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15
615회. 진인께서 이 자리를 원하신다
천주봉.
무궁전.
연적하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무궁전을 보았다.
대망의 첫 방문에서 동기인 신이승과 은소선에게 능멸을 당하고, 두 번째 방문에서는 빈자리가 없어 서각(書閣)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진인이 되어 다시 무궁전 앞에 서니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도 한 기분이다.
무궁전은 ‘천애불문비’ 파괴의 여파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무궁전의 영역으로 들어선 연적하는 때마침 지나가던 사십 대 남자를 불러 세웠다.
“실례할게요.”
부지런히 걸어가던 냉수성 노사는 누군가 말을 걸어오자 멈춰 섰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허리부터 살폈다.
띠가 보이지 않았다.
노사일까?
이십 대 초반에 불과한 생김새를 생각하면 단지 스승을 모신 것도 같다.
“나를 불렀소?”
“혹시 무궁전에 소속된 분이신가요? 뭐 좀 찾아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어디에 있을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아서요.”
“맞소. 나는 무궁전에서 일하는 냉 수성 노사요. 찾는 게 뭔데 그러시오?”
“‘하늘의 문[天門]’과 ‘검령’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서요. 무궁전에 그것들을 설명한 책이 있나요?”
“만류각에 가 보시오. 종문의 역사와 관계된 책들은 대부분 거기에 있으니까.”
“아, 만류각…….”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찾는 게 하필 그곳에 있다니 동기들과 만나라고 하늘이 등을 떠미는 것 같다.
냉수성 노사가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요즘 만류각이 방사와 노사들로 붐빈다는 건 알고 있소? 진인이라면 모를까? 노사들도 줄 서 있으니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게요.”
“진인은 차례를 지키지 않아도 돼요?”
“만류각을 찾는 사람들은 방사와 노사지 않소? 그들 뒤에 진인이 줄을 설 수 있겠소? 당연히 진인은 그냥 안으로 들어가야지.”
“제 말은, 그게 규칙이냐 이거죠.”
“이보시오. 저 하늘에 떠 있는 게 해요? 달이오?”
“해죠?”
“방사와 노사 들 뒤에 진인이 줄을 선다는 것은, 저걸 달이라고 하는 것과 같소.”
“아!”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딘지 난해한 가르침이지만 그 뜻만은 명확하게 와 닿았다.
지위가 높으면 만사형통인 거다.
하기야 약육강식의 구주에서 선착순이라니 그것도 개가 웃을 일이기는 하다.
끝내 궁금했던지 냉수성 노사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귀하는 어디의 뉘시오?”
“연적하 진인입니다. 백운정에 머무르고 있어요.”
“연 진인님,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냉수성 노사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 나이에 벌써 진인이면 장차 소요종을 이끌어 갈 주역이라는 뜻이다. 전도유망한 윗분을 노사처럼 대했으니 이런 불경도 없다.
연적하는 딱히 응대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만류각.
앞마당은 며칠 전과 같이 허리에 띠를 두른 방사들 천지였다.
그들 사이로 간간이 노사가 서 있었다.
방사와 노사의 신분 차이를 생각하면 줄을 서 있는 것도 기특할 정도다.
이제 어느 정도 진인의 위치를 실감하게 된 연적하는 섬돌 위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만류각 안으로 들어서자 창문이 다 열려 있음에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자리는 밖에서 본 것처럼 꽉 차 있었다.
슬쩍 둘러보니 역시나!
창가 옆 바람이 잘 통하는 자리에 낯익은 여자가 보였다.
태을 존자의 제자가 된 동기 은소선이다.
문득 며칠 전 신이승과 함께 자신을 씹어 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격각에 이십오 년이나 된 방사가 있다면서요? 하품(下品)의 영기가 그 정도인데, 그보다 못한 영기라면 생각할 것도 없죠. 그가 소격각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통성명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저도 하루빨리 그에 대한 환상에서 깨시기를 바라요.
그날의 일을 떠올리자 갑자기 불쾌했다.
그때 탁자 뒤에 앉아 있던 석동천 방사가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석동천 방사는 연적하를 금세 기억해 냈다.
소격각의 신입 방사.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다른 건 비교적 선명했다.
소격각의 방사는 그 일의 특성상 어딜 가도 눈에 띄는 까닭이다.
상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그의 눈을 가렸다.
그는 연적하의 허리에 띠가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점잖게 그를 불렀다.
“거기.”
“나요?”
연적하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석동천 방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가 너를 부르지 누굴 불렀겠느냐? 자리가 꽉 찼으니 나가서 줄을 서거라. 다른 사람들은 너보다 못해서 줄을 선 줄 아느냐?”
가벼운 소란에 무경서를 읽고 있던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적하가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거기 방사 아저씨. 내가 누군지나 알고 반말을 하는 거예요?”
“너는 소격각의 방사가 아니냐.”
그러자 연적하는 대답 대신 아무것도 매어져 있지 않은 허리를 툭툭 쳐 보였다.
그제야 석동천 방사는 흠칫 놀란 얼굴로 연적하의 얼굴과 허리를 번갈아 보았다.
분명히 며칠 전까지 흰 띠를 맨 기억이 있는데, 그걸 풀었다니?
방사가 띠를 풀려면 스승을 모시든지, 승급을 해야 한다.
당연히 석동천 방사는 전자라고 생각했다.
신입 방사가 며칠 만에 승급을 할 수는 없으니까.
소격각 출신치고 제대로 풀린 사람이 없는데 운수가 대통한 모양이다.
“그사이 스승을 모신 모양이지? 그렇다고 해도 줄을 서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뒷배가 통하는 사람은 종사와 전주의 제자뿐이다.”
그러자 연적하가 머리를 저었다.
“으응, 아니야. 아저씨, 방사 명부에 연적하라는 이름이 있는지 봐 봐.”
순간 석동천 방사는 짜증이 치밀었지만 순순히 방사 명부를 꺼내 들었다.
아래부터 방사들 이름을 훑었지만 ‘연적하’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입문 삼 년 차 명단까지 확인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소요종의 명부에는 거짓이 없다.
대라각의 각주가 술법으로 소요종 명부를 관리하기 때문이다.
“정말 네 이름이 연적하가 맞느냐?”
“사흘 전에 왔던 기록이 있으니까, 확인해 봐요.”
손가락으로 애꿎은 탁자만 툭툭 치던 석동천 방사는 결국 방명록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서각에서 나가는 사람이 없어 한가하던 참이다.
어느 틈에 짜증은 사라지고 호기심이 그 자리를 채워 나갔다.
“사흘 전이라……. 어디 보자.”
방명록을 뒤적이던 석동천 방사의 손이 멈췄다.
[소격각 방사 연적하.]정말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았다.
그런데 왜 방사의 명부에서 저 이름이 사라진 것일까?
‘설마…….’
석동천 방사가 황망한 눈으로 연적하를 올려다보았다.
“꿀꺽, 승급하셨습니까?”
“그거죠.”
석동천 방사는 깜짝 놀랐지만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몰라뵈어 송구합니다. 하지만 노사가 되셨다고 해도 줄은 서셔야 합니다.”
“으응, 아니라니까. 진인 명부를 봐요.”
“지금 진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석동천 방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진인의 명부로 손을 뻗었다.
펼치자마자 가장 아랫줄부터 확인했다.
없었다.
‘진인은 무슨.’
그는 연적하 노사가 자신에게 자랑 삼아 장난을 쳤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으응’ 하고 떼쓰듯 하는 말투만 봐도 그랬다.
안면이 있다고 그러는 걸까?
석동천 방사의 추측은 어느 정도 맞았다.
연적하가 석동천 방사의 결례를 장난스럽게 받아 주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자신이 소격각의 신입 방사임을 알면서도 친절했던 게 고마워서다.
“저어, 존함이 명부에 없습니다만?”
“아래가 아니면 위를 봐야죠. 위를.”
석동천 방사는 속아 주는 셈치고 진인 명부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 가장 윗줄에 적혀 있는 연적하의 이름 석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연적하 진인. 백운정 천향송실.]난다 긴다 하는 진인들 중에 방 이름까지 기록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한순간 멍했지만 석동천 방사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연적하 방사가 사흘 만에 진인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종문도 그렇지만 소요종의 명부는 조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허리를 꺾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진인을 몰라 뵙고 큰 죄를 지었습니다.”
연적하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석동천 방사의 허리가 펴졌다.
“종문 제자는 허리를 숙이는 게 아니라면서요? 모르면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자리나 하나 내줘요.”
그제야 석동천 방사는 죽다 살아난 얼굴로 조심조심 방명록을 펴서 내밀었다.
“연 진인, 승급을 감축드립니다. 방명록부터 기재해 주시면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연적하는 펼쳐진 방명록에 ‘연적하 진인’이라고만 적었다.
칠각이나 삼전에 속한 게 아니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이름을 적자 석동천 방사가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연적하의 손가락이 한쪽을 가리켰다.
반짝이는 눈으로 손끝을 따라가던 석동천 방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곳은 은소선 방사의 자리였다.
물론 바람이 솔솔 통하는 곳이니 누구라도 탐낼 만도 하다.
하지만 상대는 종사인 태을 존자의 제자.
고작 방사에 불과한 석동천에게는 난처한 주문이 아닐 수 없었다.
“왜요? 방사가 앉아 있어서 안 돼요?”
“그, 그런 건 아닙니다만.”
“뭐가 문젠데요?”
“저곳에 앉아 있는 은소선 방사는 종사인 태을 존자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은소선도 종사 대접을 받아야 해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중에라도 껄끄러운 일이 생길까 봐…….”
“방사 아저씨한테요? 아니면 나한테요?”
“저야 진인께서 시키시는 일이니 따르면 그만입니다만…….”
종사에게 찍혀서 좋을 사람은 없다.
특히나 종사의 권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은 더 그랬다.
“그럼 됐어요. 다른 자리로 보내세요. 진인이면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석동천 방사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방사가 땅이라면 진인은 하늘이다.
그건 설사 은소선 방사가 종사의 제자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종사의 눈 밖에 난다는 게 문제지만, 연 진인이 그런 데 관심이 없다면야 고민거리도 아니다.
석동천 방사는 일단 가장 만만한 방사 하나를 서관에서 내보냈다.
그런 뒤에 창가 자리에서 무경서를 읽고 있는 은소선 방사에게 다가갔다.
“은 방사.”
“네?”
“미안한데 자리를 내주어야겠다.”
“예? 왜요?”
예상치 못한 소리에 은소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진인께서 이 자리를 원하신다.”
순간 은소선은 얼굴을 찌푸렸다.
종사의 제자라고 해서 무상의 권위를 갖는 건 아니다.
비록 자신이 종사의 제자이지만 진인의 뜻을 거스를 순 없었다.
입술을 물어뜯던 은소선이 물었다.
“다른 자리는 있나요? 설마 이대로 나가라는 건 아니겠죠?”
“입구에 자리 하나를 비워 두었다. 그리로 가도록 해라.”
사람들이 드나드는 입구 자리란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은소선은 무경서를 주섬주섬 집어 들고 일어섰다.
‘하아! 그래도 요즘 같은 때에 밖으로 내몰리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입구로 가다 보니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경서를 펼치는데, 불현듯 그 진인이라는 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이름을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이름이야 나갈 때 방명록에서 확인하면 그만이다. 그와는 별개로 그 뻔뻔한 얼굴을 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서각 중간에 줄지어 세워진 책꽂이들로 인해 창가 자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은소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경서를 찾는 척 부산을 떨어야 했다.
‘응? 진인이라더니’
저 얼굴은 소격각의 연적하 방사였다.
‘미친!’
연적하 방사가 빈자리인 줄 알고 잠시 앉았거나, 그의 속임수에 자신이 당한 것이리라.
책꽂이 뒤에서 씩씩거리던 은소선은 창가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의 자리에 연적하가 앉아서는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