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90
890회. 이 세상에 협객이 있을까?
검왕 남궁벽은 씁쓸한 눈빛으로 아들을 보았다.
이왕이면 아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러기는 틀린 것 같다.
목석같은 남궁연과 달리 어려서부터 정이 많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천아. 우리 남궁세가는 무림세가다. 무림세가들은 작게는 한 지역을 대표하지만, 궁극적으로 무림의 종주가 되기를 꿈꾼다. 너도 오대세가의 일원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았더냐? 오대세가의 목표도 결국은 칠파일문처럼 무림의 종주가 되는 것이다.”
“…….”
청운검 남궁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부친의 뜻을 알겠지만 마음이 영 불편했다.
자기가 감상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부친의 욕심이 과한 것일까?
“남직례성의 패자가 되는 것은 괜찮지만, 무림의 패자가 되는 건 안 된다는 것이냐? 남궁세가는 남직례성의 패자가 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도전을 물리쳤다. 그 과정에서 안타까운 희생이 없던 줄 아느냐? 그저 목표가 더 커졌을 뿐, 우리가 하는 일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남궁천은 암암리에 탄식했다.
아니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들은 입안에서만 뱅뱅 맴돌았다.
아버지의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오대세가 제자들은 ‘칠파일문을 뛰어넘자’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그것은 단지 무위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대세가는-칠파일문이 오랜 세월 독점하고 있는-무림에 대한 지배력을 원했다.
부끄럽지만 자신도 그런 말들을 오대세가 후기지수들의 모임에서 여러 번 했었다.
멍하니 듣고 있던 남궁천이 힘겹게 말했다.
“다 좋습니다. 돌이켜 보니 저도 오대세가의 모임에서 그런 소리를 했더군요. 하지만 호천맹을 희생시켜 무림의 종주가 된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건 네 바람일 뿐이다. 남맹이 마교와 부닥치면 호천맹은 마교와 싸울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너는 호천맹이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
“호천맹의 사자로 왔던 도산 진인을 기억하느냐? 그는 맹주인 무극상인의 투지를 일깨워 달라고 요청했다. 호천맹은 승패를 떠나 마교와 싸우기를 원한다. 적하의 무위를 확인하자마자 움직인 것도 그래서지. 그들은 남맹보다 먼저 마교와 맞붙기를 원할 게다. 남맹이 먼저 마교를 만나면 호천맹은 싸워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할 테니까.”
“그건 호천맹 맹주와 윗사람들의 생각이 아닙니까? 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일반 무인들입니다. 그들은 마교와 싸우기를 원치 않을 겁니다. 죽을 게 뻔하니까요.”
“황실이 백성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본 적 있느냐?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일반인들이 아니라, 황실과 고관대작들이야. 그리고 권력자들이 항상 최선을 선택하는 건 아니다. 때로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기도 한다. 호천맹이나 남맹의 지휘부들도 마찬가지다.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차 악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최악이 뭐기에 호천맹을 사지로 밀어 넣으려 하십니까?”
“남맹이 몰락하고, 오대세가가 다시 칠파일문을 섬기는 것이다. 지금 호천맹의 세를 꺾지 않으면, 남맹은 빠르게 몰락하고 말 게다.”
“적하가 있는 한…….”
“그가 남맹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가 무림 경영에 뜻이 없다는 건 너도 알 텐데.”
“그렇다 해도 적하 역시 아버지가 그 같은 이유로 호천맹의 희생을 수수방관했다는 걸 알면……. 크게 실망할 겁니다.”
“그러냐? 그렇다면 이러는 건 어떠냐? 이제 너도 내가 남맹을 위해 그런다는 걸 알겠지? 만약 적하가 평생 남맹의 일원으로, 남맹을 위해 일하겠다면 그의 뜻에 따르겠다. 그가 남맹을 위해 일하는 한 남맹이 몰락할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는 내가 생각한 대로 하겠다. 어떠냐? 적하를 설득할 자신이 있느냐? 네가 적하를 설득해 약속을 받아 내면, 밤을 달려서라도 무한으로 가마.”
“……말해 보겠습니다.”
남궁천은 부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남맹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악수(惡手)를 두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남궁천은 한 식경(약 30분) 만에 돌아왔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연적하와 진설하, 심통이 그를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형님. 갑자기 어딜 갔다 온 거예요? 이 마을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아니, 아버지를 만나고 왔다.”
“아…….”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표정이 좀 개운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결과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궁천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그동안 남맹의 고수들은 식당으로 다 들어갔는지 거리는 주민들 뿐이었다.
“잠시 저리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는데 괜찮지?”
남궁천이 가까운 나무 그늘을 가리켰다.
“저만요?”
그러자 진설하와 심통이 같이 갔으면 하는 얼굴로 남궁천을 빤히 보았다.
“다 가도 되고.”
남궁천은 진설하와 심통을 굳이 막으려 하지 않았다.
진설하는 가족이 될 사람이고 심통은 석경장의 식솔인 까닭이다.
“……그런 이유로 모용문 총사가 지체하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두셨더라고.”
남궁천은 슬쩍 연적하와 진설하, 심통의 눈치를 살폈다.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무덤덤한 얼굴이다.
“별로 안 놀라는 얼굴이네?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한참 동안 멍 했는데.”
“사실은 형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심 노인이 그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래?”
남궁천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심통을 보았다.
‘연륜이라는 게 정말 무섭구나.’
자신은 꿈도 꾸지 못했던 이야기를 심통이 알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요?”
“있었다. 아버지는 네가 남맹을 위해 일하겠다고 약속하면……. 호천맹보다 먼저 마교를 치겠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지금 호천맹의 세를 꺾지 않으면 결국 남맹이 몰락한다고 생각하신다. 그래서 네가 남맹을 지켜 주기를 바라시는 거지.”
“지금도 남맹과 함께하고 있는데……. 무슨 약속을 하라는 거예요?”
“그게…… 평생 남맹을 위해 일해 달라 하신다.”
“평생요?”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반문했다.
강호의 일에 얽히는 게 싫어서 객점도 사고, 석경장도 세웠는데, 평생 남맹의 뒤치다꺼리를 하라니?
남맹과 호천맹의 갈등에 왜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말인가?
“쩝. 호천맹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안 되겠느냐? 조금 무리이려나?”
남궁천은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에는 괜찮겠다 싶었는데 깜짝 놀라는 연적하를 보니 어째 아닌 것도 같다.
진설하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평생 남맹을 위해 일하라니……. 그건 너무 심한 것 같아요. 연 대협이 좋아하는 일도 아닌데.”
심통도 툴툴거렸다.
“우리 공자님은 그런 게 싫어서 녹림도 나왔네. 강호에서 발을 빼려고 객잔까지 샀는데……. 평생 남맹의 뒤치다꺼리를 하라니? 너무한 거 아닌가? 그건 우리 공자님을 남맹의 개로 만들겠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우리 공자님이 어리바리해 보여도 그건 아니지.”
“뭐? 내가 어리바리하다고? 살다살다 그런 소리는 또 처음 듣네. 어딜 봐서 내가 어리바리해 보여?”
연적하가 닦달하자 심통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렇게 보였으니까 검왕이 그런 제안을 한 거 아닙니까? 천 소가주도 공자님이 만만해 보이니까 그런 말을 전한 걸 테고요. 천 소가주, 아닌가?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보게. 남의 인생에 평생이라는 말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지 않나.”
심통이 다그치자 남궁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생각으로 말했을 뿐인데 돌이켜 보니 심한 것 같다.
‘내가 미쳤지. 평생이라니……. 나라도 그런 약속은 못 하겠다.’
자신은 이게 문제다.
소소한 정에 이끌려 생각 없이 저지르고 본다.
“적하야. 미안하다. 못 들은 거로 해라. 나도 평생 남맹을 위해 일하라고 하면 거부감이 드는데, 너는 오죽하겠느냐. 잠시 분위기에 휩쓸려서 헛소리를 한 것 같다.”
남궁천은 바로 사과했다.
강호에서 연적하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런 소리는 확실히 실례였다.
“에이, 괜찮아요. 우리 사이에 할 수도 있죠. 하지만 평생 남맹을 위해 일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그 정도로 착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아니야. 너 착해. 자기 인생을 남맹에 저당잡히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 거야.”
심통은 묘한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호천맹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로 시작된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허! 검왕도 무시무시한 사람이었구먼.’
남궁세가에서 남궁연만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검왕도 보통은 아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강호 도의를 들먹이지 않았다.
‘평생 남맹의 중흥을 위해 일하겠느냐?’는 질문 앞에서 사람들은 돌아섰다.
남궁천과 연적하는 호천맹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생을 선택했다.
이제는 누구도 검왕과 반천일검을 비난하지 못할 터였다.
검왕과 총사에게 반감을 갖더라도, 그들 역시 호천맹을 외면했으니까.
진설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다들 총사부의 일에 불만 없는 거예요?”
머뭇거리던 남궁천이 말했다.
“불만은 있지만……. 내가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입장이 아니니까. 참아야지.”
“하아! 왜 나이를 먹을수록 사는 게 더 어려워지는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만사가 귀찮아진 연적하는 그늘을 벗어나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뒤를 심통이 부리나케 따라붙었다.
“공자님.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쇼. 검왕 님의 말대로 호천맹이 원해서 하는 일인데요 뭐. 호천맹이 어떤 놈들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마교를 피하고 싶었다면 호광성으로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가 호천맹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아?”
“그럼 왜요?”
“몰라도 돼.”
“에이, 말씀해 주십쇼. 우리가 남입니까?”
심통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치근대자 연적하는 마지못해 답했다.
“나는 남궁세가를 볼 때마다 부러웠어. 그래서 그들처럼 가끔 협객 흉내도 내고 그랬지. 정사파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했고. 하여튼 남궁세가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정파였어. 그래서 무슨 일을 할 때면 ‘검왕 숙부님이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할 정도로.”
“흐흐. 그런데 검왕 님이 칠파일문의 위선자들과 비슷해 보여서 실망하신 겁니까?”
“뭐,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 이젠 뭐가 바르고 뭐가 그른지도 모르겠어. 나만 해도 그래. 내 인생을 살겠다고 호천맹이 죽건 말건 모른 척하겠다는 거잖아. 이런 내 상황이 총체적으로 엿 같다고.”
“공자님. 옳고 그른 건 흑백처럼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여기서는 괜찮은데, 다른 곳에 가면 맞아 죽을 일도 많습니다. 게다가 도와준다고 다 고마워하지도 않고요. 당장 공자님이 호천맹을 대신해서 마교를 물리쳐 주면, 호천맹에서 좋아할 것 같습니까?”
“그래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잖아.”
“사람은 의식주가 해결되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특히 무림은 더 그렇습니다. 명예를 얻기 위해 죽고 죽이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이번 일도 그렇습니다. 검왕 님 말대로 호천맹은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희생을 자처하고 있는 겁니다. 일부러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니 미안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윗대가리들 생각이잖아. 일반 무인들이 죽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예예, 하지만 세상을 이끌어 가는 건 그 윗대가리들입니다. 그걸 공자님이 막고 싶다면 평생을 남맹의 개로 살아야 합니다. 무림 제패에 뜻이 있는 게 아니라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으라고 하십쇼.”
“심 노인. 이 세상에 협객이 있을까?”
“어딘가에 있겠죠. 지금까지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만.”
“나는 숙부님과 천 형님을 진정한 협객이라 생각했다고. 알아? 씨발! 씨바알-!”
연적하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 대자 심통은 급히 한 걸음 떨어졌다.
“아니, 공자님은 술을 드시지도 않았는데 왜 술주정을 하십니까?”
“몰라. 숨만 쉬어도 취하는 것 같아. 정신이 알딸딸하다고.”
“캬하! 그런 날은 술을 먹어 줘야 합니다. 어떻게? 주루로 모실까요?”
심통이 연적하를 살살 꼬셨다.
혼자서는 못하지만 연적하와 함께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