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65
865회. 나를 태상호법이라고 부르지 마
후왕수채는 양자강의 지류인 모패하에서 활동하던 수적들이다.
그러던 중 세가 불어나자 점차 남하하여 양자강까지 활동의 폭을 넓혔다.
선수에 우뚝 서서 정면을 응시하던 후왕(猴王) 황보력이 고수(鼓手)에게 소리쳤다.
“북소리가 시원치 않다!”
그 소리에 뜨끔한 고수가 미친 듯 양팔을 놀렸다.
둥! 둥! 둥! 둥! 둥-!
북소리에 맞춰 노질도 빨라졌다.
쏜살처럼 튀어나간 목선이 자기보다 두 배쯤 큰 범선 옆에 바싹 붙었다.
아직 일 장쯤 거리가 남았지만 황보력은 참지 못하고 거구를 날렸다.
휘리릭-.
황보력이 멋들어진 자세로 범선 갑판에 떨어져 내렸다.
곧이어 사십여 명의 도적들이 차례로 건너와 자리를 잡았다.
신검문, 신녀궁을 포함한 무림인들과 도적들 간에 팽팽한 기세 싸움이 시작됐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해어화 이진과 금아가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적들이 갑판 위에까지 올라오자 이진이 말했다.
“꼬마야, 도적들을 물리치고 계속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녀는 소녀가 승낙할 줄 알았다.
지금 당장 도적들을 쫓아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당장 빌라고 했어요!”
소녀가 버럭 소리치며 다시 달려들었다.
이진은 어린 소녀의 공격을 무시하지 못하고 마주 응대했다.
대충 상대하다가 신녀궁 제자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어서다.
다시 이진과 금아의 싸움이 시작됐다.
파파파팟-!
날카로운 타격음은 두 사람의 싸움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갑판 위에 대치하고 있던 무림 방파와 수적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황보력이 황당한 얼굴로 부채주에게 말했다.
“지금 저게 뭐 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씨펄! 우리 후왕수채가 왕림하셨는데 저들끼리 쌈질이라고?”
“어떻게, 중지시킬까요?”
부채주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퍽!’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떨어졌다.
거리를 벌린 이진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어리다고 봐주었더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정녕 피를 보고 싶으냐!”
말과 함께 이진이 검을 살짝 뽑았다가 꽂았다.
짤깍.
이제부터 맨손이 아니라 칼을 쓰겠다는 협박이다.
당가에서 나와 아직 무기를 장만하지 못한 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맨손으로 칼을 쓰는 여자와 싸울 자신이 없어서다.
어린 소녀가 머뭇거리자 이진은 이쯤에서 끝내고 도적들을 상대할 요량으로 돌아섰다.
막 걸음을 떼어 놓으려는 그녀의 귓가로 차가운 사내 음성이 들려왔
“어이! 누구 마음대로 가?”
이진은 이를 갈며 돌아섰다.
해어화라는 별호를 얻은 뒤로 자신을 저런 식으로 부른 사람은 없었다.
‘죽여 버리겠어.’
그러나 이진의 그런 다짐은 아기를 안고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사라졌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미녀 부인을 둔 것 외에 존재감이 전혀 없던 남자였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운이 온몸을 옥죄었다.
‘헉! 이, 이건…….’
단지 의형살인(意形殺人)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강력했다.
남자의 기운에 잠식당해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문득 어린 소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들 지금 우리 가모님에게 뭐라고 했어요!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해요!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다 해도 되는 줄 알아요?
-흥! 그까짓 신녀궁이 뭐가 대수라고 그래요? 당장 우리 가모님에게 무릎 꿇고 빌어요!
-어서 빌지 않고 뭐 해요! 정말 싹 다 죽고 싶어요?
그러고 보면 어린 소녀들은 화가 난 와중에도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었던 것 같다.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하자 무릎이 후들거렸다.
여자를 노려보던 연적하가 허공에서 천둔검을 꺼내 금아에게 던졌다.
가볍게 날아간 천둔검이 마치 벌새처럼 금아의 앞에 멈춰 섰다.
금아가 활짝 웃으며 천둔검을 잡았다.
사조가 아끼는 법기(法器)를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연적하의 시선이 다시 여자를 향했다.
“내가 끝났다고 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검술에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해 봐.”
곧이어 몸을 옥죄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자유를 얻었지만 이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검을 꺼낸 것도 놀랍지만, 그 뒤에 펼친 것은 이기어검이었다.
의형살인에 이기어검까지, 도저히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신녀궁 전체가 덤빈다 해도 저 남자를 어쩌지 못하리라.
이진은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닥치고 검술이나 보여 봐. 내 처를 기녀라고 했지? 신녀궁의 검술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보자고.”
“그것은…….”
“닥치라고 했다. 자꾸 말만 앞세우면 입을 찢어 버린다.”
“…….”
이진이 핼쑥해진 얼굴로 어린 소녀의 앞에 섰다.
금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늦었어요. 장주님 말씀대로 칼이나 뽑아요.”
이진은 마지못해 검을 뽑았다.
그녀의 검끝이 태풍을 만난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금아가 ‘차핫!’ 하는 맑은 기합과 함께 이진에게 짓쳐 들어갔다.
콰직! 콰직! 콰직-!
이진의 검이 무처럼 썰려 나갔다.
두 사람의 싸움은 금아가 검술을 선보일 틈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이진의 턱 밑으로 천둔검이 파고들었다.
금방이라도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모습에 신녀궁 제자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천둔검을 거둔 금아가 차갑게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 가모님에게 죄를 지었으니 가모님의 처벌을 달게 받으세요.”
돌아선 금아는 천둔검을 두 손으로 연적하에게 바친 후, 월아와 함께 남궁연의 뒤에 섰다.
범선의 갑판이 조용해졌다.
호광성의 무림인들과 후왕수채의 도적들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그들 역시 아기를 안고 있는 사내가 만들어 낸, 이해하지 못할 장면을 본 까닭이다.
허공에서 검을 만들어 낸 술법과 이기어검, 그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저 놀라운 사내의 처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주목했다.
차가운 눈으로 신녀궁 제자들을 응시하던 남궁연의 신형이 갑자기 ‘퍽!’ 하고 사라졌다.
이윽고 ‘철썩! 철썩!’하는 타격음과 함께 신녀궁 여제자들이 나가떨어졌다.
그제야 절세미녀의 무위가 저 신비한 사내 못지않음을 깨달은 호광성 무림인들과 후왕산채 도적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온 남궁연이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신녀궁이라고 했느냐? 너희 몸에 금제를 가했으니 내공을 쓰지 못할 것이다. 일 년 후 석경장으로 찾아 오면 금제를 풀어 주겠다.”
‘석경장’이라는 말에 신녀궁 여제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진이 떨리는 음성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석경장이라고 하심은……. 혹, 합비 여강현의 그 석경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남궁연은 답해 주지 않고 연적하에게 아기를 받아 선실로 들어갔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는 이진에게 금아가 말했다.
“당신이 말한 그 석경장이 맞아요. 당신 앞에 계신 분이 석경장의 장주님이시고요. 이제 누구에게 기녀라고 한 줄 알겠어요?”
“헉! 남천 대협? 용서해 주세요! 신녀궁의 제자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닐…….”
“닥치라고 했지.”
살기 충만한 연적하의 말에 이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신녀궁 여제자들을 쓸어 보던 연적하의 시선이 호광성 무림인들을 지나 도적들에게 이르렀다.
순간 후왕 황보력이 허리를 격하게 꺾으며 외쳤다.
“후왕수채의 후왕 황보력이 태상장로님께 인사 올립니다!”
연적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희도 녹림이냐?”
“아직은 아닙니다만 조만간 구강의 장강수채에서 추천을 해 주기로 했습니다.”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의 일원이 되려면 기존 녹림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과거 오봉산채도 대별산채의 추천을 통해 녹림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배에 호광성 무림인들이 제법 많던데 뭘 믿고 온 거야?”
“개새끼들은 많아 봐야 개새끼들 아닙니까? 후왕은 개새끼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연적하가 황보력을 힐끔 보았다.
‘원숭이 왕[猿王]’이라는 별명답게 얼굴에 털이 수북했다.
“적당히 해. 먹고살려고 수적이 됐지, 사람 죽이려고 수적이 된 거 아니잖아.”
“예! 그런데 저 계집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보력이 의기소침한 얼굴로 서 있는 신녀궁 여제자들을 가리켰다.
“왜?”
“저에게 맡겨 주신다면, 태상호법님께 지은 대죄를 몸으로 속죄하게 끔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계집들을 호광성의 기루에 팔면 돈도 벌고, 교훈도 내릴 수가 있…….”
“어휴! 저거도 아주 싹수가 노랗네. 야! 인마!”
“예?”
갑작스러운 호통에 황보력이 놀란 얼굴로 연적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석경장의 장주야. 녹림의 도적이 아니라고. 알아?”
“예? 예…….”
“그런데 나한테 뭐? 신녀궁 여제자들을 기루에 팔자고? 야! 내가 여자 장사나 하는 하오문으로 보이냐? 그런 소리를 하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자신이 하오문 취급당했다고 생각한 연적하가 황보력을 노려보았다.
“아, 아닙니다. 용서해 주십쇼!”
그러나 연적하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 원숭이 같은 새끼야! 나를 대체 뭐로 보고 나한테 그따위 말을 해?”
“소, 속하는 그저 저년들이 태상호법님께 죄를 지어서…….”
“나를 태상호법이라고 부르지 마! 이 짐승아! 내가 왜 네 태상호법이야? 너 녹림이야?”
“아, 아닙니다.”
별일도 아닌데 연적하가 펄펄 뛰자 황보력은 속으로 구시렁댔다.
‘아니 씨벌, 자기한테 잘못한 년들을 기루에 팔아 주겠다는데 왜 저래?’
벌도 주고, 돈도 벌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인데 왜 난리인지 모르겠다.
황보력의 입이 툭 튀어나온 걸 본 연적하가 버럭 소리쳤다.
“너! 속으로 내 욕하고 있지!”
“안 했습니다.”
“안 하긴 뭘 안 해. 이마에 욕 했다고 떡하니 써 있구만.”
그 말에 깜짝 놀란 황보력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열심히 비벼 댔다.
욕한 것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에라! 이 화상(畵像)아!”
‘울컥!’한 연적하가 손을 휘저었다.
무형의 기운이 뻗어나가 황보력의 전신 대혈을 두드렸다.
퍼퍼퍼퍽-.
강력한 타격에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황보력이 끝내 풀썩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부채주가 황급히 황보력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남천 대협! 고정하십시오!”
제 딴에는 의리로 한 행동이지만 그건 연적하의 화를 부채질했다.
녹림에서 윗사람이 누군가에게 교훈을 내릴 때 끼어드는 아랫사람은 없다.
의리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윗사람의 분이 풀려야만 끝날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계속해서 무시당한다고 생각한 연적하는 급기야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크크크큭!”
유년 시절을 남다르게 보낸 연적하는 무시당하는 걸 참지 못한다.
그는 사실 ‘여자’와 ‘어린아이’와 ‘노인’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무시하는 ‘여자’와 ‘어린아이’와 ‘노인’을 싫어할 뿐이다.
신녀궁의 여제자들에 이어 후왕수채의 두 도적이 그런 그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