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5
75회. 좋은 녹림은 죽은 녹림밖에 없다.
하남성 낙양.
다관(茶館) 청사(靑舍).
두 여자가 창가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다. 근 일 년 만에 외출 허락을 받은 와룡장의 연설주와 의천문의 이소민이다.
오랜만의 외출임에도 연설주의 얼굴색은 좋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소민이 물었다.
“연 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하아! 미치겠어요. 곧 강제로 혼인을 하게 될 것 같아요.”
“어머! 혼인을? 누구와?”
“진평상방의 둘째라는데……. 거의 저를 그쪽에 팔아넘기는 분위기예요.”
“팔아넘긴다고?”
“어머니가 상방 쪽으로 인맥을 넓히려고 혈안이 되어 있거든요.”
“아무리…….”
“제가 한사코 싫다고 하는데도 강행하는 중이에요.”
“그렇게 싫으면 차라리…….”
이소민은 슬그머니 말끝을 흐렸다.
지난번에도 그런 식으로 가출했다가 큰 사고를 친 기억이 나서다.
잠시 멍하니 뭔가를 생각하던 연설주가 말했다.
“그런데 정의맹은 이제 어떻게 한다고 해요? 무슨 말 들은 거 없어요?”
“특별한 게 없어. 그냥 당분간 지켜보는 것 같아.”
“하긴 요즘 유명교 법사가 황실을 드나든다니……. 아무리 강호가 관부의 눈치를 안 본다 해도 대놓고 싸우는 건 좀 무리겠죠?”
“그렇지.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 알아?”
“여러 사람이 같은 소리를 하면 그걸 사실로 믿게 된다는 거요?”
“응, 하도 유명교에 대해 좋게들 말하니까 이젠 사람들도 헷갈려 하는 것 같아.”
연설주가 한껏 소리를 낮춰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제물로 쓰잖아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것조차 소문에 불과하니 문제지. 그걸 제외하면 유명교의 교리는 정말 깨끗하거든. 황실에서 초대할 정도면 말 다한 거잖아.”
“그럼 당분간 큰 싸움은 없겠네요?”
“정의맹에서 유명교를 상대로 무림첩은 돌리지 않겠지만……. 협객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원한이 깊은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까.”
“아, 남궁세가 같은 분들요?”
“우리 의천문도 칼을 갈고 있다고. 제자들을 잃고 아버지까지 크게 다쳤으니. 그런 문파가 한둘이 아니잖아.”
“정의맹과 유명교 차원의 싸움만 없다는 거네요?”
“그뿐인 줄 알아? 곳곳에서 기득권 싸움이 일어날 거야. 유명교에 줄을 댄 문파가 한둘이 아니라니까. 와룡장은 어때? 백세상방을 건드리는 문파가 없어?”
“왜 없겠어요. 요즘 오빠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거 같더라고요.”
“그렇게 심해?”
“월하선자에게 찍혔으니 곧 망할 거라고 사파들이 계속 집적대나 봐요.”
이소민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가 몰락한 뒤 사람들은 와룡장도 그렇게 될 거라고 예측했다.
연설주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녹림에 이어 월하선자까지, 와룡장은 왜 이렇게 안 풀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견디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야. 사필귀정이라고 하잖아.”
“좋은 날이 오기 전에 내가 팔려가니까 문제죠.”
“혼인 안 하겠다고 버텨 봐.”
“언니는 집에서 뭐라고 안 해요? 언니는 중매도 많이 들어올 텐데.”
“풋! 나는 할아버지가 한마디 해서 해방됐어.”
“의천검존 님요?”
“응, 그냥 당분간 내버려 두라고 하셔서. 나는 자유야. 하고 싶은 대로 하래.”
물론 의천검존 이의정은 오봉산채의 도적을 염두에 두고 그런 것이다. 이소민은 짚이는 게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내막을 알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게 분명하니까.
“와아! 언니 정말 부러워요.”
“부럽긴.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나는 요즘 어깨가 무거워 잠도 잘 안 와.”
“무슨 책임요?”
주위를 살피던 이소민이 속삭이듯 말했다.
“할아버지는 오봉산의 젊은 도적이 마음에 드시나 봐.”
“헉! 설마?”
이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요? 헙!”
저도 모르게 소리가 커지자 연설주는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연 매만 알고 있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다니까.”
“아니, 왜요? 하고 많은 남자들 두고 하필 그런 도적을!”
분노한 연설주가 파르르 떨었다.
잘나가던 와룡장을 폭삭 망하게 만든 도적이니 당연하다.
와룡장은 지금도 그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빚으로 살고 있다.
“무공이 뛰어나니까 그러시는 거겠지. 하여간 남자들이란 무공밖에 모른다니까.”
“그걸 어떻게 아시고요? 혹시 의천검존께서 오봉산에 가셨었어요?”
“응, 내가 모시고 한번 다녀왔어.”
“그런데도 오봉산채가 멀쩡하다는 건? 설마, 아니죠? 그렇게 뛰어날 리가 있나. 그렇죠?”
“맞아. 할아버지와 싸웠어.”
“싸움이 돼요?”
연설주는 이소민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하의 의천검존이 고작 젊은 산적 나부랭이와 싸움을 했다고?
이소민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나도 그런 싸움은 처음 봤어. 사람이 아냐. 할아버지가 정색을 하시는 거 처음 봤다니까. 뭐, 나중에 할아버지의 어검술 앞에서 달아났지만.”
“어검술 앞에서 달아났다고요? 상처 없이?”
“응. 할아버지도 기가 막힌지 나중에는 그냥 허허 웃으시더라고.”
연설주는 그제야 의천검존이 그놈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검술은 검술의 궁극에 도달한 사람만 펼칠 수 있는 검공이다. 그런 만큼 어검술의 고수 앞에서 달아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의천문의 문주인 군자검 이연익도 어검술에 당해 한쪽 팔을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아무리 그래도 도적은 좀 아니다…….”
“알아보니까 질이 나쁜 도적은 아니래. 그 근방에서는 호걸 소리를 듣고 있나 봐.”
듣고 있던 연설주가 우거지상을 했다.
말하는 걸 보니 이소민은 그 도적에게 약간의 호감을 가진 것 같았다.
“언니, ‘좋은 녹림은 죽은 녹림밖에 없다’는 말 몰라요? 정의맹에서 녹림은 그냥 죽여야 할 적이잖아요.”
“그건 모르는 거야. 공적(公敵)인 유명교와도 공존하고 있잖아. 녹림은 공적도 아니라고. 심지어 파천마군은 맹주님하고 만나기도 한다는데?”
“언니, 파천마군하고 그 도적은 급이 다르잖아요. 녹림의 총채주와 그냥 산적이 어떻게 같아요. 벌써 그놈 편을 드는 거예요? 배상금 내고 풀려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누가 편을 든다니? 그냥 그렇다는 거지. 내가 말했잖아. 어깨가 무겁다고. 내 혼사는 할아버지 변덕 때문에 잠시 보류된 거뿐이야.”
다시 혼사로 주제가 돌아오자 연설주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아! 언니, 나 어쩌면 독립할지도 몰라요.”
“독립?”
“큰 도시로 가면 일자리는 쉽게 구할 수 있잖아요. 상방의 호위무사 일을 하면 되니까. 그러다 보면 강호의 여협이 되는 거고…….”
“어머니에게 말해 보지 그러니? 오빠들처럼 와룡장의 일을 거들게 해 달라고.”
“안 된대요. 와룡장 일은 오빠들만으로도 충분하다네요. 저한테 바라는 건 혼인밖에 없어요.”
“와아! 이럴 때는 진짜 남자들이 부럽다, 그치?”
“그러게 말이에요. 나중에 저 사라졌다고 하면 다른 도시로 간 줄 아세요.”
“어디로 가게?”
“개봉을 생각 중이에요. 그쪽에 사람 구하는 곳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자리 잡으면 나한테는 살짝 연락해. 알았지? 낙양오협의 의리는 지켜야지.”
“그럴게요. 언니도 잘 생각해서 하세요.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지 마시고.”
이소민은 씁쓰름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금은 자신의 마음이 어느 쪽인지도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원해서 따르는 건지, 아니면 정말 호감이 생긴 건지 말이다.
***
보봉현.
오봉산.
오봉산 제일봉 바위 위에 한 청년이 턱을 괴고 앉아 있다.
연적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허공섭물은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정작 이기어검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다.
허공섭물에 성공하면 금방 이기어검이 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건 아니야. 이래서는 답이 없어.”
연적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공섭물만으로는 이기어검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심양각의 스승이라는 사람은 이기어검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연습을 하다 보면 감이라는 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허공섭물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게 된 지금도 어검술은 전혀 아니었다.
석양이 질 때까지 검술을 연마하던 연적하는 터덜터덜 하산했다.
생각 없이 상화각으로 들어섰던 연적하가 멈칫거렸다.
무슨 회의라도 하는 중이었던지 평소와 달리 오봉십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오봉십걸들의 시선이 쏠리자 연적하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 있어요?”
한채연이 발 빠르게 나서서 설명했다.
“큰 오라버니랑 둘째 오라버니가 하산을 할까 생각 중이시래요. 그래서 어쩔까 하고 모인 거예요.”
“에? 형님들이 하산을?”
하소백과 한채연이 그랬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녀들은 하산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채주 풍연초와 부채주 탁고명은 의외였다. 두 사람은 오봉산채의 기둥과도 같아서 하산을 하더라도 가장 마지막이려니 했었다.
탁고명이 풍연초를 대신해서 나섰다.
“큰형님이 요즘 꿈자리가 좀 뒤숭숭하시단다. 자꾸 가족들이 보이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그러기에, 내가 그냥 하산하자고 했다.”
“아! 그럼 가 보셔야죠.”
“그렇지? 내가 말 잘한 거지? 거 봐요, 형님. 연 아우도 가 보라고 하잖수.”
풍연초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하더냐? 채주라는 놈이 아우들보다 먼저 하산하려니 면목이 없어서 그렇지.”
“아주 안 볼 것도 아니고 고향에 잠깐 갔다 오는 건데 뭘 그래요?”
“인마, 언제는 산적이 되고 싶어서 집 떠난 줄 아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어이쿠! 이거 형수님이 붙잡으면 다시 안 돌아오실 기세일세. 정말 그럴 거유?”
“…….”
풍연초는 답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장내가 잠시 조용해졌다.
한참 만에 풍연초가 입을 열었다.
“솔직한 게 좋겠지. 과거의 나였다면 가족들과 먹고살 방법이 없으니 다시 돌아왔을 거야. 하지만 만약, 집사람과 아이들이 아직도 나를 남편으로,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들을 위해 살고 싶다.”
“…….”
오봉십걸들은 남 일 같지가 않은지 먹먹한 표정들이다.
풍연초가 민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십 년도 전에 혼자서 야반도주 한 거라서. 마누라가 재가(再嫁)했을 수도 있고, 애들도 나를 싫어할 거야. 틀림없어.”
그러자 탁고명이 위로하듯 말했다.
“하여튼 누가 뭐래도 나는 형님 곁을 지킬 거요.”
“지키긴 누가 누굴 지킨대? 네놈 앞가림이나 잘해 인마.”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하소백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큰 오라버니와 둘째 오라버니 실력이면 표두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셋째인 마형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하고도 남지. 총표두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게다. 그런데 나는 표국보다는 상방 쪽을 추천하고 싶다.”
“왜요? 괜히 상단 호위로 나섰다가 녹림이랑 얼굴 붉힐 일 있으면 어쩌려고.”
“상방의 일이 상단밖에 없는 줄 아냐? 가족을 생각하면 상방에서 관리하는 기루, 도박장, 객점, 주루 같은 곳이 더 편해. 표국만 해도 돌아다닐 일이 많거든.”
“아! 그런 거구나.”
풍연초가 과장된 몸짓으로 소리쳤다.
“어이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네 그냥. 하여튼 사정이 그렇게 됐으니까 하산한다고 뒤에서 너무 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잘 다녀, 아니, 좋은 시간 되십쇼.”
“오라버니들, 좋은 소식 있기를 기다릴게요.”
오봉십걸들은 풍연초와 탁고명에게 돌아가며 한마디씩 덕담을 건넸다.
다음 날, 풍연초와 탁고명은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산채를 떠났다.
두 사람의 하산으로 오봉십걸들의 마음에 바람이 들었던가 보다.
며칠 지나기도 전에 한채연, 이철산, 하소백이 산을 내려갔다.
여름이 끝날 무렵 산채에는 오봉십걸 중에 마형도, 허임달, 연적하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