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25
625회. 빙설화, ‘구주(九州)의 종사’
영천주.
몽천성 양태현.
깊은 밤.
왕옥산에서 멀지 않은 야트막한 산중턱에 백팔십여 줄기의 유성이 떨어졌다.
비경에 들어가려고 온 천지종의 고수들이다.
천수각의 각주인 곡분조 노조가 형형한 눈으로 진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일 새벽에 비경이 열릴 것이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을 잊지 마라. 검령을 얻고, 소요종과 만나면 반드시 죽여라. 이번 비경에서 소요종의 허리를 끊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백팔십여 명의 진인들이 우렁차게 답했지만 소리는 외부로 흘러 나가지 않았다.
곡분조 노조는 몇 가지 주의를 준 후에 진인들에게 휴식을 명했다.
진인들이 주변으로 흩어지자 곡분조 노조는 행낭을 들고 정상으로 향했다.
산 정상의 바위에는 두 노인이 달빛을 받으며 바위에 앉아 있었다.
곡분조 노조의 손이 행낭으로 들어갔다.
술 한 병과 잔 두 개, 그리고 한 줌의 육포가 바위 위로 올라왔다.
“여독을 푸시라고 ‘금령선과주’와 ‘천년금오’의 고기를 준비했습니다.”
“자네도 앉지.”
진명 제군이 웃으며 자리를 권하자 곡분조 노조가 황송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두 분 제군님의 흥취를 깰 수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편히 쉬십시오.”
곡분조 노조가 사양하자 진명 제군은 더 권하지 않았다.
이윽고 곡분조 노조는 두 제군을 향해 묵례를 올린 뒤에 조심스럽게 물러갔다.
진명 제군이 빈잔에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번 일은 종사께서 조금 서두르는 게 아닌가 싶소. 아홉 종문들의 성물이 사라진 이유를 알아내는 게 우선인 것 같은데…….”
그러자 일성 제군이 답했다.
“성물이 사라진 이유를 누가 알겠소. 만 년이 지난다 해도 알아내지 못할 게요. 세월만 보내다 소요종이 절치부심하여 전세가 역전되면 그것도 낭패가 아니오? 그나저나 종사께서 소요종을 병탄(倂呑)하기로 한 배경에 진명 제군의 제자가 있다는데, 사실이오?”
일성 제군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진명 제군을 응시했다.
진명 제군은 대답 대신에 술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보였다.
건배를 하자는 뜻이다.
일성 제군이 잔을 들어 진명 제군의 잔에 마주쳐 갔다.
진명 제군은 한 모금의 술을 마신 뒤에 일성 제군에게 되물었다.
“일성 제군도 나의 제자에 대해 알고 싶소?”
“허허! 이를 말이오? 오늘날 천지종에서 빙설화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빙설화가 건곤벽(乾坤碧)의 모든 비밀을 풀고, 영기까지 흡수했다’는 소문까지 돌더이다. 얼굴 한번 드러낸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한 소문치고 너무 지나치지 않소?”
“혹여 그 소문의 진원지가 ‘염화전(枯花殿)’이라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오해외다.”
염화전은 진명 제군이 다스리는 곳이다.
진명 제군은 그 소문이 자신과 무관함을 거듭 말했다.
“건곤벽과 관계된 소문으로 염화전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게요.”
진명 제군이 정색을 하자 일성 제군은 너털웃음으로 무마했다.
“허헛! 나도 그 소문이 염화전과 무관함을 알고 있소. 빙설화를 꼭꼭 감추는 염화전에서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벌이겠소. 다만 빙설화에 대한 소문이 천지종을 뒤흔들어서 해 본 말이외다.”
일성 제군도 알고 있었다.
빙설화와 건곤벽의 소문이 난 것은, 건곤벽이 보여 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 탓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면사녀가 건곤벽 앞에서 명상을 할 때, 건곤벽에서 광휘(光輝)가 뻗어 나와 면사녀를 덮었다고 한다.
어쩌다 한 번이면 본 사람의 착각이랄 수도 있다.
하지만 세 번이나 그런 일이 반복되자 천지종이 발칵 뒤집혔다.
그 뒤로 면사녀는 건곤벽을 찾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천지종 제자들이 사라진 면사녀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어디에 숨었는지 소문만 무성했지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천지종이 면사녀와 건곤벽의 일로 어수선해지자 종사인 추회 존자(追悔尊者)가 진위 파악을 위해 나섰다.
그제야 마지못해 진명 제군이 면사녀가 자신의 제자 빙설화임을 밝혔다.
그날의 일을 회상하던 일성 제군은 천년금오의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일전에 종사를 만나 여쭌 적이 있소. 빙설화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냐고. 종사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시오?”
“뭐라고 하시더이까?”
“그대와 나는 신격을 얻기 전까지 장수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빙설화는 이미 천인(天人)이다.”
“…….”
일성 제군의 말을 듣고도 진명 제군은 놀라지 않았다.
빙설화를 알게 된 뒤로 어지간한 일에는 면역이 생긴 까닭이다.
“진명 제군의 표정을 보니 알고 있었나 보오?”
“내 제자와 건곤벽에 대한 소문은 과장된 게 아니오.”
“허면 정말 건곤벽의 모든 비밀을 풀고 영기까지도 얻었다는 말씀이시오?”
“일성 제군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오. 종사께서는 빙설화를 ‘구주(九州)의 종사’로 만들겠다 하셨소. 그 첫걸음이 소요종이고.”
“허! ‘구주의 종사’라. 모든 종사들의 꿈이 그것이지만, 지난 수십만 년 동안 그 꿈을 이룬 사람은 없지 않소? 추회 존자께서 빙설화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오.”
일성 제군은 마치 추회 존자가 빙설화의 외모에 반한 것처럼 비꼬았다.
하지만 진명 제군은 그런 일성 제군의 태도에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추회 존자는 역대 천지종 종사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추회 존자가 빙설화를 ‘구주의 종사’감으로 인정한 것이다.
지금은 저렇게 삐딱하지만, 막상 빙설화가 검령을 얻으면 그도 자복(惟伏)하고 말 게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다른 어떤 일보다, 성물이 사라진 이유를 아는 게 더 중하다고 보는 사람이오.”
“진명 제군의 말씀에 공감되는 바가 있으나, 그게 어디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오?”
일성 제군은 천년금오의 조각을 질겅질겅 씹었다.
솔직히 그는 그것보다 빙설화가 검령을 얻은 이후의 일이 더 마음에 걸렸다.
‘검령을 얻기도 전에 천인 소리를 들었으니, 검령을 얻으면 신좌(神座)에 오를지도.’
구주의 여덟 종문을 병탄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는 없어지고 만다.
죽을 때까지 ‘구주의 종사’를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
구월 보름.
몽천성 양태현.
왕옥산.
동이 트기도 전.
왕옥산 초입에 천여 명의 진인들이 어검비행으로 날아들었다.
종문의 노조들은 따로 왕옥산 입구로 이동했다.
순식간에 종문의 노조 수십 명이 왕옥산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섰다.
부자격자(검령이 있는 자)가 섞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노조들 중에 몇은 어검비행의 수법으로 산을 빙빙 돌았다.
제자들의 안위가 걸린 일이라 누구 하나 허투루 하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산 중턱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비경이 열렸다!”
순간 아홉 종문의 진인들이 노조들을 지나 빠르게 왕옥산으로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천여 명의 진인들이 사라졌다.
모두가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진인들이 모두 떠나자 노조들도 하나 둘 비경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
신비지경(神祕之境).
연적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왕옥산 협곡의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나가자마자 광활한 사막이 나타났다.
비경이라기에 내심 신비스러운 경치를 상상했는데 사막이라니!
믿고 있던 상대에게 배신당한 느낌이다.
하늘은 또 왜 그렇게 붉은지.
‘화염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열기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흘렀다.
검령이고 나발이고 시원한 물부터 마시고 싶었다.
그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소요종의 진인들은 자연스럽게 네다섯 명씩 무리를 지었다.
두 개의 조가 합쳐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섯 명이 한 조를 이룬 경우도 있었다.
진인들의 그런 모습을 본 연적하는 ‘속으로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래도 ‘원영 구 성’과 ‘십 성’에 이른 진인들의 조에는 변화가 없었다.
비경이 처음인 연적하는 관찰이라도 하듯 차분하게 사방을 살폈다.
주위에 다른 종문의 사람들이 보였지만 어느 종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눈에 보이지만 사막이 넓어 일단 움직이면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의도적으로 찾아다니지 않는 이상 저들과 조우(遭遇)할 일은 없으리
그때 진인들이 하나 둘 행낭에서 신행부(身行符)를 꺼냈다.
영기를 아끼기 위해 경신술이나 어검비행 대신 신행부를 쓰는 것이다.
연적하도 한마관 진인에게 받은 신행부를 꺼내 다리에 붙였다.
준비를 마친 진인들이 조원들과 함께 사막으로 달려 나갔다.
연적하가 막 사막으로 달려가려는데, 은소선 진인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연 진인. 사막을 건너면 고산준령이 나온대요. 검령은 그곳에 있다고 해요. 아무쪼록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요.”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은소선의 배려가 고마웠다.
왕우 진인이 눈인사를 건네고 은소선과 함께 사막으로 들어갔다.
연적하는 왕우 진인과 은소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쁜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
요즘 은소선의 행동을 보면 과거 자신에게 했던 험한 말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가 잠시 그녀와의 인연을 떠올리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혼자 다닐 생각인가?”
돌아보니 무궁전의 목강산 진인이 야릇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요?”
“‘천향송실’을 쓰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방사이던 사람이 ‘천향송실’이라. 뒷배가 좋은 건가? 아니면 실력?”
“궁금하면 덤벼 보시든가.”
연적하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죽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주먹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노회한 목강산 진인은 연적하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검령을 얻은 뒤라면 모를까?
미리부터 힘을 빼고 싶지는 않아서다.
목강산 진인은 피식 웃어 보인 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조원에게 돌아갔다.
“쳇! 좋다가 말았네.”
중얼거리던 연적하는 사막으로 달려 나갔다.
***
“미치겠네.”
바람처럼 달려가던 연적하의 신형이 갑자기 느려졌다.
이윽고 영기를 모두 소진한 신행부가 바짓단 아래로 흘러내렸다.
연적하는 다시 새 신행부를 꺼내 다리에 붙였다.
벌써 열 장 째다.
한 장이 한 시진(2시간) 정도 가니 열 시진이나 달렸다는 소리다.
꼬박 하루를 달린 셈이다.
사막이 넓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이미 눈이 닿는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소요종은커녕 다른 종문 제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신행부를 바꿔 붙이는 잠깐 동안 멈췄다고 또 지면이 들썩거렸다.
죽지 않는다고 하여 불가살이(不可殺伊)라 불리는 괴수가 온 것이다.
비경의 사막에서 가장 흔하게 마주치는 괴수로 지금까지 아홉 마리를 죽였다.
그러니까 신행부 한 장을 갈 때마다 불가살이와 마주친 셈이다.
연적하는 청사(靑蛇)를 꺼내 들었다.
촤아아아-.
모래를 물처럼 가르며 지렁이를 닮은 거대한 원통형의 괴수가 솟구쳤다.
순간 청사에서 서퍼런 진검강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쿠어-!
불가살이가 괴성과 함께 수직으로 이등분되었다.
검붉은 체액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 바싹 말라 있던 모래를 적셨다.
사방에서 모래가 들썩거리는 걸 보니 꽤나 많이 몰려온 모양이다.
연적하는 신행부에 경신술까지 동원해 빠르게 장내를 벗어났다.
반 시진(1시간)쯤 정처 없이 달리던 연적하가 귀를 쫑끗 세웠다.
멀리서 날붙이 부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막에 들어선 뒤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라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사막에서 누가 이렇게 싸우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