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7
87회. 너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개봉.
봉황루(기루).
포목점 주인 장문호가 추엽진의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아우, 마셔. 마시고 죽자고. 인생 뭐 있어?”
조금 취한 듯 추엽진의 술잔에서 술이 넘쳐흘렀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장문호의 입에서 끝내 ‘에이, 씨발’을 하고 욕이 흘러나왔다.
임지령과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한 지 오 년이다.
그 긴 세월을 함께 지내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기기 마련.
하물며 임지령은 길에 널린 여자들처럼 밋밋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보다 더 아름답고 빛이 났다.
그래서 처를 압박해 몇 번이나 ‘함께 살고 싶다’는 뜻을 표시했다.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하더니 얼마 전부터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방긋방긋 웃었다. 아이들이 크니 이제야 좀 적적해진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합방도 가능한 때에, 남자가 돌아온 것이다.
마치 손안에 잡고 있던 탐스러운 과일을 흘린 기분이다.
지난 수십 년간 느껴 본 적 없는 아깝고, 분하고, 애타는 심정에 피가 마르는 느낌이다.
날카로운 눈매의 추엽진이 키득키득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형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런 거 없어. 꼭 일이 있어야 술을 마시나? 젠장.”
말과 달리 끝내 장문호의 입에서 무거운 탄식이 비집고 나왔다.
그러자 추엽진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왜요? 누가 그렇게 형님 속을 긁어 놓았습니까? 이 아우에게 말씀해 보십쇼.”
“하아!”
장문호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추엽진을 바라보았다.
추엽진은 사해상방의 호위무사로 손 씀씀이가 잔혹한 사람이다. 난다 긴다 하는 개봉의 낭인들도 그와 눈 마주치기를 꺼려할 정도로.
방주의 소개로 안면을 트게 된 뒤 가끔씩 불러서 술과 여자를 제공했다. 한번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거금이 깨졌지만 그에게 쓰는 돈은 아깝지 않았다.
왜냐고?
가게에 와서 진상을 떠는 손님도 없었고, 밀린 외상값도 쉽게 받아 냈다. 단지 추엽진과 호형호제한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추엽진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괜히 가슴 한구석이 근질거렸다.
“사실은 말이야…….”
***
다음 날 아침, 추엽진은 일어나자마자 사해상방 방주 상재용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냐?”
“포목상을 하는 장문호 말입니다. 어젯밤 저에게 재미있는 부탁을 하더군요.”
“말해 봐라.”
“돌보고 있는 여자가 있답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십이 년 전에 사람을 죽이고 야반도주를 했고요. 최근에 그 여자를 첩실로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처자식을 버리고 달아났던 남자가 돌아왔답니다.”
“흐흐흐.”
기가 막힌 사연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상재용이 물었다.
“그러니까 그 남편을 없애 달라?”
“예.”
추엽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장문호는 여자와 살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지만, 사실 같은 소리였다.
“그 포목점을 어떻게 가져올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제 손으로 떠다 바치겠다는 건가?”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좀 있습니다.”
“뭐냐?”
“돌아온 남편이라는 자가 얼마 전에 방주님이 고용한 두 남자 중 하나입니다.”
“용희루로 보낸 낭인들 말이냐?”
“예. 풍연초가 그자입니다.”
“흠! 풍연초라. 너라면 풍연초와 포목점 둘 중에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당연히 포목점이지요. 기루를 지킬 낭인은 널렸지만 포목점은 하나니까요.”
“좋은 방도는 있고?”
“후후.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 그런 것 아닙니까? 풍연초를 죽이고 장문호가 사주한 것을 밝히겠습니다. 그럼 포목점은 방주님 것이 될 겁니다.”
“흐음, 참으로 무서운 말이로군. 나는 모르는 일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상재용이 슬쩍 발을 뺐다.
추엽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방주님은 은자 오백 냥만 융통해 주십시오.”
상재용이 탁자 위에 은자가 든 목함을 올리며 말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 일과 무관하다. 누군가 이 돈에 대해 묻는다면 도둑맞은 것이라 말할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추엽진이 히죽 웃으며 목함을 움켜 잡았다.
장사꾼은 아무리 대범한 척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저렇게 몸을 사린다. 덕분에 자신과 같은 칼잡이들이 편하게 먹고사니 고마울 뿐이다.
***
개봉.
천향반점.
추엽진이 목함을 들고 천향반점으로 들어갔다.
아직 점심을 하기에 이른 시간인지라 식당 안에는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 들어가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쥐새끼처럼 생긴 점소이가 물병을 들고 와 살살거리며 말했다.
“헤헤, 추 대협, 이 방의 요리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릅니다. 알고 계시지요?”
“이놈. 나와의 거래가 처음이 아닌데 웬 설레발이냐? 냉큼 가서 삼 공자나 오라고 해라.”
“분명히 삼 공자님이라고 하셨습니다요?”
“그래. 귓구멍이 막혔느냐?”
“예, 예.”
굽실거리던 점소이가 물러갔다.
잠시 후 삼십 대로 보이는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혼탁한 눈으로 추엽진을 일견한 후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살인귀 추엽진. 알고 있겠지만 천향반점의 죽방에서는 요리를 주문받지 않는다.”
“삼 공자. 나도 인육에는 관심이 없소.”
순간 삼 공자 심영춘의 눈에서 안광이 번득였다.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천향반점은 소수의 아주 특별한 손님들에게 인육을 제공하는 흑점이다. 하지만 그들은 흑점에 그치지 않고 살인 청부도 함께 받았다.
천향반점에 있는 매난국죽의 사군자(四君子) 방 중 죽방에서 그 일을 했다. 그 죽방의 책임자가 바로 천향반점의 삼 공자 심영춘이었다.
심영춘이 살기를 흘리자 추엽진은 흠칫 놀라 굳었다.
심영춘의 별호는 유령검.
귀신처럼 생명을 앗아 간다고 하여 붙은 별호다.
“흐흐. 그렇다고 쫄기는. 원하는 자가 누구냐? 누굴 요리해 주면 되지?”
특별히 요청한 경우가 아닌 이상 죽방의 살수들은 희생자를 천향반점에 넘겼다. 그럼 죽은 자의 흔적조차 남지 않아 일석이조였다.
“용희루의 경비를 맡고 있는 풍연초요. 탁고명이라는 자와 함께 다니니 주의해야 할 거요.”
“흥! 용희루는 너희 사해상방의 것인데, 사해상방의 무사를 죽여 달라는 거냐?”
“죽방은 죽이고 돈만 받으면 되는 거 아니오?”
“좋아. 출신은?”
“둘 다 와룡장 제자에게 무공을 배웠소.”
“낙양의 그 와룡장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소.”
눈을 반개하고 뭔가를 생각하던 심영춘이 말했다.
“은자 칠백 냥.”
“삼 공자 눈에는 내가 병신으로 보이오? 고작 삼류 낭인 하나를 죽이는 데 칠백 냥이라니?”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그 둘이 붙어 다니는데 어찌 하나만 죽이라 하느냐?”
“쯧, 육백 냥으로 합시다.”
추엽진은 삼 공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지라 양보했다.
그러나 심영춘은 물러서지 않았다.
“칠백 냥. 돈이 아까우면 직접 손을 쓰든지. 시체는 우리가 깨끗하게 처리해 줄 수 있는데.”
삼 공자를 노려보던 추엽진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짜증 나지만 처음부터 상대가 부르는 대로 줄 수밖에 없는 거래였다.
“알겠소.”
“선금으로 사백 냥, 일 끝내고 삼 백 냥.”
추엽진이 목함에서 사백 냥을 꺼내 삼 공자 앞으로 밀어 내며 말했다.
“언제 시작할 거요?”
“그들은 칠 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알겠소. 나머지 돈은 일을 끝내면 드리겠소.”
“살인귀. 터럭만큼이라도 감추거나 속인 게 있다면, 너와 사해상방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헐, 그럴 일 없소.”
“…….”
심영춘은 추엽진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말없이 나갔다.
홀로 남겨진 추엽진이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고작 낭인 두 놈인데, 돈을 너무 쓰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
하남성.
이천현(伊川長).
낙양으로 뻗은 관도 위를 두 남자가 걷고 있다.
도문의 성지 무당산을 떠난 연적하와 자칭 구천노도 심통이다.
“공자님, 그러니까 그 무슨 검법이라고 하셨죠?”
“천둔검법.”
“아, 그랬지요. 너무 낯설어서 당최 입에 붙지를 않네요. 그 검선 여동빈의 검법이 무당파, 화산파, 전진파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
연적하가 영혼이 없는 얼굴로 대충 답했다.
무당산에서부터 심통은 계속 같은 질문을 해 대고 있었다.
검선의 무공을 왜 도교 문파에서 익히질 않느냐?
세 문파에 전해진 검법이 완전히 똑같으냐?
혹시 조금씩 다른 건 아닐까?
형태가 달라도 구결이 담겨 있으면 그건 천둔검법이냐? 등등…….
아니나 다를까? 심통의 비슷한 질문이 또 이어졌다.
“그 좋은 검법을 두고 왜 태극검, 매화검, 무극검만 가르치고 있는 겁니까?”
“몇 번을 말해. 못 익힌다잖아. 사람의 몸으로 익힐 수가 없는 무공이라잖아.”
“공자님은 한번 듣고 터득했다면서요?”
“내가 터득한 것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게 서로 다를 수도 있어. 어차피 나는 검결만 들은 사람이잖아. 몇 번을 말해. 나는 엉터리야. 그러니까 그들과 나를 비교하지 마.”
참다못해 연적하가 자학까지 하자 심통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야아, 벌써 가을도 저물어 가네요. 낙양에 도착하면 추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심 노인은 더 춥겠어. 살이 없어서.”
“흐흐. 아쉽게도 한서불침의 몸인지라 추위를 모릅니다.”
“그래도 겨울에는 두툼하게 입어야 해. 그런 게 겨울의 정취라고.”
“아, 예.”
두 사람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걸어갈 때다.
뒤쪽에서 마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앞에 사람이 보이면 속도를 줄일 만도 한데 마차는 그러지 않았다.
연적하와 심통은 황급히 길 밖으로 비켜섰다.
드드드드.
마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두 사람을 스치듯 지나갔다.
“퇫! 아니, 뭐 저런 것들이 다 있지?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에퇘퇘! 정말 못돼 처먹었네. 벼락이나 맞아라!”
연적하의 입에서 저주가 터져 나왔다.
둘은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은 뒤에야 터덜터덜 걸었다.
바람처럼 질주하는 마차를 봐서 그런지 둘 다 의욕을 상실한 얼굴들이다.
그렇게 일다경(약 30분)쯤 걸었을까?
허름한 반점을 발견한 연적하와 심통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뭐라도 먹고 갈까요?”
“쩝, 그래. 기운 달려서 못 걷겠다.”
반점으로 다가갈수록 두 사람의 인상이 구겨졌다.
반점 옆 으슥한 곳에 미친 듯 지나쳐 간 마차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심통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옛날 같았으면 반점에 뛰어 들어가 마부와 주인을 쳐 죽이고도 남았다.
연적하도 표독스러운 눈으로 마차를 노려보았다.
“심 노인.”
“예?”
“다음부터는 우리도 마차로 다니자.”
“……예.”
맥 빠진 얼굴로 대답하던 심통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 상황에서 연적하가 ‘우리도 마차로 다니자’고 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