. 원양(原陽)과 목(木)
‘생주이 멸진(生住異滅陳)’은 초요산이 복원에 성공한 상고(上古)의 진법이다.
진법에 빠지면 그 사람이 경험한 최악의 공포가 생성되고[生], 자리를 잡은 뒤[住], 극단적으로 변하다가[異], 최후에 그와 함께 공멸하는[滅] 네 가지 단계를 거친다.
그걸 그대로 두었다가는 참가자를 모두 죽여 버리게 되므로 초요산은 진법의 구 할(90%)을 봉인했다.
일 할의 위력이라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비승과해’ 참가자 개개인의 경지에 따라 심할 경우 목숨을 잃는 일도 많았다.
연적하 일행 중에 가장 처음 걸려든 사람은 공지유다.
그녀는 왜 적안금저가 이곳에 나타났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적안금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죽음의 공포도 컸지만 적안금저를 향한 분노도 그 못지않은 까닭이다.
그녀는 자신이 납치당하던 지난겨울의 악몽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죽여 버릴 거야!”
연적하는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공지유의 팔을 잡아챘다.
그러자 이번에는 뒤에 있던 요범이 석종을 휘두르며 숲으로 뛰어들었다.
“으아아아!”
눈 깜짝할 사이에 요범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초요산이라는 노신선의 말이 떠올랐다.
-세 번째 진법은 ‘비승과해’ 참가자들을 시험하기 위한 것으로 ‘생주이멸진’이라 한다. 조금 전에 네가 지나온 진법이 그것이니라.
‘생주이멸진’이 사람들을 미치게 한 것이 틀림없다.
급히 돌아보니 임정영과 신이승도 이를 갈며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 사생결단을 낼 기세다.
잡지 않으면 분명히 천주봉을 헤매고 다니리라.
연적하는 일단 삼일각에서부터 들고 온 ‘천종(天鍾)’을 땅에 떨궜다.
하지만 바로 손을 뻗지는 못했다.
손은 하나인데 잡아야 할 사람이 둘인 탓이다.
두 번째 도전에 나선 임정영과 삼신봉까지 아득바득 올라온 신이승.
둘 중에 누굴 구해야 한단 말인가.
만약 어느 한 사람과 친분이 있었다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 다 고만고만하다는 데 있다.
불공평하다고 그렇게 욕했는데 자신도 한 사람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연적하가 멈칫한 순간, 임정영이 먼저 튀어 나갔다.
“죽어! 이 개 같은 년아!”
임정영은 욕설과 함께 번개처럼 좌편의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적하는 즉시 신이승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신이승은 공지유처럼 선선히 잡혀 주질 않았다.
그는 연적하의 손을 탁 후려치고 노기 어린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연 형! 말리지 마시오!”
“지금 뭐하려고요?”
“나는 저 마두를 처단해야 하오!”
신이승의 손끝이 숲을 가리켰다.
연적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래도 말로 해서 정리될 상황이 아니다.
그는 즉시 오룡궁의 정신신주(淨神神呪)를 외웠다.
“영보천존안위신형(靈寶天尊 安慰身形)……. 시위신형 급급여율령 (侍卫身形 急急如律令)!”
순간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신이승의 얼굴이 서서히 본래의 색을 찾았다.
눈을 끔뻑거리던 신이승이 황급히 좌우를 살폈다.
“연 형, 혹시 이 앞에 있던 마두가 어디로 갔는지 봤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소?”
연적하는 공지유를 힐끔 보았다.
호흡이 평온한 걸 보니 그녀도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여적하는 잡았던 손을 놓으며 말했다.
“마두는 처음부터 없었어요. 모두 진법이 만든 허상일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손쓸 틈도 없이 숲으로 달려갔어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던 신이승은 뒤늦게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차렸다.
“고맙소. 연 형에게 큰 도움을 받았구려.”
단단하던 신이승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삼신봉에 가장 먼저 오르더니, 아무도 모르는 진법까지 꿰뚫어 본다.
원천성 제일 고수라 자부했건만 자신은 그저 우물 안 개구리였나 보다.
“연 대협, 고마워요.”
공지유는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금방 현실을 자각했다.
죽은 적안금저를 이곳에서 또 만났으니 뭐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던 모양이다.
연적하는 땅에 떨어진 천종을 주워 들었다.
“가죠.”
그가 앞장서자 공지유와 신이승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좌우편에 자리를 잡았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진법이 만들어 낸 환청인지, 참가자들의 소리인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연적하는 묵묵히 걸어가며 ‘천종’에 새겨진 글자를 외웠다.
공지유와 신이승도 그를 따라했다.
한참 동안 웅얼웅얼하던 연적하가 천종을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쿠웅-.
“안 해! 도저히 못 해 먹겠네! 썅!”
깜짝 놀란 공지유가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한순간 그녀는 그가 진법의 영향으로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석종을 노려보며 씩씩거리는 그를 보니 왠지 다른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연 대협? 괜찮으세요?”
“아, 예, 너무 안 외워져서 그랬어요. 벌써 한 시진(2시간)이나 지났는데 서른 자도 못 외웠어요. 글자가 일관성이 없어, 일관성이.”
“후훗! 그래도 저보다는 훨씬 나으시네요. 저는 열 글자밖에 없거든요. 신 소협은 몇 글자나 외우셨어요?”
신이승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육십 자를 외웠습니다. 뜻이 통하지 않으니 정말 외우기가 어렵네요.”
연적하가 부러운 눈으로 신이승을 보았다.
보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벌써 육십 자를 외웠을 줄이야!
신이승은 괜히 자기 자랑으로 들릴까 봐 얼른 연적하에게 공을 돌렸다.
“모두 연 형 덕분입니다. 진법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면 열 자도 못 외웠을 겁니다.”
신이승의 말투는 뻣뻣하던 처음과 달리 나긋나긋했다.
함께 다니며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연적하의 뛰어남을 알아서다.
‘천종’을 노려보던 연적하가 공지유에게 물었다.
“공 소저, 외우는 거 잘하죠?”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나랑 바꿀래요? 난 석종(石鐘)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아요. 내 머리로 백 개는 도저히 안 돼요. 열 개만 외우고 석종에서 해방되고 싶어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천종’의 무게가 백 근이나 돼서…….”
그녀가 ‘인종(人種)’을 선택한 것은 열 근에 불과한 무게 때문이다.
잠깐이라면 모를까?
백 근짜리 석종을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내가 들어 줄게요. 대라각(大羅閣)이 보이면 바꿔요. 그럼 되잖아요.”
“그래도 될까요?”
공지유가 연적하와 신이승을 번갈아 보았다.
마음이야 그러고 싶었지만 그게 소요종에 통할지 자신이 없어서다.
그런데 의외로 신이승은 반대하지 않았다.
“괜찮을 겁니다. 소요종에서 참가자들이 석종 선택하는 걸 확인하지도 않았잖습니까? 어차피 뭐라도 하나만 들고 있으면 될 겁니다.”
“신 형 말이 맞아요. 걸리지도 않겠지만, 설사 걸린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어요. 석종을 꼭 자기가 들고 가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으니까.”
녹림 출신이라 그런지 연적하는 그런 쪽으로는 잔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의 말에 공지유도 크게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요종의 신선도 ‘반드시 자기가 들고 가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공지유는 땅바닥에 떨어진 천종을 보았다.
석종 표면에 빽빽하게 새겨진 백 개의 글자를 보니 욕심이 났다.
“연 대협께서 들어 주신다면 바꿀게요.”
그러자 연적하가 희희낙락한 얼굴로 말했다.
“무르기 없어요.”
“네, 소요종에서 만든 석종이니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요.”
“좋아요. 자기 믿음대로 사는 거죠.”
그렇게 연적하와 공지유의 기이한 거래가 성사됐다.
공지유는 ‘천종’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적당한 글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글자를 시작으로 그 자리에서 단숨에 스무 자를 외웠다.
그동안 연적하는 공지유가 들고 있던 ‘인종’의 열 글자를 암기했다.
“좋구나!”
열 글자는 어디에서 시작해도 외우기가 어렵지 않다.
연적하는 개운한 얼굴로 땅에 처박혀 있던 ‘천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다시 산길을 올랐다.
공지유는 연적하의 옆에서 ‘천종’에 새겨진 글자를 부지런히 외웠다.
그 뒤로도 공지유와 신이승은 두 번이나 더 ‘생사이멸진’에 휘말려 들었다.
그럴 때마다 연적하는 ‘정신신주’를 외워 두 사람의 정신을 일깨웠
언제부터인가 공지유는 더 이상 연적하의 어깨 위를 힐끔거리지 않았다.
마침내 ‘천종’에 새겨진 백 글자를 다 외운 것이다.
천주봉 주변의 산등성이가 노을에 붉게 물들어 갔다.
꽤나 아름다운 풍광이지만 세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타들어 갔다.
해가 지기 전까지 대라각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시진(4시간) 가까이 산을 올랐지만 대라각은 보이지도 않았다.
공지유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건 아니겠지요?”
그러자 연적하가 큰소리쳤다.
“아니에요! 갈림길이 없었는데 어떻게 길을 잘못 들 수 있어요?”
“그, 그런가요?”
진법에 휘말려 몇 번이나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이승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금 이상하기는 합니다. 산등성이는 잘 보이는데 중간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네요. 안개가 끼었다면 산등성이도 안 보여야 할 텐데 말입니다.”
“어머, 그러네요. 혹시 우리가 또 이상한 진법에 빠진 건 아닐까요?”
공지유가 연적하를 빤히 보았다.
연적하는 대답하지 않고 인상을 찡그렸다.
아까부터 어째 길이 눈에 익은 느낌이었는데 점점 확신이 들었다.
이건 분명히 가 본 길이다.
문득 초요산이라는 노신선과 만난 일이 떠올랐다.
그 노신선이 있던 곳에 대라각이라고 불릴 만한 전각은 없었다.
‘망했다! 언제 길을 잘못 든 거지?’
한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대라각이 아니라 초요산이라는 노신선의 거처라니!
깜짝 놀란 연적하가 정신없이 좌우를 살피고 있을 때다.
저 앞쪽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또 너로구나.”
초요산은 연적하와 그의 좌우편에 있는 남녀를 슬쩍 둘러보았다.
연적하가 ‘생주이멸진’을 통과해 또 찾아오리라는 건 알았지만 저 둘은 뭔지 모르겠다.
노신선이 나타나자 연적하가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노신선님, 연적합니다. 대라각을 찾아가던 중에 또 이리로 오게 됐네요.”
그러자 공지유와 신이승도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비승과해’의 참가자인 공지유예요.”
“소인은 ‘비승과해’의 참가자인 신이승이라 합니다.”
초요산이 곤혹스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네가 저 둘을 데리고 왔느냐? 아니면 오다가 만난 것이냐?”
오다가 만난 것이라면 저 둘의 영기도 상당한 것이기에 확인이 필요했다.
“아, 일행이라 함께 다니는 중이에요.”
초요산이 눈을 찡그렸다.
말만 들어서는 그가 데리고 온 것인지, 각자의 능력으로 오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초요산은 추도영법(追到處法)으로 새로운 남녀를 살폈다.
두 사람의 영기가 쓸만하다면 모를까?
하품(下品)에도 들지 못한다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돌려보낼 생각이다.
‘헛! 원양(原陽)과 목(木)이로구나!’
남자는 음양에 속한 ‘원양’이고, 여자는 오행의 ‘목’이었다.
원양은 종사도 넘볼 수 있는 상품(上品)인지라 초요산의 숨이 거칠어졌다.
당장 자신만 해도 중품(中品)인 오행의 영기로 현인에 이르렀다.
원양의 영기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종사감이다.
문득 초요산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슬슬 땅거미가 지는 게 일몰 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무궁전의 약초밭에서 대라각까지는 대략 일각(15분)여 거리.
길만 가르쳐 주고 저들만 내려보내려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가자.”
말과 함께 초요산이 손을 흔들자 네 사람의 발아래서 오색의 운무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