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7
77회. 좀 쉴 때도 됐지
청운검 남궁천은 연적하와의 비무로 어깨와 양팔에 크고 작은 자상을 입었다.
기절한 그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척사검 남궁진은 ‘창천대 이름으로 상단 호위를 맡았으니 낙양까지는 책임져야 한다’며 홀로 떠났다.
물론 남궁천을 대하는 오봉산채의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져 믿고 간 것이다.
남궁천은 저녁이 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하가촌의 의원은 원기를 소진하고 피까지 많이 흘려 그런 거라고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연적하는 남궁천이 잠든 방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하필 남궁천을 다치게 했다는 자책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나가던 심양각이 그런 그를 보고는 슬그머니 다가갔다.
“공자님, 너무 자책하지 마십쇼. 두 사람 모두 무아지경에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내가 미친 거지. 싸우다 말고 무아지경이라니.”
“남궁 공자가 다친 건 안된 일이지만 그건 모두에게 축복입니다.”
“아이구, 축복 두 번 받았다가는 바로 죽겠네.”
“흐흐, 무아지경에 드는 게 꿈인 사람이 한둘인 줄 아십니까? 모르긴 몰라도 두 분 모두 적지 않은 성취가 있었을 겁니다.”
“성취는 개뿔. 이기어검은 여전히 안 되는데.”
“그래도 초식과 무초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게 어딥니까? 칼을 든 사람이라면 모두 초식에서 해탈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경계를 넘나들었다고? 내가?”
“예, 공자님의 검술은 많이 변했습니다. 가볍게 휘두르시는데도 초식의 요체가 담겨 있더군요. 정말 아무 느낌이 없으셨습니까?”
“글쎄. 굳이 말하자면 ‘초식을 펼쳐야 한다’는 압박 같은 게 사라지긴 했어.”
“흐흐, 평소 압박을 느끼시긴 하셨습니까?”
“배운 거니까 잘 써먹어야지. 그런데 결국 칼질이라는 게 단순한 거잖아. 찌르고 베는 거밖에 더 있어? 만류귀종이라고나 할까? 초식도 결국 찌르고 베는 거라는 걸 알게 되니까, 의무감이 사라지더라고.”
“과연 그러셨군요. 내일 한번 검을 써 보십시오. 이전과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초식의 골수를 맛본 자만이 초식을 넘나들 수 있는데, 공자님께서 벌써 그런 경지에 드신 줄은 몰랐습니다.”
“풋! 골수라고? 심 노인 예전에 숙수랑 친했었어? 뭔 골수를 맛봤대? 하여간 웃겨.”
“어릴 때 주방 일을 거든 적이 있습니다.”
“별일 다 했네?”
“흐흐, 먹고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해야 했으니까요.”
심양각을 보는 연적하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은 인간적인 마두로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초식과 무초식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한다 이거지?”
“예. 저는 공자님의 경지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나이에 벌써 초식을 뛰어넘다니 그건 정말 불가능 한 일입니다. 설사 모친의 배 속에서부터 검술을 익혔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지요. 구천현녀에게 직접 배워서 그런 걸까요?”
“그럴지도.”
“그럼 그 무지막지한 내공은요? 아무리 구백 자를 다 연성하셨다고 해도, 진기토납만으로 가능한 수준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천현녀에게 먹을 것도 많이 얻어먹었어.”
“영약요?”
“아니, 마른 화권이랑 물.”
“먹어 보니 달달했다는 거요?”
“응.”
심양각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연적하의 표정 하나만큼은 진지했다.
“공자님.”
“응?”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말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거나, 공자님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니까요.”
“역시 그렇겠지?”
“헐! 설마 알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그럼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알겠습니다. 구천현녀는 어디서 만나셨습니까?”
“거울 속에서.”
“푸흐흐흐. 흐흐흐.”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심양각은 한참 동안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웃었다.
남궁천은 밤늦게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연적하에게 ‘남궁진이 먼저 떠났다’는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한참 머뭇거리던 남궁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 소협,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예.”
“연 소협의 무공이 너무 눈에 익어서요. 혹시 그건 와룡장의 구천검이 아닙니까?”
남궁천은 연 아우라는 사람이 와룡장과 관계있다고 생각했다.
연무백과 십 년을 함께 지냈다.
구천검의 요결은 모르지만 흉내까지도 가능하다.
자신이 초절정 고수인 연적하와 오래도록 비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연무백과 십 년 동안이나 비무를 해서 구천검의 투로가 눈에 익었다. 그래서 더 몰입할 수 있었고, 마침내는 무아지경에까지 든 것이다.
“예.”
연적하는 부인하지 않았다.
자신은 참월검객의 아들이고 구천세법의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던가!
“실례지만 와룡장과는 어떤 관계이신지요? 아, 다른 뜻은 없습니다. 와룡장의 소가주인 연무백과 십 년을 함께 지냈지만 그보다 더 구천검에 정통하신 것 같아서요.”
남궁천은 눈앞의 청년과 연적하를 연결 지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는 그의 무위가 너무도 뛰어났다. 가문의 모든 걸 쏟아부어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를 창고에 갇힌 아이가 해낼 수는 없으니까.
“혹시 저 기억나지 않으세요? 십삼 년쯤 전에 와룡장에서 봤을 텐데. 연적하입니다.”
“에?”
남궁천이 놀란 눈으로 연적하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창고에 갇혀 있다가 달아난 그 아이라고?
“정말 연 소협이 연 숙부님의 막내 아들인 적하란 말입니까? 그 말 없던 꼬마?”
“예.”
남궁천이 빤히 바라보자 연적하는 쑥스럽게 웃었다.
“창고에 갇혀 있던 막내?”
“응?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세상에…….”
남궁천은 삼 년 전 동생과 함께 와룡장에서 그를 찾아다닌 일을 말해 주었다.
“오봉산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냐?”
그가 연 숙부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난 뒤로 남궁천은 말을 편하게 했다.
연적하는 창고에서 빠져나와 오봉산에 정착하기까지의 일을 들려주었다.
“……그때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걸 채주님이 구해 줬어요. 그 뒤로 그냥 눌러앉게 된 거죠.”
“쯧! 그랬구나. 부모님과 연이가 네 걱정을 많이 했다. 특히 아버지는 늦게라도 꼭 너를 찾고 싶어 하셨는데…….”
남궁천이 말끝을 흐렸다.
불현듯 본가의 참사가 떠올라서다.
“남궁세가의 소식은 들었어요. 백부님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요?”
“어. 그래도 살아 계신 건 확실해. 유명교에서 아버지를 찾는다고 한동안 시끄러웠거든. 분명히 어딘가에서 치료를 받고 계실 거야. 그렇게 가실 분이 아니야.”
“꼭 돌아오시길 바라요.”
“고맙다. 참, 그런데 구천검은 어디서 배운 거냐? 무백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던데.”
“창고 안에서 지낼 때……. 연씨 선조들이 남긴 걸 발견했어요.”
연적하는 구천현녀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심양각의 말마따나 미친놈 취급받을 게 분명해서다.
“아!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되었구나. 창고에서 비전을 발견했다니. 나중에 숙모님이 알게 되면 배가 꽤나 아프시겠는걸?”
남궁천이 슬쩍 연적하의 표정을 살폈다.
오봉산채가 와룡장에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유에 대한 억측이 많았는데 이런 속사정은 짐작도 못 하리라.
“연이가 네 소식을 들으면 좋아할 텐데, 언제 한번 만나 볼 테냐?”
“네.”
“와룡장에는 연락하지 않는 게 좋겠지?”
“그 사람들과는 인연 끊었어요.”
담담한 연적하의 음성에서 남궁천은 중재가 불가능함을 느꼈다.
“그래. 나 역시 네 뜻을 존중하마. 너와 와룡장을 연관 짓지 않겠다. 만약 삼 년 전에 창고에서 너를 발견했다면 남궁세가도 와룡장과 연을 끊었을 게다. 연이가 맺고 끊는 게 분명해서…….”
“누님은…… 잘 지내고 계신 거죠?”
“연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나와 달리 과묵하지. 하하. 아이쿠, 아프다.”
상체를 들썩이며 웃던 남궁천이 가볍게 팔을 매만졌다.
무심코 움직이다 상처를 자극한 모양이다.
“죄송해요, 형님. 일부러 다치게 한 건 아니었어요. 조심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잠깐 정신이 나가 가지고.”
“아냐, 괜찮아. 덕분에 나도 기연을 얻었으니까. 십 년 폐관 수련을 한 것과도 같은 효과를 얻었는데 이까짓 부상이 대수냐. 이제야 조금 자신감이 생긴다.”
사실 남궁천은 본가가 몰락한 이후 의기소침해 있었다. 복수를 하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아 더 좌절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무위가 높아지면서 무너졌던 자존심도 조금 회복됐다.
“그건 그렇고 너는 계속 산채 생활을 할 생각이냐?”
“모르겠어요. 오봉십걸 중에 벌써 일곱이나 하산하긴 했는데. 저는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남궁천은 안쓰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바라보았다.
만약 남궁세가만 멀쩡했다면 함께 가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도 상조상방에 얹혀사는 처지인지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거 아냐? 좀도둑은 매를 맞고 얼굴에 낙인이 찍히지만, 대도(大盜)는 영웅호걸이라 부르더라. 당장 파천마군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앞으로 네가 뭘 해도 감히 도적이라 욕하는 사람은 없을 게다.”
“정말요?”
“당연하지. 누가 네 앞에서 도적이라고 욕하겠냐? 뒤에서라면 몰라도. 흣!”
남궁천이 말하다 말고 실소를 흘렸다.
연적하의 무위라면 정의맹에서도 눈치만 살필 게 분명했다.
유명교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녹림의 고수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
“사실 그런 건 별로 신경 안 써요. 녹림 생활도 괜찮은 거 같더라고요. 도적 취급하면 도적처럼 행동하고, 호걸 대접하면 호걸이 되어 주죠 뭐.”
“현명한 생각이다. 성현들도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오는 법이지.”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약간 이상한 것 같았지만 남궁천의 뜨거운 마음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
다음 날 남궁천은 산을 내려갔다.
낙양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궁연이 걱정할까 봐 서둘러 떠난 것이다.
남궁천과 작별한 뒤로 연적하는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다.
어느 날, 보다 못한 심양각이 오봉산 제일봉으로 올라갔다.
바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연적하가 심드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심 노인, 요즘 왜 자꾸 기웃거려? 여기에 꿀단지라도 묻어 뒀어?”
“흐흐, 그럴 리가요. 그나저나 요즘 이기어검 수련은 접으신 것 같습니다?”
“그게 뭐 하루 이틀에 되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열아홉 살짜리가 어검술을 쓰면 사람들이 건방지다고 욕해.”
“어이쿠! 설마요. 감히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을 겁니다.”
“눈도 안 마주 친다고? 그럼 안 되지. 난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푸흐흐. 그래서 요즘 쉬시는 겁니까?”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수련했잖아. 좀 쉴 때도 됐지.”
“그렇다면 이왕 쉬시는 거 보람 있게 쉬시지요.”
“쉬는데 무슨 보람까지.”
“제가 공자님께 어검술에 대해 말했지만 엉터리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알고 있었구나. 허공섭물만 믿고 있다가 바보 된 기분이야.”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참에 나들이를 한번 하시면 어떨까요?”
“나들이?”
“예, 무당산으로 가서 천지상인을 만나는 겁니다. 그분이라면 어검술의 요령을 제대로 알려 줄 겁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낙양으로 척 가서 그 유명한 낙양삼절을 보고 오는 겁니다.”
“낙양삼절?”
“수석(水席)이라는 탕요리와 모란과 용문석굴을 낙양삼절이라고 하지요. 쉬려면 제대로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적하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낙양이라면 자연스럽게 남궁세가 사람들도 만나 볼 수 있으니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