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95
795회. 내가 멸문시키겠다고 말로 했어?
사천성.
성도 동편.
이른 아침.
성도로 통하는 관도 위를 삼 남 이 녀가 걷고 있었다.
연적하, 구천노도 심통, 삼보절명 당운망, 그리고 월아와 금아다.
지루한 얼굴로 터덜터덜 걷던 연적하가 문득 심통을 돌아보았다.
“심 노인.”
“예.”
“마차라도 구해야 하는 거 아냐? 지겨워서 못 걷겠다. 정말 청성파까지 이렇게 가야 해?”
“마차 살 돈이 없는 걸 어쩝니까? 지나가는 마차라도 빼앗을까요?”
“됐어. 우리가 아직도 녹림인 줄 알아?”
“그러면 마차 타령은 그만하십쇼. 벌써 몇 번째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도 몰라? 자꾸 하고 또 하다 보면……. 가만, 수월문이 성도에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잘됐네. 수월문에 가서 뜯어내면 되겠다.”
“고작 마차 한 대와 멸문을 바꾸시게요? 너무 손해 보는 것 아닙니까?”
“쯧쯧! 수월문을 멸문시키면 우리한테 뭐 생기는 거 있어? 국수 한 그릇이라도 떨어지냐고?”
“없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멸문에 집착해?”
“제가 침착한 게 아니라 공자님이 멸문하겠다고 선언하셔서 그런 겁니다. 언법(言法) 수련 때문에 말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참 융통성이 없네. 그래서 내가 멸문시키겠다고 말로 했어?”
“그러지 않았습니까?”
“아닌데? 난 글자로만 적었어. 멸문 예약이라고.”
“그게 같은 소리 아닙니까?”
“말과 글이 어떻게 같아?”
“그러니까 말로 하지 않았으니까 돈만 뺏어도 괜찮다는 겁니까?”
심통이 황당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거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소리인 까닭이다.
그제야 연적하도 조금 찔리는지을 바꿨다.
“우리가 녹림이야? 왜 돈을 빼앗아? 상황 봐서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돈을 뺏고 살려 주는 게 멸문보다 훨씬 자비로운 거잖아.”
듣고 있던 당운망이 끼어들었다.
“가주님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자비를 배풀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을 왜 저렇게 곡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속이 꼬여 있어서 그런 거겠지요?”
심통이 당운망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뒤늦게 저 늙은이가 자신의 일에 항상 반대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가야. 너 그러다가 진짜 혼난다. 구주에서는 성주들도 노부의 말 한 마디에 오줌을 질금질금 싸곤 했다.”
“흥! 그야 네 얼굴이 뒷간처럼 생겨서 그랬겠지. 나도 벌써부터 오줌이 마렵다.”
당운망이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심통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공자님, 저 당가 때문에 제가 명대로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그러나 연적하도 심통의 편은 아니었다.
“정해진 수명을 이미 넘겼는데 뭘 명대로 살지 못해?”
“예, 예. 그러시다면 제가 예전의 심통이 아니라고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심 노인, 당 노인에게도 한 수가 있어. 그러니까 너무 자만하지 마.”
“진인인 제가 설마 당가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당 노인의 낙월독정으로 개고생 한 거 기억 안 나? 심 노인이라고 별수 있을 것 같아?”
“끙!”
심통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수하게 무위로 논하자면 당운망은 자신의 일초지적도 안된다.
하지만 독공은 다르다.
다른 건 몰라도 솔직히 당운망의 낙월독정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당운망 덕분에 수월문을 주제로 한 대화는 금방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
성도.
활짝 열린 성문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그들 중 대부분은 상인들이었지만 일반인들과 무인들도 적지 않았다.
관병들은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일반인보다 상인과 무인 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마침내 연적하 일행의 차례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앞사람 뒤에 따라붙으려는 연적하의 앞을 관병 하나가 막아섰다.
구천노도 심통의 허리춤에 금강저가 달랑거려 무림인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디의 누구요?”
그다음에 예정된 질문은 ‘호패를 봅시다’였다.
“남직례성 여강현 석경장의 연적하요.”
관병은 흠칫 놀라더니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가 더 이상 막지 않자 연적하는 느긋하게 성문으로 진입했다.
연적하 일행은 성도에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수월문을 찾아갔다.
***
수월문.
정오 무렵, 삼 남 이 녀가 수월문의 정문 앞에 나타났다.
연적하 일행이다.
연적하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머리를 긁적였다.
수월문은 지금껏 본 문파 중에서 가장 작아 멸문 운운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당운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가주님께서 손대지 않아도 오래가지 않을 분위기인데요?”
심통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별말 하지 않고 다가가 문짝을 발로 걷어찼다.
쾅쾅쾅-!
조금 후에 초로의 노인이 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심통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천무림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수월문은 왜 대낮부터 문을 처닫고 있느냐?”
“아, 행실 나쁜 제자들이 사고를 치고 돌아와 문주님께서 자중하라는 의미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초로의 노인, 엽일운은 삼 남 이 녀의 면면을 살폈다.
청년 하나와 노인 둘, 그리고 어린 소녀 둘이 뻘쭘한 얼굴로 서 있었다.
딱히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일단 안심이지만, 그래도 그는 끝까지 마음을 놓지 않았다.
“문주에게 전해라. 석경장의 장주님께서 빚을 받으러 오셨다고.”
심통은 연적하가 멸문을 두고 오락가락하기에 일단 빚이라는 말로 포장했다.
“헉!”
대경실색한 엽일운은 황급히 쪽문을 닫아걸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주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혼이 반쯤 나간 그는 헐레벌떡 안채로 달려갔다.
잠시 후 수월문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래도 적진이라고 심통이 먼저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언제 모였는지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비장한 얼굴로 도열해 있었다.
이윽고 무리 속에서 사십 대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수월문의 문주인 장문우입니다.”
심통이 턱을 빳빳하게 세우고 말했다.
“노부는 구천노도 심통이다. 너희 수월문의 제자들이 우리 장주님을 욕보였기에 단죄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너는 수월문의 죄를 인정하느냐?”
묵묵히 듣고 있던 장문우가 고개를 숙였다.
“예, 신이수와 이진상이 연 대협께 중한 죄를 저질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두 사람을 파문시켰는데 그것으로는 화가 풀리지 않으시겠지요? 저희는 사천무림에서도 말단이라 감히 연 대협에 맞설 수가 없으니, 어떤 처분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심통은 정중함 속에서 뭔가 배배 꼬인 것을 발견하고 실소를 흘렸다.
‘흐흐. 이 병신 같은 놈이 꼴에 자존심을 세워 보겠다고 머리를 굴리는구나.’
하지만 잔머리로 따지자면 연적하도 보통이 아니다.
게다가 연적하는 책임 회피를 극히 싫어한다.
‘정직하게 나왔으면 배상금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인데, 혀를 그렇게 놀렸으니…….’
아니나 다를까?
뒤에 서 있던 연적하가 한마디 툭 던졌다.
“이봐. 기르던 개가 사람을 물었어. 그런데 개 주인이 개를 내다 버리면 일이 해결돼?”
“그것으로 화가 풀리지 않으실 것 같아 처분을 달게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 사천무림의 말단이라 나에게 맞설 수가 없다고 했지? 그 말은 수월문에게 힘이 있었다면 나에게 맞섰을 거라는 소리잖아? 아니야?”
노골적인 연적하의 지적에 장문우는 한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쩝. 연적하는 녹림 출신으로 단순 무식하다고 들었는데…….’
녹림 출신에 대한 선입견으로 생긴 소문이었던 모양이다.
빠져나갈 말을 궁리하는 그의 귓가로 연적하의 말이 들려왔다.
“야아! 장 문주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사람이 잘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잘했다고 하고, 잘못했으면 아무리 높은 위치라도 잘못했다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하는데……. 저거 뭐야?”
그제야 장문우는 연적하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급히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연적하의 눈빛에는 이미 냉기가 가득했다.
“장 문주.”
“예.”
“당신의 그 잘난 제자들이 나에게 뭐라고 한 줄 알아? 소악마에 미친 놈이래.”
“…….”
장문우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신이수와 이진상은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그저 석경장 쪽의 절세고수와 시비가 붙어 맞았다고만 했다.
그 두 사람이 연적하에게 시비를 건 것이었다면 당연히 잡아 두었을 것이다.
“뭐 그런 정도는 참을 수 있어. 내가 녹림에 있을 때 소악마 소리를 들은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당신의 제자들은 내가 참을 수 없는 소리를 했어. 내 처를 훔쳐보면서 ‘그림의 떡’이라고 하더라고. 어때? 아직도 힘이 없어서 나한테 맞서지 못하는 게 분해? 분하냐고 이 새끼야!”
분기탱천한 연적하의 마지막 말은 사자후(獅子吼)에 가까웠다.
음성에 실린 무형의 영기(靈氣)가 수월문도들을 후려쳤다.
가공할 힘에 무방비로 노출된 수월문도들이 태풍에 날리는 낙엽처럼 뒤로 날아갔다.
“으아아악!”
“아악!”
오 장(약 15미터)여 거리를 데굴데굴 굴러가던 수월문도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오체투지하며 외쳤다.
“연 대협! 살려 주십쇼!”
“용서해 주십쇼!”
특히나 장문우는 피가 나도록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대협! 그놈들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단지 파문으로 끝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세세하게 살피지 못한 저의 잘못입니다!”
장문우의 딸 장지연이 그의 곁에 나란히 무릎 꿇고 아버지를 변호했다.
“대협! 용서해 주세요! 저희 아버지는 정말 몰랐어요. 그들은 석경장 쪽의 절세고수와 시비가 붙어서 맞았다고만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예요.”
“…….”
부녀의 말과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지자 연적하는 노기를 가라앉혔다.
그가 먼 산으로 눈을 돌리자 심통이 나섰다.
“장문우! 제자를 잘못 가르친 죄를 인정하느냐?”
“예!”
장문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허공섭물의 고수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사자후까지 목격했으니 희망이 없었다.
심통은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와 수월문에 대한 처벌은 장주인 연적하가 결정해야 하는 까닭이다.
연적하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심 노인. 수월문 때문에 우리 여정이 늦어졌으니 마차와 하루치 건량을 준비하라고 해. 그리고 그 두 놈은 끝까지 거짓말을 했으니 그냥 두면 안 돼. 잡아서 단전을 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심통이 다시 장문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었느냐? 마차와 하루치 건량을 준비하고. 그 두 놈의 단전을 폐해라. 너는 우리 장주님의 관대하신 처분을 받아들이겠느냐?”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장문우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적하에게 찍히면 기본이 멸문이라는데 고작 마차와 하루치 건량으로 용서해 주겠단다.
좀처럼 현실이 믿어지지 않은 그는 슬그머니 제 허벅지 안쪽을 꼬집었다.
‘윽!’
소름 돋도록 아팠지만 그는 오히려 웃었다.
마차 한 대와 하루치 건량으로 멸문을 면하게 되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