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54
954회. 그럼 죽으시든지!
소림사의 삼십육 동인(銅人)들이 염불을 외우고 있을 때 연적하와 남궁연은 와부호를 유람하고 있었다.
운종술로 만든 구름을 배처럼 수면 위에 둥둥 띄우고서 말이다.
“누님, 집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안이는 월아와 금아가 잘 돌보고 있을 거야. 요즘은 나보다 그 애들을 더 잘 따르니까 괜찮아.”
“지안이를 데리고 올걸 그랬나 봐요. 괜히 미안하네.”
“매일 지안이만 찾지 말고 가끔은 나랑도 좀 있자. 오랜만이잖아.”
“그럴까요? 하기야 누님과 단둘이 호젓하게 있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연적하가 은근슬쩍 남궁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남궁연이 연적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를 미워하지 마.”
“미워하지 않아요.”
“어머니를 잃고 난 뒤로 마음 둘 곳이 없으셨어. 그래서 남맹에 더 집착하시는 걸 거야.”
“내가 오히려 미안하죠. 지나고 나면 별것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나 모르겠어요.”
“때가 맞지 않았던 거지. 아버지가 한 걸음만 더디게 갔어도 부딪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남궁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녀는 검왕 부부로부터 넘치도록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신의 딸인 지안에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검왕은 남맹의 문제로 의절을 선언하고, 하나뿐인 손녀까지도 멀리했다.
남궁연은 부친이 왜 그러는지 알기에 분노와 더불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심전심이라고 그런 남궁연의 복잡한 마음은 연적하에게도 전해졌다.
그래서 연적하는 음탕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가만히 그녀를 보듬어 안고만 있었다.
서로를 의지한 채로 두 사람은 말 없이 와부호의 야경을 감상했다.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던 구름과 배 한 척이 와부호 한가운데서 만났다.
와부호의 밤은 낮만큼이나 화려하다.
크고 작은 배들이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 유등을 걸어 놓고 호수를 떠돌아 다니는 까닭이다.
작지만 화려하게 치장된 배에 젊은 남녀가 마주 앉아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와부호를 거의 둘러싸다시피 하고 있는 수현 현령의 장자 무지성과 만리표국 국주의 딸 양화연이다.
두 사람 모두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꽤나 취한 모양이다.
“양 소저, 전장(錢莊)의 허가는 나에게 맡겨 주시오. 내 담당 서리(胥吏)에게 잘 말해 두리다.”
무지성은 마치 자신이 현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사실 수현 현령의 장자인 그의 힘은 막강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저는 공자님만 믿겠어요.”
양화연이 방긋방긋 웃으며 아직 절반쯤 남은 무지성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잔을 들어 무지성의 앞으로 내밀었다.
“어이쿠! 이렇게 마시면 취해서 안 되는데…….”
무지성이 술잔과 양화연의 부드러운 손을 함께 잡았다.
양화연은 붙잡힌 손을 빼지 않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양화연의 두 손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던 무지성은 욕정이 치밀어 오르자 급히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양화연은 무지성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달콤한 체향이 콧속으로 밀려오자 무지성은 손을 뻗어 양화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곧이어 그의 손이 여자의 허리와 겨드랑이 사이를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아흥.”
양화연이 콧소리와 함께 그에게 상체를 기댔다.
그때부터 무지성의 손놀림은 더욱 바쁘고 노골적으로 변했다.
양화연은 뜨거운 숨을 헐떡이며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작은 놀잇배라 사공과의 거리가 일 장이 채 되지 않았지만 두 남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농염한 여자의 몸을 주무르던 무지성이 멈칫했다.
흐릿한 유등 불빛에 뭔가 비치고 있었다.
‘무슨 안개가 저렇게 생겼지?’
갑자기 무지성의 손이 멈추자 양화연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공자님, 저게 뭐예요?”
“나도 모르겠소. 안개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하던 무지성이 사공에게 소리쳤다.
“사공! 왼편에서 다가오는 저게 뭐요?”
“물안개가 아니겠습니까?”
“무슨 안개가 저기만 저렇게 뭉쳐 있단 말이오?”
“부분적으로 안개가 끼는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경험 많은 사공의 말에 무지성과 양화연은 안개려니 생각했다.
기이한 안개가 다가오자 나란히 선 남녀의 얼굴이 보였다.
여자를 보던 무지성의 입이 쩍 벌어졌다.
평소 양화연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저 여자와 비교하니 밭에서 일하는 아낙에 불과했다.
그러는 동안 안개와 무지성이 타고 있던 놀잇배가 딱 붙었다.
무지성은 자연스럽게 양화연의 맞은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경국지색의 미모를 가진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수현 현령의 장자로 무지성이라 하오. 소저는 어디의 누구시오?”
무지성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자가 누군지만 알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는 마치 귀머거리인 것처럼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무지성이 눈을 찌푸릴 때 그녀와 동행한 남자가 말했다.
“어이. 이쪽은 내 처야. 그러니까 헛물 그만 켜고 마시고 있던 술과 안주가 뭔지나 말해 봐.”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상해 있던 무지성이 냉소를 쳤다.
“흥! 네놈은 거지냐? 남의 술과 안주를 알아 뭐하게?”
“야아. 죽고 싶어서 용을 쓰는구나. 술과 안주가 내 맘에 들면 용서해 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너 물질은 좀 할 줄 아냐?”
연적하는 그를 와부호에 처넣을 생각이었다.
“미친놈!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서 허세 부릴 생각 마라. 내 말 한마디면 네놈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다.”
“그 반대 같은데?”
“미친놈! 술도 못 구해서 구걸이나 하고 다니는 놈이 반대라고? 그렇다면 네놈의 그 잘난 부모가 누군지 말해 보거라.”
무지성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현 일대에서 자신보다 더 큰 세력가를 만난 적이 없기에 자신만만했다.
“내 부모는 오래전에 죽었는데? 말해 줘도 너는 모를 거야.”
상대가 회피하려 한다고 생각한 무지성은 크게 웃었다.
“하하핫! 벌써 꼬리를 내리는 거냐? 오늘 이 공자님이 한 가지 제안을 할 테니 잘 들어 보거라. 네 처가 이 배로 건너와 내게 술 한 잔을 따르면 없던 일로 해 주마. 어떠냐?”
연적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신에게만 지랄한 것으로도 부족해 남궁연에게까지 눈독을 들이다니?
그냥 호수에 던지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너는 옆에 일행이 있는데 유부녀에게 껄떡거리고 싶으냐? 어이! 아가씨, 저런 놈인 줄 알고 만나는 거야?”
순간 아까부터 은근 자존심이 상해 있던 양화연이 빽 소리쳤다.
“공자님 말씀대로 당신 처에게 술을 따르게 하든지, 아니면 닥치고 그냥 가세요! 집안도 변변치 않은 것 같은데 나대지 마시고요.”
순간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남궁연을 보았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어쩌면 저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남궁연은 지금의 상황이 재밌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다?
울적해 하던 남궁연이 웃자 연적하는 화를 가라앉혔다.
당장 손을 쓰려고 했는데 조금 더 놔둬야 할 것 같다.
한바탕 웃고 난 후에 남궁연이 입을 열었다.
“그 배에 향설주와 닭요리가 있으면 뺨 몇 대 맞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없으면 경을 치게 될 것이다. 있느냐? 없느냐?”
꾀꼬리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무지성의 입이 헤 벌어졌다.
“소저, 허세 그만 부리고 이리 와서 우리와 한잔합시다. 형씨, 그쪽도 이리 건너오지? 원한다면 양 소저의 옆에 앉아도 좋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짝을 바꿔서 놀자는 소리였다.
사내의 음란한 제안에 폭발한 연적하가 손을 들어 올렸다.
놀잇배에 차려져 있던 술과 안주가 허공에 둥둥 떠오르더니 이내 연적하의 앞으로 날아갔다.
술은 여아홍(女兒紅)이고, 안주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꿀에 담근 것[蜜汗火腿]과 청채가 전부였다.
뒤늦게 연적하가 무림의 고수임을 안 무지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소, 소협…… 농담이 심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만리표국 국주의 딸인 양화연은 놀라는 와중에 남자의 정체를 파악하려 눈을 굴렸다.
‘누구지? 회남과 합비에 저 정도의 청년 고수는 없는데…….’
아무래 생각해도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남자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흔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아주 잘생겼다거나 눈에 띄는 흉터라도 있다면 모를까?
평범하게 생긴 그의 얼굴만으로 정체를 추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양화연은 사내의 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다.
자신도 어디가서 꿀리는 얼굴이 아닌데 저 여자에 비하면 평범할 정도다.
자신에게 공을 들이던 무지성이 갑자기 돌변한 것도 이해가 갔다.
‘저런 여자를 처로 둔 청년 고수는 많지 않은데…….’
순간 벼락처럼 한 이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십전무후 남궁연!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러고 보니 석경장이 와부호에서 멀지 않은 합비에 있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게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양화연은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하며 외쳤다.
“남천 대협! 목숨만 살려 주세요!”
‘남천 대협’이라는 말에 무지성은 혼이 나간 얼굴로 덜덜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술과 안주를 보던 연적하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술은 여아홍에 안주는 돼지고기와 청채네……. 죽여 버릴까?”
연적하가 눈을 찡그리자 두손으로 삿 대를 꽉 붙들고 있던 사공이 끼어들었다.
“대, 대협, 찾으시는 술이 향설주라면 한 병 가지고 있습니다.”
연적하가 사공에게 시선을 돌렸다.
놀잇배이니만큼 달달한 술 한 병쯤은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연적하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여아홍이 호수로 ‘퐁!’ 하고 빠졌다.
그사이 사공이 향설주 한 병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향설주가 연적하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이어 안주가 차려져 있던 소반(小盤)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무지성과 양화연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쉴 때, 두 사람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어어?”
“사, 살려 주세요!”
연적하가 눈치를 보고 있는 사공에게 말했다.
“아저씨는 가요.”
“예, 예! 감사합니다!”
굽실거리던 사공은 미친 듯한 삿대질로 멀어져 갔다.
오 장(약 15미터) 높이까지 올라갔던 두 사람의 몸이 호수로 처박혔다.
퍼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곧이어 두 개의 머리가 수면 위로 불쑥 솟아 올랐다.
“푸아! 헉! 헉!”
“쿨럭! 쿨럭!”
격하게 숨을 몰아쉬던 두 사람은 다급하게 좌우를 살폈다.
그러나 수면 위로 달빛만 빛날 뿐 배가 없었다.
“양 소저! 도와 주시오! 나는 물질을 잘하지 못하오!”
“그럼 죽으시든지!”
차갑게 말한 양화연은 멀리 보이는 뭍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뒤에서 무지성이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솔직히 자신도 물질로 호반까지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