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9
99회. 알고 보면 복마전
풍연초가 피 묻은 박도를 수납하며 중얼거렸다.
“네 말이 맞다. 다음에도 운 좋으리란 법은 없지. 약해지면 잡아먹히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혹시라도 처의 마음이 불편해질까 봐 살려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처와 아이들을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망설임은 사라졌다.
한편 사해상방 방주 상재용은 갑작스러운 살인에 놀라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설마하니 무림인이 아닌 일반인을 단칼에 베어 버릴 줄은 몰랐다.
정파의 무림인들조차 현행범이 아닌 이상 일반인을 죽이지 않는다.
심지어 낭인들도 이렇게 대놓고 일반인을 죽이지는 못한다. 그들이 살인을 할 때는 은밀하게 한다. 강호라고 관부에서 완벽하게 분리된 세 계가 아닌 까닭이다.
그런데 이들은 가차 없이 죽인다.
뒤늦게 ‘위험한 놈들’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전에는 와룡장 출신의 쓸 만한 낭인이었는데, 지금은 야수들로 보였다.
탁고명이 놀란 얼굴로 서 있는 상재용을 힐끔 보며 말했다.
“상 방주. 우리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며칠만 참아. 우리도 당신 마음에 안 들거든. 그래도 여기서 일하다가 다친 거니까 치료가 끝날 때까지 머물 거야. 불만 있어? 있어도 할 수 없어. 그런 줄 알아.”
탁고명은 상재용이 얄미워 용희루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단지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네 사람이 지내기에 이곳만큼 좋은 곳도 없었다.
잠깐 풍연초의 사합원으로 갈까도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거긴 연적하와 심통이 머무르기에 좁았다.
“없소. 원하시는 만큼 머물러도 되오.”
상재용은 짐짓 선심 쓰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희희낙락했다.
그거야말로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던 바다. 월하교당의 고수가 오기까지 며칠 더 잡아 두고 있어야 하는데, 고맙게도 남아 있겠단다.
상재용은 수하들을 불러 장문호의 시체를 처리하게 했다.
그의 포목상을 가지게 된 마당에 그 정도 수고는 일도 아니었다.
뒷수습을 끝내고 멀어져 가는 그를 심통이 힐끔 보았다.
천살마안 척도광의 얼굴이 스치듯 떠올랐다.
-추엽진 같은 낭인이 무슨 돈으로 청부를 했겠소? 다 상재용의 돈이겠지. 그래서 그자에게 배상금이라도 좀 뜯어내 보려고 만났소. 공들여 키운 살수가 둘이나 죽어서…….
척도광은 ‘추엽진은 상재용의 수족 같은 놈’이라고 했다.
상재용이 그를 외원의 호위들 중 하나인 것처럼 말한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알고 보면 상방이 복마전이란 말이지…….’
이전까지는 그저 장사꾼들이려니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장문호와 추엽진의 살인 청부, 죽방 등을 조사하다 보니 사파 저리가라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랄 일도 아니며, 새로운 일도 아니다. 이 장사꾼들은 무림의 방파들처럼 이익을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상재용은 이 지저분한 일에 어디까지 관여되어 있었을까?
일단 상방을 복마전이라고 생각하자 상재용의 일거수일투족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그는 상재용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를 되돌아보았다.
어느 순간 자칭 ‘강호에서 굴러먹은 세월이 한 갑자’인 심통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공자님, 저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래 비워도 돼. 아니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그냥 눌러살아. 심 노인도 남은 인생을 즐겨. 언제 갈지 모르잖아. 난 요즘 아침에 심 노인 안 보이면 ‘자다가 간 건가?’ 생각한다니까.”
말과 함께 연적하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흐흐흐, 갈 때 가더라도 아직은 아닙니다. 공자님이 저 하늘 위를 훨훨 날아다니는 건 보고 갈 겁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보중하십시오.”
공손히 읍을 해 보인 심통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연적하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탁고명이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연 아우, 정말 심 노인이 안 왔으면 좋겠어?”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가 잘 보이려고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요.”
탁고명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심통이 싫어서 거리를 두려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좋아서 하는 일일 수도 있지 않느냐?”
“설마요. 내 일도 귀찮은데 다른 사람 뒤치다꺼리를 좋아서 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야 모를 일이지. 심 노인의 속에 들어가 보기 전에는. 그러니 너무 밀어내지는 마라.”
“알았어요.”
연적하는 의형이 하는 말이라 일단 받아들이기는 했다.
‘나중에 심통이 왜 그러는지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낙양 동편 언사.
월하교당.
오늘날 월하교당은 낙양의 명물 중 하나였다.
참월검객이 유명교를 퇴치하고 세웠지만 오히려 유명교 교당이 된 굴곡의 역사 탓이다.
월하선자는 그걸 기념하기 위해서 월하교당을 세상에 공개했다. 비밀스러운 다른 교당과 달리 비신자들의 출입까지 허용한 것이다.
그 뒤로 월하교당은 패권을 쥔 유명교 내부에 대한 호기심과 반전(反轉)의 산 역사를 구경하기 위해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해상방의 대행수 이화수는 돈을 써서 월하교당의 장로 소수마검 진가희를 만났다. 방주 상재용의 지시를 받고 개봉을 떠난 지 이틀 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와룡장의 생존자들이 개봉에 있는데, 패악이 심하니 그들을 없애 달라?”
진가희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화수라는 늙은 상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삼만 냥을 성금(誠金)으로 내놓겠습니다.”
“상방에서는 낭인들을 고용해 일처리를 한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사십 대의 진가희였지만 말에 거침이 없었다.
육십이 넘은 이화수의 얼굴에 씁쓰름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침착하게 준비한 답을 말했다.
“그들의 무위가 너무 뛰어나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상방 호위들이 벌써 열 명이나 당했습니다. 처음에는 칠파이문도 생각했지만 상대가 와룡장의 생존자들이라……. 월하교당을 찾아온 것입니다.”
“후후. 잘 생각했다. 칠파이문이라면 와룡장 출신들과 싸우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특별히 십두마병이 도와줬으면 한다고?”
“예. 방주님께서 ‘십두마병은 돼야 해결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탁. 탁. 탁. 탁. 탁.
진가희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장로들이 모두 십두마병이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것도 없이 그냥 자신이 가면 된다.
지금 그녀가 고민하는 것은 이걸 ‘윗선에 알리고 가느냐? 자신의 선에서 독단적으로 처리하느냐?’ 하는 점이다.
윗선에 알리면 삼만 냥을 고스란히 헌납해야 한다. 자신에게 약간의 성과금이 떨어지겠지만 성금은 거의 대부분 교에 귀속된다.
“너는 이 문제를 교당의 다른 사람들과 상의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교당에 오늘 도착해서 장로님께 처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진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은 끝났다.
그녀는 혼자 조용히 처리하고 삼만 냥을 독식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꿍쳐 둔 돈이 많을수록 윗분들에게 더 바칠 수 있으니까.
사실 와룡장의 수준이라고 해 봐야 뻔하기에 수하들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늙은이와 청년, 그리고 기루 호위 둘, 이렇게 전부 넷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본녀가 해결해 주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함구하도록. 무슨 소리인지 알겠느냐?”
진가희가 스산한 눈으로 이화수를 바라보았다.
섬뜩한 살기에 놀란 이화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알겠습니다.”
“가입 절차는 일을 끝낸 뒤에 따로 논의하기로 하마. 앞장서라.”
말과 함께 진소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장로들이 냄새를 맡고 끼어들기 전에 재빨리 끝낼 생각이었다.
***
개봉 남부 유천진.
이가장.
해가 지자 이가장의 안채에 불이 밝혀졌다.
담장 위에서 불빛을 바라보던 노인, 천살마안 척도광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가장의 위치를 알려 준 마을 사람은 이가장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고 했다. 그러니 은밀하게 안채에 숨어든 사람은 추엽진이리라.
척도광이 한 마리 야조(夜鳥)처럼 어둠을 가르며 안채로 날아갔다.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살인귀 추엽진이 답답하다는 듯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벌써 이가장에 숨어든 지 사흘.
가 있으면 수일 내로 연락하겠다던 상재용은 감감무소식이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바깥소식을 알 수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것 같다.
침상에서 내려온 추엽진은 술병을 집어 목에 들이부었다. 낮에 인근 마을의 주루에서 사다 놓았던 술이다.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런지 술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이!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그때 척도광이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알고 싶으냐?”
“헉!”
터엉.
깜짝 놀란 추엽진의 손에서 술병이 흘러 떨어졌다.
눈치 빠른 그는 천향반점의 주인인 천살마안 척도광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척 대인! 사, 살려 주십쇼!”
“흐흐흐. 살려 주면 넌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상재용은 이만 냥을 주겠다고 하는데.”
“제발 살려만 주십쇼!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추엽진은 아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매달렸다.
그의 입장에서 척도광은 그야말로 쳐다보지도 못할 고수인 까닭이다.
하지만 척도광은 그런 애원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다.
그가 천천히 우미도를 뽑았다.
‘소꼬리 칼’이라는 이름처럼 유엽도보다 얇은 도신이 불빛에 반짝였다.
“사, 살려 주십쇼!”
콰당탕.
추엽진은 정신없이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추엽진의 등이 침상에 닿았다.
성큼성큼 따라붙은 척도광이 추엽진의 턱 밑에 우미도를 가져다 댔다.
“말해 봐. 상재용이 노리고 있는 게 뭔지. 이야기가 마음에 들면 살려 줄 수도 있고.”
척도광이 은근한 눈빛으로 추엽진을 보았다.
물론 거짓말이다.
무슨 소리를 듣게 되건 이놈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물어본 건 그저 상재용에게 돈을 더 뜯어내고 싶어서일 뿐이다.
다 죽어 가던 추엽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흰소리라는 걸 알 텐데, 궁지에 몰린 그는 그걸 알지 못했다.
“자, 장문호의 포목점입니다. 그자의 의뢰를 받아서 풍가를 죽인 뒤에, 그걸 빌미로 포목점을 빼앗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척도광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상재용의 목적을 알게 되자 비로소 그간의 의혹이 말끔히 해소됐다.
이제야 그놈이 자신의 앞에서 당당하던 이유를 알았다.
그놈은 살인을 청부한 자가 장문호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지! 뭔가 있을 줄 알았다. 쓸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 고통 없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흐흐흐. 요 귀여운 쥐새끼 같으니라고. 어딜 그렇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나 했더니, 나를 추가 놈에게 데려다주려고 그랬구나.”
재빨리 돌아선 척도광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틀 전 자신을 개 패듯 하던 늙은이가 유엽도를 어깨에 척 걸친 채 서 있었다.
“나, 나는, 정말 몰랐소. 당신이 다녀간 뒤에 상 방주가 찾아와서…….”
“됐고, 두 번 다시 이번 일에 관여하지 마라. 만약 그랬다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사파 출신인 심통은 척도광에게 선심을 베풀었다.
죄는 칼이 아니라, 칼자루를 손에 쥐고 흔드는 놈에게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