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17
616회. 대변혁의 시기
애초에 신이승이 무리인 줄 알면서도 연적하를 공격한 것은 진인들을 믿어서였다.
지금까지 노사와 진인 들은 방사에 불과한 자신에게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무궁전의 고수들은 무궁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전주의 제자인 자신과 연적하가 싸운다면 개입해야 마땅하다.
자신에 대한 배려는 물론, 서각의 관리 차원에서라도 진인들은 연적하를 제지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이 얻어터져 피를 줄줄 흘리는데도 진인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엎어져 있는 은소선의 뒷모습을 보니 ‘울컥’ 하고 뭔가 치밀어 올랐다.
“뭣들 하시냐고요! 저기 쓰러져 있는 은소선은 종사이신 태을 존자님의 제자란 말입니다!”
신이승은 은근슬쩍 은소선의 정체까지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진인들은 나서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꼬리를 흔들더니 정작 종사와 전주의 제자가 당했는데 구경만 하다니?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인지 모르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연적하가 주먹을 쓰다듬으며 다시 신이승에게 다가갔다.
신이승이 흠칫 놀란 얼굴로 뒷걸음질 칠 때다.
무궁전의 진인들 중에서 무학산 진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연 진인. 신 방사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가 연 진인께 방자한 말을 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러자 연적하가 아쉬운 얼굴로 돌아섰다.
눈치를 보아하니 신이승과 은소선이 모르고 한 짓이라는 게 알려진 모양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자니 왠지 아쉬웠다.
“무릎 꿇고 죄를 빈다면 고려해 볼게요.”
말과 함께 연적하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무학산 진인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신이승과 은소선을 번갈아 보았다.
종사와 전주의 제자가 무릎까지 꿇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연적하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사죄 없이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감사합니다.”
무학산 진인은 일단 감사를 표한 후에 신이승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이승이 황망한 얼굴로 말했다.
“진인, 저놈에게 속지 마십시오. 저놈은 진인이 아니라 저와 함께 입문한 방사입니다. 방사라고요!”
“닥치지 못할까!”
무학산 진인의 호통으로 어수선할 즈음 은소선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은소선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무궁전의 진인들을 보았지만 신이승처럼 날뛰지는 않았다.
무학산 진인이 말을 이어 갔다.
“소요종의 명부는 종사들께서 만드신 법보다. 그것을 대라각의 각주이신 주역봉 노조께서 법력으로 관리하시니 잘못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명부의 첫 줄에 연 진인의 존함이 기재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너희의 오해로 연 진인께 무례했다면, 사죄를 청해라.”
“…….”
신이승과 은소선이 불신의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입문한 지 고작 이레 만에 진인이라니?
상급의 영기를 가진 자신들도 하지 못한 걸 하급에도 들지 못한 연적하가 했다고?
두 사람이 빤히 보기만 하자 연적하가 팔을 걷어붙였다.
순간 은소선이 먼저 머리를 숙였다.
“연 사형, 우둔한 사매가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죄를 지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은소선은 진인을 인정하는 걸 뛰어넘어 그를 다시 사형이라고 불렀다.
“나 사형 아니다. 다시 그 입에서 사형 소리가 나오면 입을 찢어 버릴 거야.”
“…….”
은소선은 입술을 깨물며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순한 첫인상과 달리 오늘은 어째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인다.
바로 태세 변화를 한 은소선과 달리 신이승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망설이는 그에게 연적하가 다가갔다.
보다 못한 무학산 진인이 다급히 한마디 했다.
“신이승! 초요산 제군님의 제자인 네가 소요종의 위계질서를 어지럽힐 생각이냐!”
그제야 신이승의 입이 열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뭐라고? 잘 안 들려?”
연적하의 채근에 신이승이 이를 악물고 답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뭘 용서해?”
“제가 진인께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초요산 제군 때문에라도 이쯤에서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연적하는 그러지 않았다. 신이승의 표정에 억울함과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다.
“방사 놈이 진인에게 욕을 하고서 결례라고? 이 자식이 누굴 바보로 아나!”
말과 함께 연적하가 신이승의 가슴을 걷어찼다.
전광석화 같은 발놀림에 멍하니 서 있던 신이승이 뒤로 나뒹굴었다.
쿠당탕-.
이윽고 넘어진 의자 사이에서 신이승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연적하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도 헛소리를 하면 양팔을 부러뜨릴 거야. 그다음에는 양다리. 무슨 말인지 알지?”
신이승은 은소선과 무궁전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버티었다가는 그야말로 회복하기 어려운 자존심의 상처를 입게 될 터였다.
결국 그는 수치스럽지만 굴복을 택했다.
“무궁전의 신이승이 연 진인을 몰라뵙고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연적하는 가타부타 말없이 창가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주종문통사(九州宗門通史)’를 펼쳐 읽었다.
기이한 적막이 서각을 휘감았다.
우두커니 서 있던 은소선은 연적하를 힐끔 보고는 서각을 떠났다.
무학산 진인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 신이승에게 다가갔다.
“따라오거라.”
그 한마디 말을 하고 무학산 진인은 돌아섰다.
그와 함께 왔던 진인과 노사 들이 썰물처럼 조용히 서각을 빠져나갔다.
***
그날 저녁.
저녁 식사를 마친 은소선은 부랴부랴 스승의 거처인 소요정을 방문했다.
무경서를 집필하고 있던 태을 존자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혹시 스승님도 들으셨나요?”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제자가 오늘 무궁전에서 당한 일 말이에요. 알고 계신가 해서요.”
“네가 연적하에게 뺨을 맞은 일이라면 알고 있다. 어디 한두 사람이 봤어야지.”
“그래서 말씀인데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방사가 진인에게 맞은 일을 묻는다면 가능하지. 네가 운이 좋았다. 그 정도로 끝났으니. 함께 있던 신이승은 제법 맞았다지?”
“저어, 그보다 방사가 이레 만에 진인이 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요.”
태을 존자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
“방사가 이레 만에 진인이 될 수 있느냐고? 종문의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
“가능하기는 하고요?”
“‘천애불문비’는 종문과 역사를 함께해 온 성물이다. 그것이 부서진다고 누가 생각했겠느냐?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천애불문비’가 부서졌다.”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불가능이라 말할 수 없다는 거다.”
“하지만 그가 가진 영기의 질을 생각하면…….”
문득 태을 존자가 말을 살짝 돌렸다.
“아직 외부에 널리 알려진 일은 아니다만, 너도 알아 두거라. 아홉 종문의 성물이 한날한시에 부서졌느니라.”
“헉! 다른 종문의 성물도 사라졌다는 말씀이세요?”
“그러하다. 지금은 ‘대변혁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연적하의 일도 그중 하나겠지. 이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설마 창조신께서 ‘하늘의 문’을 막으시려고…….”
“섣불리 넘겨짚지 마라. 그런 뜻이었다면 천문(天門)을 거두어 가셨어야지.”
“아…….”
은소선은 스승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천문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해서 천문과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까?
지금 당장이야 그렇겠지만, 성물이 사라졌으니 종사가 되는 길은 더욱 어려워졌다.
태을 존자와 세 명의 제군이 사라지면, 그 뒤를 이을 사람이 나오기나 할까?
성물이 없으니 뒷세대는 점점 불확실해질 게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 제군의 위에 오르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겠지…….’
종사는커녕 제군도 나오기 어렵게 된다면, 종문은 더 이상 종문이 아니게 된다.
그런 은소선의 생각을 알았는지 태을 존자가 말했다.
“비록 ‘천애불문비’는 사라졌지만 종사의 길은 열려 있다. 나와 제군 들이 무경서를 남기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전에 불문(不文)으로 그 길을 갔다면, 이후로는 성문(成文)으로 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아…….”
은소선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앞으로는 무경서가 종사의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는 말이었다.
“‘천애불문비’ 없이 무경서만으로 가능할까요?”
‘천애불문비’의 혜택을 못 보게 된 은소선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러니 영기의 질이 더욱 중요하지. 간접적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하니까.”
“하지만 연적하 진인은…….”
“그래서 상상도 하지 못할 ‘대변혁의 시대’라고 한 게다. 누가 무슨 성취를 이룰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으니. 하지만 연 진인의 경우가 특별한 게다. 영기의 질은 오히려 더욱 중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대체 연 진인은 어떻게 진인이 된 걸까요? 그리고 그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내일 그를 만나 볼 작정이다. 만나 보면 알겠지. 어떻게 진인이 됐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그를 제자로 받으실 생각은 없으세요?”
사매의 자리를 스스로 걷어찬 은소선은 그렇게라도 그와 연결되고 싶었다.
“늦었다.”
“늦어요?”
“며칠 전에 무상각의 진인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하는구나.”
“…….”
은소선은 슬쩍 스승의 안색을 살폈다.
영기를 중시하는 스승이 그것까지 알아본 것을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한동안 스승의 눈치를 보던 그녀는 슬그머니 소요정을 떠났다.
***
같은 시간 무궁전.
은소선이 태을 존자를 찾아갔다면, 신이승은 스승인 초요산 제군의 부름을 받았다.
울긋불긋한 신이승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초요산 제군이 혀를 찼다.
“쯧쯧!”
신이승은 손으로 이마를 짚어 엉망이 된 얼굴을 살짝 가렸다.
“송구합니다.”
“연적하의 성취를 알고도 너에게 귀띔해 주지 않은 나의 잘못이다.”
초요산 제군이 씁쓰름한 눈빛으로 신이승을 보았다.
느지막이 거둔 제자가 연적하와 원수처럼 지내고 있었을 줄이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신이승을 보고 있으려니 안타까우면서도 화가 났다.
“그래서 이제는 어쩔 생각이더냐?”
“무슨 말씀이신지…….”
“연적하와 어떻게 지낼 거냐는 말이다. 그와는 입문 동기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동기의 정리를 회복할 것이냐? 아니면…….”
초요산 제군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고개를 힐끔 들어 스승의 안색을 살피던 신이승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힘으로 제자에게 굴종을 강요했으니 이제는 동기라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 저는 당한 만큼 그에게 돌려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벌써 진인이다. 네가 그의 성취를 따라 잡을 수 있겠느냐?”
“…….”
신이승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복수의 마음만 앞설 뿐 현실은 반대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귓가로 초요산 제군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아느냐? ‘천애불문비’가 부서지던 날, 다른 종문의 성물도 같이 부서졌다. 아홉 종문의 성물이 한날한시에 파괴된 것이다.”
“…….”
깜짝 놀란 신이승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초요산 제군을 보았다.
“이를 두고 태을 존자께서는 ‘대변혁의 시기’라고 하셨다. 성물의 파괴는 구주(九州)가 뒤집힐 일이지. 한편으로 대변혁은 질서나 규칙 따위와 반대되는 말이다. 마치 연적하가 소격각의 방사에서 단숨에 진인이 되었듯. 너는 어떠냐? 지금처럼 소요종의 질서와 규칙에 따르겠느냐?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뒤집어 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