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61
861회. 그러다 죽는다
오월 초.
청성파 산문 앞 서촉관(西蜀館).
“뭐? 떠났다고?”
얼굴에 칼자국이 깊게 난 무림인이 황망한 얼굴로 서촉관 주인을 보았다.
사내의 범상치 않은 얼굴에 기가 질린 주인이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열흘쯤 전에 별채를 비우셨습니다. 석경장으로 돌아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칼자국, 무쌍혈귀 금우가 계산대를 주먹으로 ‘쾅!’ 내리찍었다.
식당에서 식사 중이던 손님들은 사내들의 기세에 눌려 쳐다보지도 않았다.
씩씩거리던 무쌍혈귀가 뒤쪽에 있던 혈제 종리목을 향해 돌아섰다.
“채주님. 태상호법님이…….”
“됐다. 잠시 쉬어야겠다.”
종리목이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휘저은 뒤 창가의 자리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가자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종리목은 방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에 철퍼덕 걸터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눈두덩을 덮고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의 육체와 정신은 누적된 피로와 모멸감으로 터지기 일보 적진이었다.
서안을 시작으로 성도를 거쳐 청성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하지만 번번이 연적하와의 만남은 빗나갔다.
연적하는 제가 오라고 불러 놓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육체의 피로는 당연하고, 이젠 수치심에 견디기 어려웠다.
태상호법이 아니라 설사 총채주라 해도 자신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됐다.
울컥한 그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씨벌. 다 죽여 버리고 싶네…….”
빈말이 아닌 듯 그의 전신에서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측근들은 혹시라도 혈제가 눈이 돌아가 살수를 쓸까 봐 촉각을 곤두세웠다.
무료하다고 살인을 하는 혈제가,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측근들의 예상과 달리 혈제는 발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게 감정을 가라앉혔다.
살기를 지운 그는 갑자기 축 늘어졌다.
그리고 텅 빈 눈으로 맞은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연무백을 응시했다.
“서 있지 말고 앉아라.”
뜬금 없는 그의 배려가 미심쩍었지만 연무백은 그의 앞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혈제의 포로인 그가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점입가경이라더니 혈제는 주인을 불러 요리를 시키기까지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혈제는 마치 음식을 먹으러 온 사람처럼 식사에 열중했다.
하지만 연무백은 오히려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혈제라면 배불리 먹인 뒤에 도살하듯 자신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성산까지 오는 동안 혈제의 손에 죽은 사람이 셋이나 됐다.
식사를 마친 연무백이 막 찻물로 입을 헹굴 때다.
뜬금 없이 혈제가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동행 기간이 길어지면서 연무백은 환갑을 넘긴 혈제에게 존대를 했다.
안면이 익으니 늙은 그에게 하오체를 사용하기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태상호법 말이다. 일부러 피하는 것 같지 않으냐?”
“적하가 노선배님을 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듯 허탕을 칠 리가 없지 않느냐? 오라고 했으면 기다려야 할 텐데……. 매번 한발 빠르게 떠났다니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그가 사람을 피해 다녔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역시 그렇지?”
혈제는 이내 수긍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태상호법이 자기를 피해 다닐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모멸감이 느껴졌다.
태상호법이 자신을 발가락의 때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아서다.
혈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의 측근들은 또다시 바짝 긴장한 얼굴로 눈알을 굴렸다.
마치 임박한 화를 피하기 위해 적당한 제물을 찾는 표정들이다.
보다 못한 연무백이 한마디 툭 던졌다.
“길이 계속 어긋나고 있는데, 차라리 상단처럼 나를 놓아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적하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도 그거잖습니까?”
그러자 혈제가 연무백을 힐끔 보더니 같잖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닙니까?”
“너는 태상호법의 형제라면서 정작 그에 대해 잘 모르나 보구나.”
“모른다고요?”
“태상호법의 말은 절대적이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달이뜨는 것과 같지. 지금 너의 말은 밤에 해가 떴다고 하는 것과도 같다.”
혈제가 씁쓸한 얼굴로 거리를 내다 보았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공치사를 하려고 시작한 일이 도리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지금처럼 태상호법과 어긋날수록 그의 뜻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것은 자신의 말에 따르거나, 거역하라는 거다.
연무백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른다.
태상호법이 원하는 게 그였다면 상단과 함께 풀어 주라고 했을 게다.
그런데 자신을 콕 찍어 ‘연무백을 데리고 오라’ 했다.
그건 ‘그의 말’에 따르라는 소리다.
강호에 악명이 쟁쟁한 혈제로서 느끼는 모멸감과 태상호법에 대한 두려움이, 마치 산정상에서 굴린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그런 양극단의 갈등 속에 혈제의 속은 오늘도 썩어 가고 있었다.
연무백이 무심코 말했다.
“이러다가 석경장까지 가는 거 아닙니까?”
순간 혈제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청성산에서 석경장이 있는 남직례 성까지 삼천오백 리(약 1,370킬로미터)가 넘기 때문이다.
‘씨벌! 진짜 다 죽여 버릴까.’
***
사천성.
타강(陀江).
노주(涉州)를 향해 구불구불 흐르는 강줄기 위로 배 한 척이 떠 갔다.
삿대질로 뱃머리를 슬쩍슬쩍 틀던 사십 대의 사공이 부러운 눈으로 한쪽을 힐끔거렸다.
태어나 처음 보는 미녀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가족들로 보이는 남녀노소가 모였는데 다들 행복한 얼굴들이다.
가족이야 자신에게도 있으니 별 느낌 없지만 미녀만큼은 죽도록 부러웠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나직이 말했다.
“그러다 죽는다.”
깜짝 놀란 사공이 돌아보자 언제 다가왔는지 염소수염의 노인이 쪼그리고 있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새꺄. 가모님을 힐끔거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고.”
“…….”
사공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나름 눈치껏 봤는데 어떻게 알고 그러는지 심장이 벌렁거렸다.
“저분이 누군지 안다면 보라고 해도 못 볼 게다. 알려 주랴?”
“누구신데요?”
“아무리 너 같은 놈이라도 십전무후라는 별호를 들어 보았겠지?”
“석경장의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법 귀가 트였구나. 맞다. 저분이 바로 석경장의 안주인이시다. 그럼 내가 누군지도 알겠느냐?”
구천노도 심통이 얄밉게 자란 염소 수염을 손가락으로 비비적거렸다.
“헉! 구, 구천노도 심통 님이십니까?”
“맞다. 눈깔 관리 잘해라. 우리 연 공자님이 아까 네놈 눈깔을 봤으면 바로 뽑혔다. 흐흐흐.”
심통이 귀엽다는 듯 사공의 뒤통수를 툭툭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사공은 경기하듯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자신의 배에 탄 손님들의 정체를 알게 된 사공은 감히 곁눈질도 하지 못했다.
남천 연적하의 경우 세간에 고강한 무공보다 악랄함이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사자인 연적하가 알면 기막힐 일이지만 말이다.
소문이라는 게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연적하의 경우 ‘삼장불립’과 ‘십두마병의 척살’로 그 정도가 심했다.
연적하가 틈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이 여리니, 착하다느니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도리어 그에 대한 반감을 키울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남궁연이 악마에게 시집갔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선미(船尾)에서 강바람을 맞고 있는 연적하에게 남궁연이 말했다.
“어때? 마차보다 배를 이용하니 훨씬 좋지?”
“그러네요.”
연적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게 지겹다’고 했더니 남궁연은 ‘그럼 배를 이용하자’고 했다.
육로보다 돌아가지만 몸이 편한 게 최고라는 그녀의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당장 석경장에 화급을 다툴 정도로 급한 일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두 사람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월아와 금아는 아기를 돌보았다.
물론 하루 종일 인형처럼 아름다운 아기의 주변을 맴돌던 두 소녀가 자청해서 한 일이었다.
월아가 아기의 두 눈을 보며 중얼거렸다.
“금아야. 아기 눈을 좀 봐. 보석도 이보다 아름답지는 못할 거야.”
“가모님을 닮았으니 당연하지.”
그러자 월아가 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생각에 아기가 크면 가모님보다 더 예쁠 것 같아. 지금도 이렇게 눈을 떼지 못하겠는걸?”
“풋! 가모님에게 이른다?”
“이르기만 해 봐. 그럼 나는 스승님에게 네가 고자질쟁이라고 말할 거야.”
“스승님에게 말하는 것도 고자질이잖아?”
“그런가? 그럼 우리 둘 다 고자질은 하지 말자. 어때?”
월아의 회유에 순진한 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공을 괴롭히던 심통은 바람결에 실려 오는 월아와 금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석경장의 식솔이 된 이래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이 가장 평화로운 것 같다.
문득 그는 기원했다.
지금의 이 평화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먹구름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삿대질을 하던 사공이 심통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르신. 비바람이 몰려오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다니?”
“나루터에 배를 대고 비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으면 해서요.”
“배를 댈 나루터는 있고?”
“조금만 더 가면 협만촌입니다. 그곳에 배를 댈 만한 나루터가 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배가 비바람을 버티지 못할 것 같으냐?”
“잠깐 지나가는 비면 모를까? 지금처럼 대낮에도 컴컴할 정도는 좀 그렇습니다. 게다가 아까부터 바람도 점점 강해지고 있어서…….”
“비바람이 지나고 난 뒤에 가자?”
“예”
“사공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연 공자님에게 말씀을 드려보마.”
자리에서 일어난 심통은-아무런 이유 없이-건장한 사공의 뒤통수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후려치고는 선미로 이동했다.
“공자님.”
남궁연의 어깨를 안고 뭐라고 열심히 소곤거리던 연적하가 고개를 돌렸다.
“왜?”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한데, 사공이 나루터에 배를 댔으면 하네요? 어떻게 할까요?”
“배에서는 사공의 말을 따라야지. 그러라고 해. 그런데 나루터에 쉴 곳은 있대? 객점이나 주막 같은 거 말야.”
“그건 안 물어봤습니다. 없으면 그냥 갈까요?”
“그냥 가다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심 노인이 월아와 금아 챙길 수 있어?”
“…….”
심통이 뻘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게 생겼다.
“쯧쯧! 저럴 때 보면 무림 초출 같단 말야. 쉴 곳 없으면 배에 남아서 쉬면 되지. 그냥 갈까요는 뭐야? 일단 나루터에 도착하면 배를 대라고 해.”
“예.”
심통은 입술을 삐죽이며 선수로 돌아갔다.
“공자님께서 나루터로 가란다. 협만촌이라는 곳에 쉴 곳은 있느냐?”
“없습니다. 쥐똥만 한 나루터라 그 흔한 노점상도 없는 곳입니다.”
“쥐똥만 한 곳에 배는 어찌 대려고?”
“어떻게든 대 봐야지요.”
사공이 부지런히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그들이 탄 배보다 뒤에서 몰아쳐 온 비바람이 훨씬 빨랐다.
휘우우웅-.
쏴아아아-.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강풍과 폭우가 배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