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6
76회. 오봉십걸이 인정하는 가문
구월.
보봉현.
오봉산.
오봉산으로 팔십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남경에서 거래를 마치고 낙양으로 돌아가는 상조상방의 상단이다.
창천대주 척사검 남궁진이 행수 손학에게 말했다.
“행수님, 말씀드린 대로 저와 청운검 소가주는 산채에 가서 오봉십걸을 만나 보겠습니다. 창천대와 함께 바로 가십시오. 저녁에는 상단에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쉬엄쉬엄 이동할 테니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궁세가 덕분에 크게 돈을 절약하게 된 손학은 불만이 없었다.
사실 오봉산채에 도전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단을 위한 일이다. 남궁세가가 오봉십걸을 꺾으면 다음부터 통행세를 내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한 시진쯤 산길을 걸었을까?
어두컴컴한 숲 속에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있던 도적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손학이 여유 있게 나서서 은자 스무 냥을 내밀었다.
독심낭인 황요명이 돈주머니를 받고는 남궁진을 힐끔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의 분들은 산채로 올라가시겠소?”
남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나와 청운검이 갈 것이오.”
“따라오시오.”
황요명은 길게 말하지 않고 바로 돌아섰다.
그에게 남궁세가의 고수들은 저승사자나 다름없어서 가급적 얽히지 않으려는 것이다.
협로에 설치된 거대한 나무 문을 통과하자 별유천지(別有天地)가 펼쳐졌다.
거대한 전각과 깨끗하게 지어진 집들.
그리고 드넓은 앞마당에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남궁진과 남궁천은 뜻밖의 광경에 은근 놀랐다.
아무리 봐도 이건 녹림 산채라기보다 은자들이 살고 있는 마을처럼 보인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오. 오봉십걸 님들께 말씀 올리고 오겠소.”
황요명이 짧게 말하고 서둘러 어디론가 달려갔다.
다른 산적들도 하나 둘 흩어졌다.
남궁세가의 고수들을 앞에 두고도 전혀 경계하는 모습이 아니다.
남궁진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음! 생각보다 오봉십걸이 대단할지도 모르겠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산속에 이런 마을을 만들다니……. 정말 놀랍군요.”
“이런 자들이 왜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오봉산에 웅크리고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본래 무위가 뛰어날수록 공명심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인데……. 정말 기이하구나.”
두 사람이 오봉십걸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데 웬 늙은이가 다가왔다.
구밀복검 심양각이었다.
심양각이 남궁진과 남궁천을 보고는 알은체를 했다.
“남궁세가의 분들이시오?”
남궁진은 폭삭 늙은 그를 보고 허드렛일을 하는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소. 오봉십걸은 어디에 있소?”
“흐흐, 곧 오실 거외다. 연 공자님이 산 위에 있으니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게요.”
“허! 시간이 많지 않은데…….”
남궁진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두 분은 남궁세가 분들이라 특별 대우를 받는 거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오봉십걸의 얼굴은 볼 수도 없었을 테니까.”
“칠파이문은 돼야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소리요?”
“흐흐, 칠파이문도 그런 대우는 받지 못하오. 오직 남궁세가만 그런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시구려.”
남궁진과 남궁천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진심인지 놀리는 말인지 얼핏 이해할 수가 없어서다.
곰곰 생각하던 남궁진이 냉소를 쳤다.
“흥! 합비의 본가가 무너졌다고 조롱하는 거요?”
“어이쿠! 천만의 말씀. 천하에서 오봉십걸이 인정하는 가문은 오직 남궁세가 하나밖에 없소. 나중에라도 오봉십걸 앞에서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오.”
노인이 정색을 하자 남궁진과 남궁천은 더욱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다.
“이제 슬슬 오시는구려. 곧 저쪽 모퉁이로 나오실 게요. 아무쪼록 좋은 시간 되기를 바라오.”
순간 남궁진과 남궁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자신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노인이 뭔가 들은 것처럼 말해서다.
조금 지나서야 두 사람은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두 사람은 ‘노인이 반박귀진에 든 고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궁진은 흠칫 몸을 떨었다.
급히 남궁천을 보니 그도 놀란 얼굴이다.
대책 없이 오봉산채에 올라온 게 조금 후회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천하가 넓다는 걸 왜 잊고 있었을까!
자책하고 있는 남궁진의 앞으로 세 남자가 다가왔다.
임시로 산채를 맡고 있는 마형도와 허임달, 그리고 연적하다.
마형도가 가장 큰 형답게 먼저 인사를 했다.
“오봉십걸의 셋째인 마형도입니다. 이쪽은 넷째인 허임달, 그리고 일곱째 연적하.”
소개를 한 마형도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남궁세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봉십걸들은 몇 달 전에야 연적하가 남궁세가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훗날 산채를 방문하겠다’는 말을 전해 들은 그가 하루 종일 싱글벙글해서다. 물론 왜 그러는지 자세한 내용은 전혀 모른다.
한채연과 하소백이 몇 번이나 물었지만 해맑게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웃음이 푸근해서 꽤나 좋은 인연이려니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러던 중 남궁세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남궁진이 황급히 화답했다.
“저는 남궁세가 창천대 대주인 척사검 남궁진이고, 이쪽은 소가주인 청운검 남궁천입니다.”
상대의 나이가 많아 보여 저도 모르게 존대가 나왔다.
평소라면 상대가 녹림이니 잘해야 하오체를 썼을 텐데 말이다.
“아! 척사검 님과 청운검 님이셨군요. 서너 달 전에 수하들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오봉십걸의 무위를 확인하고 싶으시다고요?”
“아, 예…….”
남궁진이 힘없는 소리로 답했다.
자꾸만 오봉십걸 뒤에 서 있는 노인의 야릇한 얼굴로 시선이 갔다.
친절한 건지 비웃는 건지 알기 어려운 표정이다.
“오봉십걸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허명입니다. 잘난 아우 덕에 덩달아 유명해진 것뿐이죠. 연 아우가 오봉십걸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제부터 연 아우와 말씀 나누십시오.”
마형도가 슬쩍 뒤로 빠졌다.
남궁진은 그제야 ‘연 아우’라는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에 이름을 들었지만 노인과 마형도에게 집중하느라 ‘연 아우’라는 말만 기억났다.
열 명 중에 그가 가장 젊었다면 기억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셋인 데다가 노인에게 너무 신경 쓰느라 정작 중요한 그의 이름을 흘려듣고 말았다.
한편 연적하는 막상 남궁세가 사람들을 만나자 계면쩍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구경하던 심양각이 답답한 듯 한마디 거들었다.
“공자님, 모처럼 귀한 손님들도 오셨는데 한 수 보여 주시지요.”
“거 노인네가 말을 해도 꼭. 뭘 한 수 보여 주라는 거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곧 저승 갈 사람이 아직도 애들처럼 혈기를 부려. 쯧!”
쑥스러운 연적하는 애꿎은 심양각을 물고 늘어졌다.
“흐흐, 혈기는 건강의 상징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요즘 연습하시는 허공섭물이라도 보여 주십쇼.”
남궁세가 사람들과 칼질을 하고 싶지 않았던 연적하의 귀가 번쩍 뜨였다.
“허공섭물?”
말과 함께 연적하가 손을 뻗었다.
스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심양각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유엽도가 연적하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헉!’
남궁진의 입이 쩍 벌어졌다.
허공섭물은 절정의 고수들도 불가능한 그야말로 초상승의 수법이다. 그런 허공섭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는 청년이라니!
남궁천도 허공섭물 한 수에 혼이 나갔다.
검왕이라 불리던 부친도 저 정도로 자연스럽게 펼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연 아우라는 도적은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너무도 쉽게 했다.
남궁진과 남궁천이 바짝 긴장하자 연적하는 곤란한 얼굴로 급히 도를 던졌다.
철컥.
눈 깜짝할 사이에 유엽도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간단해 보이는 그 한 수에 남궁진과 남궁천은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놀랐다.
노인과 연 아우라는 도적의 거리는 일 장(약 3미터) 남짓.
그 거리에서 허공섭물로 도를 꺼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되돌려 놓은 것이다.
흉내도 낼 수 없는 절정의 비도술이다.
연적하는 아직도 부족하다 싶은지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남궁진은 이미 허공섭물의 단계에서 비무를 포기한 상태였다.
남궁진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연 소협의 무위는 이미 충분히 확인했습니다. 굳이 겨루어 보지 않아도 될 듯싶습니다. 저는 연 소협의 상대가 아님을 인정하겠습니다. 소가주는 어떻게 할 텐가?”
“저는…… 비무를 하고 싶습니다.”
낭궁천은 자신과 그의 차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느껴 보고 싶었다.
그런 남궁천의 마음을 이해한 남궁진은 만류하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과 남궁천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소가주, 무리하지는 마라.”
“예. 연 소협, 한 수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남궁전은 자신이 하수임을 인정하고 정중하게 비무를 요청했다. 상대가 너무 고수다 보니 녹림이니 뭐니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죠.”
가볍게 한숨을 쉬던 연적하가 마당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남궁천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연적하가 말했다.
“제가 비무 경험이 없어서 그런데, 힘 조절에 실패를 해도 이해해 주세요.”
“괜찮습니다. 강호를 주유하려면 그 정도의 각오는 하고 있어야지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궁천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저 정도의 고수가 힘 조절에 실패하면 스쳐도 중상이 분명했다.
얼핏 ‘괜한 객기를 부린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연적하가 검을 뽑아 들었다.
박도에서 검으로 바꾼 뒤로 하는 첫 싸움이다.
연적하는 상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잔뜩 긴장했다.
그걸 꿰뚫어 본 심양각이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흐흐! 공자님, 어째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이십니다. 뒷간에 갔다 와서 다시 할까요?”
“심 노인, 제발 닥쳐 줘! 나 이슬만 먹고 사는 남자야.”
그래도 심양각과의 대화로 굳어 있던 연적하의 어깨가 풀어졌다.
남궁천의 입가로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궁세가 소가주를 앞에 두고 잡담을 나눌 수 있다니 기분이 착잡하다.
그래도 어쩌랴. 이게 현실인 것을.
가벼운 한숨과 함께 남궁천이 먼저 검을 휘둘렀다.
그게 고수에 대한 예우였다.
차차차창.
남궁천의 검이 나비처럼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연적하를 몰아쳤다.
연적하는 차분하게 상대의 검을 걷어 내거나 좌우로 흘려보냈다.
살기가 없는 두 사람의 검격은 마치 잘 짜인 복잡한 검무 같았다.
굳어 있던 남궁천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담담해졌다.
상대는 젊지만 이미 무공의 틀을 넘어선 것 같았다.
마치 바다나 산을 향해 칼질하고 있는 느낌이다.
부친과의 비무 때에나 느끼던 기분을 자신보다 어린 도적에게서 느낄 줄이야!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 민망함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몰려왔다가 사라져 갔다.
녹림이나 젊은 나이 등으로 재단하기에는 상대가 너무도 뛰어났다.
선입견에서 벗어난 남궁천은 자신의 모든 걸 아낌없이 쏟아 냈다.
언제부터인지 대연검법과 제왕검형의 초식이 슬쩍슬쩍 섞였다.
초식과 무초식의 경계를 오가던 남궁천은 그만 무아지경에 들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쨍.
귀청을 울리는 맑은 검명과 함께 남궁천은 무아지경에서 깨어났다.
자신의 검극이 튕겨 나 하늘로 향해 있었다.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피로감에 팔다리가 무거웠다.
멍하니 서 있는 남궁천에게 연적하가 연신 머리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진짜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눈만 끔뻑 거리고 있는 남궁천에게 남궁진이 달려왔다.
“소가주, 움직이지 마라.”
“왜에 그러는…….”
말을 하다 말고 남궁천이 픽 쓰러졌다.
피를 철철 흘리며 기절한 남궁천을 남궁진이 부축하듯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