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62
962회.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같이 있는 게 아니지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그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기경팔맥이 끊어졌던 남궁천은 하루 종일 누워서 지내야 했다.
후기지수 중에 최고수로 훨훨 날아다니던 그가 언제 움직일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과거를 되새기며 후회와 원망 속에 시간을 보냈다.
합비.
남궁세가 안채.
해거름 무렵.
진설하가 남궁천의 이마에 맺힌 땀을 광목 천으로 닦아 내며 물었다.
“오라버니, 등은 좀 어떠세요? 닦아 드릴까요?”
“괜찮다.”
“땀이 찬 것 같으면 아무 때라도 말씀해 주세요.”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진설하가 애잔한 눈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자신을 찾아 헤매다 다친 사람이 미안하다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다 문득 너무 조용한 것 같아 남궁천을 보았다.
언제나 쾌활하던 사람이 생기 없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내가 운이 좋았다는 생각.”
“…….”
진설하는 뭐라고 호응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언제 회복될지 모를 몸으로 누워 지내면서 운이 좋았다니…….
그게 진심인지 다른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고작 후기지수들 중에 이름을 날리면서 천하십대고수라도 되는 양 날뛰었으니 살아 있는 게 용한 거지…….”
아니나 다를까! 자학이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래도 오라버니니까 살아 있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예요. 의원들도 믿어지지 않는다고들 하더라고요. 물론 남천 대협이 제때에 손을 쓴 것도 있지만…….”
말을 흐리던 진설하가 슬쩍 물었다.
“오라버니, 혹시 소림사에 일어난 이야기 들으셨어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얼마 전 소림사의 대웅전, 장경각, 천불전이 갑자기 폭삭 주저앉았대요. 다들 남천 대협이 손을 쓴 거라고들 해요.”
그런 소리를 들었음에도 남궁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진설하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남궁천이 말했다.
“나는 적하가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럽다.”
“원망스럽다고요?”
“적하가 과거 아버지에게 그랬듯 호천맹에 ‘남직례성을 넘보지 마라’고 했다면……. 소림승들과 싸울 일도 없었을 테니까.”
“…….”
진설하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게 전혀 틀린 소리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다.
연적하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고, 그렇게 한다 해서 무림인들에게 지탄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단지 그때그때 내린 그의 결정이 달랐을 뿐이다.
한참 만에 진설하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오라버니, 그래도 남천 대협을 원망하지는 마세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후후. 병 주고 약도 주었으니 감사하라는 거냐?”
“그보다는……. 하아! 모르겠네요.”
진설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천하십대고수인 검왕과 고금제일인의 연적하가 한집안인데, 왜 이렇게 삶이 팍팍한지 모르겠다.
그때 문밖에서 총관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가주님, 남천 대협 내외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남궁천은 듣지 못한 척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를 대신해 진설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연 대협, 남궁 부인, 어서 오세요.”
남궁연은 묵례만 했고, 연적하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진 소저. 오랜만에 뵙네요.”
“늦었지만 오라비니의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진설하의 감사 인사에 연적하가 손사래를 쳤다.
“별말씀을요. 우리가 남입니까.”
“들어가세요. 마침 오라버니도 깨어 계시니까.”
이윽고 진설하는 두 사람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연적하와 남궁연이 착석하자 진설하는 ‘차를 준비하겠다’며 슬쩍 자리를 떴다.
“형님, 좀 어떠세요?”
연적하의 물음에 남궁천이 짧게 답했다.
“괜찮다.”
어딘지 메마른 음성이다.
심지어 빈말로라도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연적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남궁연은 달랐다.
그녀는 남궁천의 태도에서 그가 연적하를 원망하고 있음을 알았다.
잠시 후 진설하가 다과상을 들고 돌아왔다.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보다못한 진설하가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었지만, 방 안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져 갔다.
군소 방파 출신으로 눈치 보는 게 일상이던 진설하와 달리 남궁천, 남궁연, 연적하는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고 살아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불현듯 남궁연이 물었다.
“오라버니. 적하가 원망스러우세요?”
“…….”
남궁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적하가 아버지의 수족처럼 움직여 줬으면 그럴 일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남맹이 천하를 손에 넣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그러자 남궁천이 쥐어짜듯 말했다.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호천맹의 남직례성 진출을 금했더라면……. 내가 소림사와 싸울 일은 없었다.”
“적하는…….”
“됐어요 누님.”
연적하는 남궁연의 말을 막았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에 불과할 뿐인 까닭이다.
“형님.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딴에는 천리에 따른다고 한 일들이 주변을 힘들게 했네요. 끊어진 기경팔맥은 제가 이어 놓았으니……. 노력하면 언젠가 이전의 경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
“선한 의도로 한 일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이후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보증하세요.”
말을 마친 연적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한 자리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 남궁천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다.
누워 있는 그를 대신해 진설하가 연적하와 남궁연을 배웅했다.
연적하와 나란히 걷던 남궁연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오라비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마음이 편치 않을 게다.
항상 밝고 긍정적이던 오라비가 대놓고 남 탓을 할 줄은 몰랐다.
정신이 몸을 이기지 못한 것일까?
“지금은 오라버니의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 걸 거야. 원래 저런 사람 아닌 거 알잖아.”
“알죠. 그래서 더 미안하고요.”
“…….”
“형님 말대로 내가 호천맹에 한마디만 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니까.”
“그랬다면 너는 평생을 남맹과 호천맹에서 자유롭지 못할 거야. 이번에만, 이번에만……. 하면서 늙어 가는 거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잖아?”
“하아! 누님. 이젠 나도 누가 잘못한 건지 모르겠어요. 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왜 다들 잘못되면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하죠? 그런 소리 듣기 싫어서 무림에서 손을 뗀 건데, 손을 떼고도 그런 소리를 듣네요.”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다고 형님 이야기가 틀린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형님이었어도 나를 원망했을 것 같아요.”
“털어 버리고 여행이나 가자.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거야.”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해요.”
“뭐?”
“마교 교주나 유명교주도 나처럼 주변에서 원망을 들었을까요? 아니면 나만 듣는 건가?”
“글쎄. 감히 마교 교주와 유명교주 원망을 할 사람이 있었을까? 황제처럼 군림했을 텐데. 황제를 생각해 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없잖아. 사약을 내려도 성은이 망극하다면서 받을걸?”
“그런데 나는 왜 이래요? 내가 그들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네가 착해서 그래. 착하니까 상대 입장을 생각해서 미안해 하는 거지. 아버지와 오라버니도 네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너를 원망하는 건지도 몰라. 너밖에 받아 줄 사람이 없잖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냥, 그렇다고. 털어 버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묵묵히 걷던 연적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괜찮아질지 모르겠네요. 요즘은 사람들 만나는 게 무서울 정도예요.”
“네가? 왜?”
남궁연이 놀란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또 뭐가 잘못됐다고 원망 들을까 봐.”
“신경 쓰지 마. 어떤 결과를 얻든 그걸 선택한 사람들이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한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표정도 좋지는 않았다.
당장 조금 전에도 남궁천이 그에게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이다.
“그게 맞는 거죠?”
“당연하지.”
“내일 당장 떠나야겠어요. 마차 두 대면 되겠죠?”
그러자 남궁연이 놀리듯 말했다.
“왜? 운종술로 가면 더 빠를 텐데?”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고, 천천히 천하를 구경하면서 가야죠. 지안이와 추억도 만들고.”
“그래. 지안이가 좋아할 거야. 하루종일 아빠와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에이, 언제는 내가 떨어져 있었나?”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같이 있는 게 아니지. 너는 아침저녁에 지안이와 잠깐 놀아 주고, 나머지 시간은 심 노인이나 당 노인과 보내잖아.”
“내가요?”
연적하가 기막힌 얼굴로 반문하자 남궁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랬다고. 요즘 지안이가 너보다 월아와 금아를 더 따르는 거 보면 모르겠니?”
“그거야 뭐 그 애들이 잘 놀아 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함께 있는 시간이 너보다 많아.”
“험, 나는 영업장들도 둘러봐야 되고 그러니까. 월아와 금아처럼 항상 붙어 있기는 힘들죠.”
“그래서 누가 뭐래니? 나는 지안이가 좋아할 거라고 했을 뿐이야.”
“와! 해가 졌는데도 덥네요?”
뻘쭘해진 연적하는 얼른 말을 돌렸다.
남궁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의 말에 화답했다.
“팔월이잖아. 그럴 만도 하지.”
***
합비.
여강현 석경장.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연적하는 식솔들에게 여행을 통보하고, 심통에게 마차 두 대를 구해 오라 시켰다.
아침에 석경장을 나간 심통은 정오 무렵 이두마차 두 대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강현에 딱 두 대 남은 이두마차입니다. 마차는 샀고, 마부는 하루에 오십 문씩 계산해서 주기로 했습니다.”
“요리는?”
“우리가 상단입니까? 요리사가 필요하게?”
“그럼 뭘 먹게?”
“그까짓 거 대충 먹으면 되죠. 건량을 먹어도 되고, 마을에 들러서 해결해도 되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지 않았습니까?”
“지안이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 요리사도 구해 와.”
“그냥 우리 석경장에 있는 숙수를 데리고 가시죠?”
“황 숙수?”
“예, 일당을 준다고 하면 황 숙수도 얼씨구나 하고 따라올 겁니다.”
“그럼, 황 숙수에게 잘 말해서 같이 가는 방향으로 해 봐. 거절하면 강제로 끌고 갈 생각하지 말고.”
“강제로 안 합니다. 그런데……. 청류신은 어떻게 할까요?”
“데리고 가야지. 망령만 났지 어디 따로 아픈 데가 있는 게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만…….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왜? 심 노인이 남아서 돌보고 싶어?”
그러자 심통이 펄쩍 뛰었다.
“어이쿠! 아닙니다!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십쇼. 제가 왜 청류신을 돌봅니까?”
“청류신을 좋아하잖아. 좋아하면 돌봐 줄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놀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측은지심 같은 겁니다.”
“남아서 돌볼 것도 아닌데 왜 괜찮겠냐고 물어?”
“여행길에 초상(初喪)을 치러야 할 것 같아서 드려 본 말씀입니다.”
연적하가 의외의 눈으로 심통을 보았다.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더니 청류신의 초상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나 보다.
“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 몰라? 땅에 묻으면 그만이야.”
연적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봉산에서도 그렇게 해 왔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아, 그렇네요.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심통은 부엌 쪽으로 바쁘게 걸어갔다.
석경장의 숙수를 섭외하러 가는 것이다.
그날 오후.
석경장 식솔들을 태운 이두마차 두 대가 천천히 대문을 빠져나갔다.
석경장 최초의 단체 여행이다.
그러나 즐거워야 할 이 여행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남궁연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