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
9회.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낙양 동편 언사.
와룡장.
백호대의 무사들이 연적하가 달아난 것을 알게 된 건 다음 날 초저녁이었다. 여느 때처럼 음식 바구니를 들고 갔던 무사가 떨어져 나간 쪽문을 발견한 것이다.
“뭐라고! 적하가 문을 부수고 달아나?”
와룡장의 총관 연무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백호대의 대주, 백정기가 고개를 떨구었다.
“어제 저녁까지 쪽문이 멀쩡했던 걸 보면 그사이에 달아난 것 같습니다.”
“벌써 하루가 지났다는 소린가?”
“그렇습니다.”
“백호대가 지키고 있는데 무슨 수로 그 어린 녀석이 달아난단 말인가!”
“면목 없습니다. 십 년 동안 별일 없다 보니 좀 풀어졌던 것 같습니다.”
연적하는 지난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탈출하려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창고 주변의 경계가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총관인 연무독은 와룡장을 지배하고 있는 백미주의 반응이 궁금했다.
“백 부인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
백호대 대주 백정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연씨 일족과 달리 백호대에서 연무독과 백미주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언사에서 사흘 거리까지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흠! 사흘이라…….”
“사흘도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무공과 거리가 먼 아이이니 언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기는 한데…….”
연무독은 뭔가 께름칙한 얼굴이다.
와룡장과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판이니 그럴 만도 하다.
“찾아보고 없으면 어떻게 하신다던가?”
사실 총관이자 삼촌인 그가 백호대의 대주에게 물어볼 말은 아니었다. 그만큼 지금 와룡장을 좌우하는 건 백미주와 백호대였다.
“가출한 것으로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무독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백정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를 하고 나갔다.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던 연무독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무백이와 남궁세가의 손님이 온다더니……. 그전에 손을 쓴 건 아니겠지?”
십 년 전 남궁세가로 갔던 연무백이 오랜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다.
연무백만 오는 거면 상관없다.
문제는 남궁세가의 자제들이 연무백과 함께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십 년간 적하를 가두어 둔 사실이 들통나면 와룡장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백미주의 성격상 그걸 용인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오기 전에 적하를 처리한 걸까?’
“흐음!”
연무독의 입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아는 백미주라면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
백호대는 백미주의 명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사람들이었다.
쪽문을 부숴 놓고 적하가 달아났다고 하는 건 일도 아니지 않은가!
막상 적하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양심에 가책이 왔다.
“하아! 형님, 작은 형수. 미안하게 됐소. 저승에 가면 무릎 꿇고 사죄하리다.”
연무독은 잠시 망자들에게 사죄를 하고 연적하에 대한 생각을 떨쳐 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백미주가 전권을 장악한 이후 그의 입지는 더욱 쪼그라들어 이젠 집사에 불과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총관 연무독은 가출한 조카를 찾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서다.
그 뒤로 사흘이 지났다.
인근을 헤집고 다니던 백호대와 와룡장의 무사들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백미주는 그깟 어린아이 하나 찾아오지 못하냐고 난리를 쳤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실 백미주는 연적하가 살아 있어도 빌어먹다 끝날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여섯 살 때부터 십 년간 창고에 갇혀 있던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을 테니까.
***
연적하가 가출하고 칠 일 후.
굳게 닫혀 있던 와룡장의 대문이 모처럼 활짝 열렸다.
백미주는 십 년 전 남궁세가의 손님을 맞이하던 날처럼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정오 무렵.
마차 한 대가 와룡장 앞에서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이 남 일 녀는 와룡장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청운검 남궁천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어구구! 팔다리야. 삭신이 다 쑤시네. 연 사제, 빨리 들어가서 인사 올리지 않고 뭐하나?”
이제는 장성한 연무백이 거뭇하게 돋아난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사형, 와룡장이 엄청 큰 줄 알았는데 작아서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그만 놀라게. 사제가 돌아왔으니 이제 낙양에서 제일 큰 무가(武家)가 될 테니까.”
그러자 연무백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낙양이라고요? 아닙니다. 제 목표는 하남성 제일의 무가입니다.”
“성(省)의 패자(覇者)는 혼자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야. 무림의 세가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줄 아나? 그렇지 않니? 연아야?”
남궁연은 남궁천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잔한 눈으로 와룡장의 나지막한 담장을 쓸어 볼 뿐이었다.
이 남 일 녀를 발견한 문지기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안채에서 백미주를 필두로 연씨 일족이 쏟아져 나왔다.
멀리서 연무백을 발견한 백미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청년 연무백은 한눈에 봐도 청년 고수의 풍모가 느껴졌다.
무가에서 자란 백미주는 큰아들이 고수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무백아!”
백미주의 부름에 연무백이 황급히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어머니, 소자 십 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허리를 세우는 연무백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무림 세가 중에 으뜸이라는 남궁세가에서 자그마치 십 년 동안 무공을 연마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장하다, 내 아들. 함께 오신 분들은 남궁세가의 귀한 손님들이 아니십니까?”
백미주의 눈이 재빨리 남궁천과 남궁연을 쓸었다.
얼굴에 십 년 전의 모습이 남아 있어 남궁벽의 아들과 딸이라는 걸 바로 알았다.
스물여덟 살인 남궁전은 소싯적의 연무룡처럼 절세고수로 보였다. 실제로 강호에서 청운검의 별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옆에 선 아리따운 아가씨는 열여덟 살인 남궁연이다. 굴곡이 선명한 그녀의 몸매는 같은 여자가 봐도 샘이 날 정도다.
남궁천이 정중하게 습을 하며 인사했다.
“숙모님, 천입니다.”
“…….”
남궁연은 묵례를 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꽃 같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던 백미주는 뒤늦게 남궁연의 괴팍한 성격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십 년 전에도 저러더니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백미주의 뒤에 서 있던 연승백과 연설주가 쭈뼛쭈뼛 앞으로 나섰다.
“형님.”
“오라버니.”
연무백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다들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다. 승백이 너 구천검에 진전은 있었느냐?”
“그럭저럭요. 형님은 좀 어떻습니까?”
“백부님의 도움으로 육 성의 성취를 얻었다. 백부님은 앞으로 십 년 안에 십 성을 이룰 것이라고 하셨는데……. 어떨지 모르겠구나.”
벌써 육 성이라는 말에 연승백의 입이 쩍 벌어졌다.
“육 성요? 헐!”
부친인 연무룡이 무림에 나갈 때 구 성 경지였다고 들었다. 연무백의 나이가 스물넷이니 기재라던 아버지와 비슷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그토록 염원하던 와룡장의 부흥도 머지않은 셈이다.
뿌듯한 얼굴로 형제간의 대화를 지켜보던 백미주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참, 내 정신 봐.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조카님들도 안으로 들어가세요.”
백미주는 남궁세가의 이름에 눌려 조카들을 상전 받들듯 했다.
남궁천이 어색한 얼굴로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남궁연은 당연하다는 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걸 싫어하는 아이가 웬일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궁천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다.
남궁연이 남궁천의 옷깃을 잡았다.
남궁천은 움찔 놀라 남궁연을 돌아보았다.
남궁연의 시선이 연무백, 연승백, 연설주를 차례로 보고는 다시 남궁천에게로 향했다.
그제야 남궁천은 동생의 뜻을 알았다.
“숙모님, 막내 동생이 보이지 않는군요?”
남궁천은 넷째의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백미주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며칠 전에 훌쩍 가출을 하고 말았지 뭔가요. 큰형이 성공해서 온다는 말에 자극이라도 받은 건지……. 그동안 방에 틀어박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거든요.”
“가출요?”
남궁천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자기 자신만 해도 한차례 가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한기가 오싹하고 들었다.
흠칫 놀라 보니 남궁연이 전신에서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남궁천은 급히 동생의 어깨를 다독였다.
“하하! 연아. 너무 놀랄 것 없다. 나도 가출한 적이 있지 않느냐?”
“흥!”
남궁연의 냉소에 이번에는 연무백이 어깨를 움찔하고 떨었다.
“사, 사저, 왜 그래?”
지금 연무백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저인 남궁연은 자신보다 네 살이나 어리지만 무공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그녀에게 자신은 상대가 안 된다.
오직 사형인 남궁천만이 그녀를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남궁천은 여동생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사람이다. 결국 여기서 남궁연이 화를 내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뜻이다.
‘사저가 왜 저러는 걸까? 한번 틀어지면 몇 년을 가는 사람인데…….’
솔직히 연무백이 남궁벽 다름으로 어려워하는 사람은 남궁연이었다.
남직례성에서 그녀의 별호는 화용독심.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혹자는 ‘꽃처럼 말이 없다’고 과묵함을 비웃기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독심에 대해서만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남궁연은 연무백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한편 갑작스러운 남궁연의 냉소에 백미주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반푼이는 왜?’
그러고 보니 십 년 전의 어린 나이에도 지금처럼 삐딱했던 것 같다.
백미주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연 조카님,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나요?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남궁연을 대신해서 남궁천이 나섰다.
“하하, 막내가 가출했다는 말에 놀라서 그러는 것 같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 연이는 가끔 집에서도 이런답니다.”
그러나 그의 변명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빠드득. 싸가지 없는 년. 우리 와룡장이 얼마나 하찮게 보였으면 제 집에서 하던 버릇을 그대로 하겠나!’
속으로 이를 박박 갈면서 백미주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럴 수 있지요. 저도 적하가 가출을 해서 깜짝 놀랐으니까요. 그 나이 대의 아이들 생각은 알 수가 없어서……. 물론 내가 친모가 아니라서 미흡한 것도 있지만.”
잠시 눈치를 살피던 백미주가 처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사람을 풀어서 언사 일대를 이 잡듯 뒤졌는데…….”
백미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다.
갑자기 남궁연이 백미주를 스치고 대문 안쪽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당황한 남궁천이 황급히 동생의 뒤를 따라갔다.
뒤늦게 백미주와 연씨 일가 사람들이 우르르 집 안으로 몰려갔다.
백미주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남궁연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십 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저 아이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것 같다.
어쩌면 이렇게 상성이 안 맞을 수가 있나!
며느리로 맞아들이기는커녕 친하게 지내기도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