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4
74회. 성의를 보이시오
점심 무렵, 창천대 대주인 척사검 남궁진이 남궁천을 찾아왔다.
“손 방주를 만나고 왔다 들었다. 상행 날짜가 잡힌 게냐?”
남궁진은 남궁천의 사촌형이라 평소에도 사석에서는 말을 놓았다.
“예, 사흘 후에 출발하겠답니다.”
“너는?”
“집안일이니 저도 참가할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남궁진이 창천대의 대주인 지라 남궁천은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렇게 하자. 그나저나 상행 중에 만나는 녹림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남궁진이 애매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바라보았다.
오대세가 사람들은 녹림을 보면 척살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상행의 호위라고 하지만 남궁세가의 창천대인지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남궁세가의 창천대라면 녹림과 타협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상조상방의 호위로 있는 동안은 녹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라도 상방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니까요.”
“그래, 내 생각도 너와 같다. 창천대에 너의 뜻을 전하도록 하마.”
남궁진은 남궁천이 동생이지만 확실하게 소가주 대우를 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감사는 무슨. 아, 참! 연이도 데리고 갈 거냐?”
“아니요. 상방에 남겨 두려고요. 아버지에게서 소식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그게 좋겠다. 숙부님은 꼭 찾아오실 게다.”
남궁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에 있어 남궁벽은 가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가주인 남궁벽은 남궁세가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키워 낸 고수가 남궁벽인 까닭이다.
***
오월.
하남성 평정산.
정오 무렵, 칠십여 명이나 되는 무리가 조심스럽게 평정산 초입으로 접어들었다. 낙양에서 남경으로 가고 있는 상조상방의 상단이다.
오십 대의 행수 손학이 창천대 대주 남궁진에게 다가가 말했다.
“대협, 이곳은 적풍채의 영역입니다.”
“알고 있소.”
남궁진의 말에 손학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건 남궁세가의 고수들에게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그들만큼 녹림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없으니까.
조금 뻘쭘해진 손학은 짐마차에 걸린 깃발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상조상방의 깃발과 남궁세가의 깃발이 나란히 걸려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저 남궁세가의 깃발을 보고도 나설 녹림이 있을까?
상단의 호위무사는 스물하나.
오십여 명에 달하는 상인과 잡부를 생각하면 많은 건 아니다. 평소 이삼십 명에 불과하던 인원이 남궁세가의 호위라니까 이렇게 늘어났다.
긴장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상단이 평정산을 절반 이상 지나갔음에도 적풍채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 숲 속에서 인기척이 있기는 했지만 그뿐이다.
마침내 상단이 평정산을 빠져나갔다.
혼자서 가슴 졸이고 있던 손학은 남궁진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역시 남궁세가입니다. 채주인 염라도부의 욕심이 보통 아닌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네요.”
“…….”
남궁진은 무덤덤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기만 했다.
고작 이만한 일로 좋아하는 행수를 보니 우스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나이 지긋한 상인 몇이 와서 감사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저녁.
상단은 아슬아슬하게 하가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남궁진과 남궁천은 손학이 잡아 준 객점에 짐을 풀자마자 식당으로 나갔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객점 손님들로 식당은 바글거렸다.
그래도 두 사람은 운 좋게 창가 쪽에 금방 난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잉어탕과 야채볶음, 그리고 돼지고기가 나왔다. 객점 손님을 위한 식당인지라 따로 주문할 필요가 없었다.
남궁진과 남궁천은 별말 없이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어느 정도 빈속을 채운 뒤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밀물처럼 몰려왔던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식당은 한가했다. 이것 역시 객점 식당만의 특징이다.
문득 남궁천이 물었다.
“형님도 오봉십걸의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그래. 그들 중에 하나의 무위가 특히 뛰어나다지? 녹림삼존에 버금간다고까지 하던데. 무림인들 허풍이 워낙 심해서 알 수가 있나.”
“그래도 천지상인의 이름까지 오르내리는 걸 보면 영 뜬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천지상인께 직접 들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지. 본래 소문이란 그런 거니까.”
남궁진은 어딘지 못미더워하는 눈치였다.
“내일이면 알 수 있겠지요. 적풍채처럼 꼬리를 내리면 과장된 걸 테고…….”
“허장성세라는 것도 있다.”
“설마요. 남궁세가의 앞에서 허장성세를 부리는 녹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 속은 워낙 알기 어려운 법이라서. 그런 놈이 나오지 말란 법은 없지 않느냐?”
“혹시 형님은 오봉십걸의 실력을 확인하실 생각이십니까?”
사촌형이라고는 하지만 나이 차이가 십 년이나 나서 남궁천은 남궁진의 눈치를 봤다.
잠시 생각하던 남궁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아니냐? 소문만 듣고 고개를 숙일 수는 없으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남궁천은 영 껄끄러운지 말끝을 흐렸다.
소문이란 과장된 것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지 않던가!
남궁진이 조금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머지않아 남궁세가가 상단 호위를 한다는 소문이 퍼질 게다. 우리가 다른 상단 호위들과 똑같이 행동하면 뒤에서 우리를 비웃겠지. 나는 그런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마십쇼. 나중에 우리가 그만둘 때를 위해서라도요.”
“그러마.”
남궁진도 생사결을 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지금이 남궁세가에서 하는 토벌이나 강호행이라면 모를까? 임시로 하고 있는 호위에 그렇게까지 무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상단은 하가촌을 떠났다.
오봉산 초입에 들어서자 손학 행수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오봉산도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 않습니까? 적풍채나 오봉산채나 오십보백보라서요. 여기도 그냥 지나게 되면 은자 이백 냥 이상 남기게 되는데,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남궁천이 손학에게 물었다.
“행수님은 오봉십걸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요? 못 봤습니다. 오봉십걸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아요. 지난해부터 오봉십걸이 뒤로 물러앉았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뒤로 물러앉았다고요?”
“예. 보통 채주들이 뒤에서 구경만 하고 그러는데, 오봉십걸은 단체로 그러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오봉십걸의 얼굴을 본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열 명이나 되니까 기억하기도 힘들지만, 활동 기간이 짧아서 더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요즘은 그냥 상인들이 알아서 통행세를 바치고 다니는 겁니까?”
“그렇죠.”
“헐! 오봉십걸의 소문만 듣고 그렇게 한다는 겁니까?”
“소문이라는 게 그래요. 조금 가라앉았다 싶으면 누군가 슬쩍 찔러 보거든요. 얼마 전에 화양상방이 낙양의 협객들과 함께 오봉산채를 건드렸지 뭡니까? 그랬다가 아주 깨끗하게 박살이 났지요. 앞으로 몇 년간은 또 군말 없이 통행세를 바치면서 다닐 겁니다.”
“오봉십걸에게 당한 게 맞습니까?”
“그럼요. 오봉십걸들의 무위가 뛰어나다는 것만 확인시켜 준 셈이 됐지요.”
“그중에 한 사람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하던데. 그에 대한 소문은 없습니까?”
“나이가 좀 젊은데 무공은 무시무시하다고 하더군요. 한 자루 박도를 쓰는데, 지금까지 그의 일 초를 받아 낸 사람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헐! 일 초를 받아 낸 사람이 없다고요?”
“하하, 적당히 걸러서 들으셔야 합니다. 상단의 호위무사 수준이 그렇지 않습니까.”
손학의 말에 남궁진이 피식 웃었다.
그가 하려던 말을 빼먹지 않고 손학이 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단은 쉬지 않고 이동해 어느덧 산에 깊숙이 들어갔다.
손학의 손가락이 정면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보통은 저쯤에 녹림의 깃발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 한 자루가 날아와 길 가운데 꽂혔다.
퍼억.
창대에 묶여 있는 녹색 천 조각이 펄럭이다 가라앉았다.
손학이 입을 쩍 벌리고 남궁진과 남궁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의 깃발을 보고도 막아서는 녹림이라니!
아무리 남궁세가가 몰락했다고 해도 아직 녹림에 얕보일 정도는 아니다.
그랬다면 저 욕심 많은 적풍채가 숨죽이고 구경만 했을 리가 없다.
‘이건 오봉십걸이 남궁세가를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는 소린데.’
남궁세가가 적당히 숙여 주지 않으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벌렁거렸다.
잠시 후 이십여 명의 도적이 산길을 막아섰다.
최근 들어 더 열심히 산행을 다니고 있는 독심낭인 황요명이 큰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오봉산채의 허락도 없이 산을 넘으려는 건 아니겠지?”
머뭇거리던 손학은 조용히 뒤로 빠졌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려서 남궁세가나 녹림에 찍히고 싶지 않아서다.
남궁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본인은 남궁세가 창천대의 대주 척사검 남궁진이라 하오. 귀하는 누구요?”
황요명이 흠칫 놀란 눈으로 남궁진과 그 뒤에 도열해 있는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고작 현급 고수인 황요명은 남궁세가와 얽힐 일이 없어서 문양도 알지 못했다.
뒤늦게 심장이 철렁했지만 황요명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봉산채에 고수들이 즐비한데 여기서 굽실거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강호에서 독심낭인이라 불리고 있소. 당신들은 정말 남궁세가 사람들이시오?”
남궁진이 실소를 흘리며 답했다.
“그렇소. 죽으려고 환장한 게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남궁세가의 이름을 사칭하고 다니겠소? 그런데 귀하는 오봉십걸과 어떻게 되시오?”
“운이 좋아 오봉십걸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오. 남궁세가의 이름을 앞세워 오봉산채를 무시할 생각이 아니라면, 험, 험, 성의를 보이시오.”
그래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황요명은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던 남궁진이 물었다.
“오봉산채를 무시할 생각은 없소. 그러나 개인적으로 오봉십걸의 무위를 견식해 보고 싶은데. 당신들 중에 오봉십걸이 있소?”
“오봉십걸님들은 산채에서 수련 중이시라 만나려면 우리와 함께 올라가야 하오. 상단이 이곳에서 기다려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소?”
남궁진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손학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산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꼬박 하루를 허비하게 되니 당연하다.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남궁진이 부상을 입으면 남은 상행에도 좋지 않았다.
아쉬운 얼굴로 망설이는 남궁진에게 남궁천이 대안을 제시했다.
“형님, 오늘은 그냥 갔다가 낙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간을 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손학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갈 길이 먼데 이곳에서 힘을 뺄 수는 없으니까요.”
다들 만류하자 남궁진이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독심낭인이라 했소? 오봉십걸에게 전해 주시오. 척사검 남궁진이 돌아가는 길에 들르겠노라고.”
“알겠소. 그건 그렇고 다른 일은 어쩌시려오?”
다른 일이란 통행세를 뜻한다.
남궁진이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쩌긴, 아직은 하던 대로 해 줘야지.”
눈치 빠른 남궁천이 웃으며 나섰다.
“이보시오. 듣자하니 상인 한 사람당 은자 한 냥이라고 하던데 맞소?”
“그렇소.”
“상인이 스물이니 이십 냥을 내면 되는 거요?”
“그러시오.”
황요명은 평소와 달리 상인들의 머릿수도 세지 않았다.
감히 남궁세가 사람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다.
잠시 후 손학이 이십 냥을 내자 오봉산채의 도적들은 조용히 숲으로 돌아갔다.
남궁진이 멍한 얼굴로 숲을 바라보았다.
대남궁세가에 통행세를 받아 가는 도적들을 보니 현실 같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