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
8회. 탈출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연적하는 청동 거울 밖의 요괴를 찾아보았다.
잡동사니 위에 걸터앉아 있는 요괴는 그동안 덩치가 더 커진 것 같았다.
요괴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진기토납만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연적하는 가까이 와 보라는 듯 요괴에게 손을 까닥였다.
요괴는 경계를 하면서도 천천히 다가왔다.
청동 거울을 사이에 두고 연적하와 요괴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요괴의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이다.
갑자기 연적하를 향해 깊은 슬픔과 끔찍한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
거울 밖에서 촐랑대던 요괴의 마음 속에 이런 감정이 있을 줄이야.
‘헉!’
연적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가까이서 본 요괴는 귀신도, 조상신도 아니었다.
‘이, 이건 설마…….’
거울 밖의 요괴도 꽤나 놀라고 당황한 얼굴이다.
연적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청동 거울에 비친 요괴의 얼굴을 더듬었다.
요괴 역시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다.
한동안 넋을 잃고 보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너는…… 나였구나.”
구천기를 이룬 연적하의 눈에 마침내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괴, 아니 소년은 자신이 잃어버렸던 참모습이었다.
큰어머니와 연씨 일족의 학대 속에 잃어버린 자기 자신 말이다. 천진난만하게 살고 싶었던 바람이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자신을 낳다 죽으면서 그건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아빠는 자신을 큰엄마의 손에 방치해 버렸고, 그 뒤로는 이 모양 이 꼴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은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다.
연적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년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엄마…….”
북받치는 설움에 연적하는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 그는 거울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연적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거울 속에 삐쩍 마른 소년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녕.”
연적하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이다.
소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선녀가 나타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세히 보니 거울 뒷면에 새겨져 있던 구천현녀다. 거울 속의 배경도 어느새 창고가 아니라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광으로 변해 있었다.
희미하게 웃음 짓던 선녀는 이내 구름을 타고 까마득히 먼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뜻밖의 기사(奇事)에 놀란 연적하는 눈만 끔뻑거렸다.
그때 갑자기 청동 거울이 이전처럼 세월의 때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미처 손써 볼 틈도 없이 청동 거울은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어? 어?”
연적하는 조심스럽게 망가진 거울을 들어 살폈다.
안타까운 마음에 헝겊으로 힘주어 닦아 보았지만 세월의 때는 조금도 벗겨지지 않았다.
“하아!”
저로 모르게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모든 게 구천현녀의 조화였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선계에 있던 구천현녀가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해 도와줬던 모양이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연적하는 잔뜩 녹이 슬은 구천현녀경을 한쪽 벽에 세워 두고 큰절을 올렸다.
덜커덩.
쪽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음식 바구니가 쑥 들어왔다.
이번에도 돌덩어리처럼 딱딱한 화권과 푸성귀와 물병이 전부였다.
바구니를 집는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중얼거리는 무사의 소리가 들렸다.
“허! 십 년이라니. 그래도 무가의 자식이라고 목숨이 질기구나…….”
그제야 연적하는 자신이 십 년이나 창고에 갇혀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럼 지금은 열여섯 살?
“하. 하. 하…….”
어이가 없다.
자신을 가둔 사람은 총관 삼촌이지만 큰엄마가 시켜서 그랬을 것이다.
목숨이 어쩌고 하는 걸 보니 풀어 줄 마음은 없는 것 같다.
자아, 이제 어쩐다.
고민하던 연적하의 눈에 통풍을 위해 뚫어 놓은 쪽창이 보였다.
가볍게 날아올라 쇠창살을 잡고 내다보니 어스름한 황혼녘이다.
다시 바닥에 내려온 연적하는 창고를 샅샅이 뒤졌다.
그래도 나름 무가라고 잡다한 무술 관련 책이 손에 잡혔다.
연씨 일족이 참고 삼아 수집했다가 버린 책들이다.
“비연보(飛燕步)?”
제목을 보면 아직 배운 적이 없는 보법이나 경신술에 관한 책이다.
연적하는 비연보를 한쪽에 따로 뺐다.
한참을 뒤졌지만 도움이 될 만한 건 비연보밖에 없었다.
“쳇!”
투덜거리던 그는 비연보의 책장을 넘겼다.
‘제비의 나는 모양새를 보고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이런저런 잡설이 이어졌다.
“제비의 날개처럼 두 손을 뒤로 쭉 뻗으라고?”
연적하는 두 팔을 뒤로 뻗고 시키는 대로 운기하며 몇 걸음 내디뎠다.
“오오!”
그래도 경신술이라고 생각 없이 걷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창고를 열 바퀴쯤 돌자 비연보가 몸에 착 붙었다.
그 정도로 수준 낮은 조잡한 신법이지만 연적하는 알지 못했다.
신법은 별로지만 그의 심법은 가히 천하제일.
그는 비연보를 이용해 하루 종일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 정말 괜찮은 신법인걸?”
연적하는 괜찮다고 자평하고는 비연보를 등 뒤로 휙 내던졌다. 이미 원리를 터득한 뒤라서 책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다시 쪽창으로 몸을 날렸다.
비연보를 익혀서 그런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동작이 나왔다.
밖은 어느새 캄캄했다.
비연보를 읽고 터득하는 동안 해가 진 모양이다.
다시 바닥에 내려온 연적하는 음식물과 오물이 드나드는 쪽문을 발로 툭 건드렸다.
덜컹.
자물쇠를 걸어 놓았는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연적하는 비연보의 가르침대로 발에 내력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쪽문을 발끝으로 은근히 밀어 냈다.
투득, 투득.
뭔가 뒤틀어지는 소리와 함께 쪽문이 톡 떨어졌다.
그래도 아직 몸이 빠져나가려면 조금 좁은 느낌이 든다.
연적하는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쪽문 주위의 널빤지를 잡아 뜯었다.
세월에 삭은 널빤지는 공력이 실린 손길을 버텨 내지 못하고 쉽게 쪼개졌다.
연적하는 어린 시절 개구멍을 드나들 듯 기어서 창고를 빠져나갔다.
막상 밖으로 나오니 겁이 덜컥 났다.
와룡장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면 더 튼튼한 곳에 가두려 할 게 분명했다.
연적하는 살금살금 걸어가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알고 있는 비연보를 펼쳐 무작정 남쪽으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백호대 무사가 따라올까 봐 쉬지도 않았다.
연적하는 비연보의 가르침에 따라 두 팔을 곧게 뒤로 뻗었다. 누가 봤다면 배를 잡고 웃을 모양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자 경신술은 더욱 빨라져 제법 먼 거리를 이동했다.
마침내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을 무렵 연적하의 달리기도 끝났다.
“헉! 헉!”
저녁을 건너뛰어서 그런지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연적하는 천천히 걸으며 호흡을 조절했다.
여기가 어딜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관도 옆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가 보였다.
[등봉현 십 리.]등봉현 방향으로 가려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고작 하룻밤 동안 달려온 거리다’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곳은 큰엄마의 집에서 너무 가깝다.
큰엄마가 사람을 풀면 금방이라도 뒤를 잡힐 것 같았다.
언사에서 등봉현까지 사흘 길이라 제법 먼데, 연적하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하아! 그래도 더는 못 가.”
얼마나 지쳤는지 무릎이 후들거렸다.
연적하는 일단 뭐라도 얻어먹기로 했다.
비칠비칠 걸어 가까운 마을로 들어갔는데 귀찮은 일이 생겼다. 꼬맹이들이 따라다니며 돌멩이를 집어 던지고 욕을 해 댄 것이다.
“와아! 거지다!”
“더러워!”
“꺼져!”
어린아이들의 힘이라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거지라니?
‘아니야. 엄마 아빠가 일찍 죽었지만 그래도 나는 부잣집에서…….’
생각해 보니 갇혀 지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몰골은 아이들의 말대로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였다.
몇 년 전에 넣어 줘 입고 있던 옷은 그동안 삭고, 짧아진 상태.
그나마도 밤새 달리다가 찢어져 너덜너덜하기까지 했다.
씻지도 못한 몸은 땟국물로 꼬질꼬질해서 자신이 봐도 토가 나올 정도다.
딱.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이마에 맞았다.
얼얼한 느낌에 쓰다듬는데 손끝이 척척하다. 확인해 보니 벌건 피가 묻어 있었다.
순간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들이!”
연적하가 소리를 버럭 내지르며 쫓는 시늉을 하자 아이들이 ‘와아’ 하고 달아났다.
지나가던 어른 하나가 아이들에게 ‘불쌍한 사람 괴롭히지 마라’ 하고 야단쳤다. 그제야 아이들은 다른 놀잇거리를 찾아 우르르 몰려갔다.
한여름이라 피는 금방 말랐다.
터덜터덜 걷고 있는 연적하를 누군가 불렀다.
“이봐. 거기.”
돌아보니 웬 늙은 거지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너 혹시 개방의 제자냐?”
“아니요.”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거지같이 하고 다녀?”
“…….”
연적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거지가 아닌데 거지처럼 보인다는 게 참 서러웠다.
늙은 거지가 다가와 물었다.
“너, 집 없지?”
“네.”
“밥그릇은 있냐?”
“없어요.”
“배고파 죽겠지?”
“네.”
늙은 거지가 ‘쯧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이 미련한 놈아. 밥그릇이 없으니까 쫄쫄 굶고 다니는 것 아니냐. 기본이 안 된 놈일세. 이거 받아라.”
늙은 거지가 허리춤에 걸려 있던 적선 바가지를 내밀었다.
연적하는 얼떨결에 두 손으로 깨진 바가지를 받았다.
“귓구멍 후비고 잘 들어라. 남자는 적선을 안 하니까 여자만 찾아. 멀리 아줌마가 보인다. 그럼 재빨리 달려가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늙은 거지, 개방의 장로 망우개가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에 빠르게 말했다.
“‘아이고! 관음보살처럼 자비로운 마님, 가엾은 목숨 하나 살려 주십시오! 마님, 저는 일찍 고아가 돼서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제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쇼. 부처님께서 마님의 공덕을 잊지 않으실 겁니다. 예에?’ 하고 말끝을 올리면서 울 것 같은 얼굴로 쳐다보는 거야. 알았냐?”
“……네.”
“해 봐.”
“네?”
“알았다면서? 그럼 내가 한 걸 따라 해 보라고. 얼마나 잘하나 보게.”
망우개가 기대 어린 눈으로 연적하를 바라보았다.
이 비루먹은 소년이 총명하면 데려가 제자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갓 나온 연적하는 늙은 거지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자꾸 따라 해 보라니 억지로 기억을 더듬었다.
“……관음보살 마님……. 살려 주세요. 고아가…….”
‘고아가 됐다’는 말을 하려니 울컥 눈물이 나려고 한다.
연적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망우개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그렇게 많은 걸 읊었는데 고작 ‘관음보살’과 ‘고아’라는 말만 기억나는 모양이다. 이 정도 머리라면 제자로 삼을 이유가 없다.
그래도 내친김에 구걸의 기본은 전수해 주기로 했다.
꼭 개방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게 아닌가!
“험, 험. 잘 들어라. 아가씨에게 하는 말은 좀 달라. 아가씨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돼. ‘아이쿠! 아름다운 아가씨, 마음씨까지 착하니 부모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다요. 좋은 남자 만나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고 백년해로하십쇼!’ 그냥 가까이 착 달라붙어서 그 말만 반복해. 아가씨들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오래 매달리지 않아도 잘 줘. 알아들었냐?”
“……네.”
망우개는 다시 외워 보라고 하지 않았다. 이미 소년의 머리가 별로라는 걸 알기에 그저 한 사람의 거지로 자립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건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잘 쓰도록 해라.”
“예? 예.”
“그럼, 인연이 닿으면 나중에 또 만나자.”
망우개가 격려하듯 연적하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연적하는 멍하니 늙은 거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도록 이야기하기는 처음이다. 창고를 관리하는 무사들은 자기들이 할 말만 하고 돌아가곤 했다.
꼬르륵.
배에서 난 소리에 연적하는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바가지를 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배는 고팠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인심이 후한 동네인지 점심 무렵에는 바가지가 먹을 것으로 수북했다. 보기에는 지저분해도 맛은 오히려 창고에서 먹던 말라비틀어진 화권보다 좋았다.
연적하는 바가지에 담긴 음식을 집어 먹으며 남쪽으로 쉬지 않고 이동했다.
관도를 따라 걷다가 산이 나오면 넘고, 들판이 나오면 가로질렀다.
그러다 보면 또 관도가 나타났다.
좁은 창고에 십 년이나 갇혀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모든 게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