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16
616회. 선배님들! 왜 구경만 하십니까!
소요종 종사 태을 존자의 제자인 은소선 방사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재능은 단지 상급의 영기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연적하에게 일직선으로 걸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각 내부를 살폈다.
일단 서각(書閣) 내부에는 진인이라 여겨질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책꽂이 앞에 서 있는 사람들과 빈 자리의 숫자가 모두 맞아떨어졌다.
연적하 외에 새로이 서각에 들어온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연적하, 소격각의 방사 주제에 동기라고 감히 나를 능멸하다니.’
은소선은 연적하가 우연히 자신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거짓말로 자신을 속여 자리를 빼앗은 것이다.
연적하를 본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웠다.
그녀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만류각의 방사가 왜 그의 거짓말에 휘둘렸을까?’ 따져 보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일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적하와 진인 사이의 간극(間隙)은 너무도 컸다.
당연히 그녀는 합리적인 확인 절차를 생략하고 곧바로 연적하에게 쳐들어갔다.
하지만 막상 연적하 앞에 섰지만 은소선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방사가 방사의 자리를 빼앗은 건 죄가 아니다.
오히려 사실 확인 없이 허둥지둥 자리를 내준 사람의 잘못이다.
‘이 뻔뻔한 놈.’
당장 사지를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그의 무위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다.
영기의 질이 형편없어 소격각으로 갔지만 무위 하나만큼은 경이롭다고 하던가.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연적하. 소격각에서 뒹굴더니 하는 짓도 구질구질하구나. 내 자리를 차지하려고 진인을 사칭한 거냐?”
단순히 자리를 빼앗긴 것과 방사가 진인을 사칭한 것은 급이 다르다.
그녀는 연적하가 진인을 사칭한 것으로 몰아갔다.
만약 그가 그런 게 아니라면 아니라고 할 테니 손해 볼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연적하는 책에 정신이 팔렸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놈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리를 얻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독서삼매경이란 말인가!
설사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해도 이 정도 소란이면 정신을 차려야 정상이다.
노기가 치밀어 오른 은소선은 소리를 빽 내질렀다.
“연적하! 네가 내 자리를 빼앗기 위해 진인을 사칭한 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던 서각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방사와 노사 들의 시선이 일제히 은소선을 향했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가볍게 혀를 찼지만 그게 전부였다.
무궁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종사의 제자가, 눈에 띄게 아름답기까지 하니 당연하다.
그러니 그녀가 갓 입문한 방사라는 걸 알아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옆에서 은소선이 난리를 치는데도 연적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소란을 즐기는 듯한 얼굴이다.
‘그래, 너는 짖어라. 나는 책을 읽을게.’
그의 눈은 ‘구주종문통사(九州宗門通史)’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의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책에는 종문의 모든 게 담겨 있었다.
종문의 창시 배경과 과정, 그리고 천문(天門)과 신비지경, 검령 등.
이 한 권만 읽어도 종문에 대해 다 알 것 같았다.
옆에서 꺅꺅대는 은소선은 그것대로 즐거움이 있었다.
감정에 휘둘릴수록 본색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연적하는 그녀의 밑바닥까지 확인하고,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줄 요량이었다.
소란이 일자 석동천 방사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은소선 방사에게 연적하가 진인이라는 것을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다.
그가 막 움직이려는데 연적하 진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은소선과 정리할 일이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둬요.
우두커니 서서 눈을 끔뻑이던 석동천 방사는 슬며시 주저앉았다.
‘하기야 뭔가 있으니 그 자리를 내달라고 했겠지.’
만인이 이용하는 서각에서 무슨 자리다툼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어찌 되려나…….’
하나는 종사의 제자고, 다른 하나는 소요종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진인이다.
‘묘하군. 묘해.’
자존심을 건 저 치열한 자리다툼에서 누가 승리할까?
종사의 제자인 은소선 방사일까?
아니면 진인 명부의 첫 줄에 이름을 올린 연적하 진인일까?
그가 속으로 승패를 예측하고 있을 때 서각에 있던 노사 하나가 다가왔다.
“서각의 관리자가 구경만 하고 있을 셈인가?”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상대가 태을 존자님의 제자인지라…….”
“누가 그쪽에 뭐라고 했나? 반대쪽이라도 손을 써야지. 진인을 사칭했다 어쨌다 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사칭이라니요. 종문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대라각에서 직접 관리하는 명부가 있는데.”
그러자 노사가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었다.
“사칭이 아니라고? 그럼 저 남자가……”
“확인했습니다. 진인 맞습니다. 그것도 가장 윗줄에 계신 분입니다.”
“헙.”
다시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노사는 행여나 진인에게 찍히기라도 할까 봐 어깨를 움츠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석동천 방사가 속으로 ‘쯧쯧!’ 하고 혀를 찰 때다.
이번에는 한 남자가 마치 제집에 온 것처럼 위풍당당하게 들어왔다.
무궁전 전주의 제자인 신이승 방사였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석동천 방사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어서 오게.”
“자리 있죠?”
“만들 수는 있네만…….”
석동천 방사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평소 신이승의 자리는 은소선의 옆이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서는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가 벌어지고 있었다.
석동천 방사는 전주의 제자인 신이승을 그런 곳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그때 다시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연적하! 귀가 먹었느냐! 이제 와 모른 척한다고 네 죄가 덮어질 것 같으냐!”
신이승의 고개가 소리를 따라 획 돌아갔다.
뜻밖에도 은소선이 연적하에게 따지고 드는 모양새다?
신이승의 낯빛이 굳어지자 석동천 방사는 급히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주려 했다.
행여나 그가 은소선처럼 연적하에게 불경스러운 짓을 할까 봐 걱정이 돼서다.
하지만 석동천 방사보다 신이승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석동천 방사가 만류하기도 전에 창가 자리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펄펄 뛰고 있던 은소선과 합류했다.
“사매, 무슨 일이냐?”
기다렸다는 듯 은소선이 그간의 일을 고해바쳤다.
“연적하가 진인을 사칭해서 제 자리를 빼앗았지 뭐예요. 그 일을 두고 나무라는데, 들은 체도 하지 않네요. 뭐 이런 작자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형은 무궁전 사람이잖아요? 뭐라고 좀 해 봐요.”
“진인을 사칭해서 네 자리를 빼앗았다고?”
“그랬다니까요. 조금 전에 진인이 제 자리를 원한다고 해서 비켜 줬더니, 글쎄 저자가 와서 떡하니 앉더라고요. 물론 진인은 어디에도 없고요. 사형도 보세요. 서각 안에 진인이 있는지 없는지.”
신이승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서각을 둘러보았다.
과연 은소선의 말대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설사 진인이 있었다 해도 이 정도 소란이면 이미 모습을 드러냈어야 정상이다.
결국 은소선의 말대로 연적하가 그녀를 속였던 모양이다.
그는 자못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연 형. 은 사매의 말이 사실이오?”
그러나 연적하는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신이승은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함께 ‘비승과해’를 통과하면서 본 연적하는 다소 경박하지만 정신은 바로 박힌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냥 미친놈 같았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해도 그렇지. 뜬금없이 귀머거리 행세라니?
“연 형. 나는 지금까지 연 형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존중했는데,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요?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시오?”
“…….”
그래도 연적하는 묵묵부답이었다.
표정에 한 치의 변화도 없는 걸 보면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다.
참다못한 신이승은 작정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연적하! 네 무위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이곳은 무궁전이다. 소격각의 방사 따위가 무궁전에서 진인을 사칭하고도 무사할 줄로 생각했더냐!”
내기를 실은 그의 음성에 만류각의 창문이 찌르르 울렸다.
대놓고 내지른 그의 외침에 방사와 노사 들은 읽던 책을 덮었다.
다들 ‘이젠 더 이상 유야무야 넘어갈 상황이 아니다’라고 생각한 얼굴들이다.
그런 광풍 속에서도 연적하는 터럭만큼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자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신이승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쾅!
갑작스러운 소리에 사람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제야 연적하는 고개를 살짝 틀어 신이승을 올려다보았다.
“신이승?”
그 소란은 어쩌고 마치 지금에야 알았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이다.
신이승은 그의 뻔뻔한 태도에 이를 갈았다.
그 바람에 자신을 부르는 그의 호칭이 변했다는 걸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아니, 설사 알았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게다.
그에게 연적하는 더 이상 동기나 지인이 아니었으니까.
“이제야 귀가 열린 거요? 하지만 이미 늦었소. 나는 무궁전의 일원으로 당신의 죄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오.”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던 은소선도 한마디 거들었다.
“흥! 설마 진인을 사칭한 적이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 내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 발뺌해도 소용없다. 연적하! 네 죄를 자백해라!”
때마침 만류각의 소란을 전해 듣고 무궁전의 노사와 진인 들이 몰려왔다.
그들을 발견한 신이승이 목소리를 높였다.
“연적하! 너는 소격각의 방사이면서 감히 진인을 사칭했다! 그 죄를…….”
“지랄.”
연적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이승과 은소선을 마주 보았다.
신이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 상황에서 지랄이란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던가!
소격각의 방사에게 휘둘릴 수 없다고 생각한 신이승은 기어코 출수를 했다.
그는 검을 뽑자마자 양의문의 일검개벽(一劍開闢)으로 연적하를 찔러 갔다.
누가 만류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연적하는 상체를 슬쩍 비틀어 검 끝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신이승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검 끝을 가볍게 붙잡았다.
눈앞에서 신이승이 제압당할 위기에 처하자 은소선도 검을 뽑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쌓인 게 많아서 그런지 처음부터 살수를 썼다.
비사문의 절기인 추풍귀살(秋風鬼殺)이 연적하를 향해 몰아쳐 갔다.
쉬쉬쉬쉭-.
그러자 연적하는 잡고 있던 검을 추풍귀살의 검기 속으로 떠다밀었다.
차차창-.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악!’ 하고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은소선이 멍한 눈으로 신이승을 보았다.
신이승의 한쪽 어깨에 박혀 있는 것은 자신의 검이었다.
그를 돕겠다고 나섰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연적하! 너, 너…….”
채 말을 잇지도 못하는 은소선 앞에 유령처럼 연적하가 나타났다.
철썩!
찰진 소리와 함께 은소선이 뒤로 나뒹굴었다.
어찌나 호되게 맞았던지 그녀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곧이어 몸을 돌린 연적하는 신이승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놀란 신이승은 도움을 바라듯 진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진인들보다 연적하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신이승의 귀싸대기를 연속으로 후려쳤다.
쩍! 쩍! 쩍! 쩍! 쿠당탕-!
맞으며 뒷걸음질 치던 신이승이 기어코 의자에 걸려 뒤로 나뒹굴었다.
축 늘어진 은소선과 달리 신이승은 벌떡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으아아아악!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무궁전의 선배님들! 왜 구경만 하십니까! 무공만 믿고 설치는 저놈을 제압하셔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