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8
98회. 그렇게 살아온 인생
구천노도 심통은 해약을 연적하에게 건넨 뒤 쉴 틈도 없이 바로 튀어 나갔다. 물론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추엽진을 잡아오기 위해서다.
연적하는 풍연초에게 해약을 먹이고 그를 방 안으로 옮겼다.
풍연초의 시커멓던 얼굴색이 조금씩 홍조를 띠어 가는 게 보였다.
여러 종류의 약을 썼음에도 차도가 없었다더니, 해약 하나에 이런 변화라니!
‘독에는 무조건 해약’이라는 답이 머리에 박혔다.
깊게 잠든 풍연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가족과도 같은 정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단지 친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 죽어 가는 그를 보니 절로 주먹이 쥐어진다.
만약 해약을 구하지 못해 그가 죽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잡히기만 해 봐라…….’
풍연초와 탁고명을 씹기만 해도 가만두지 않았는데, 죽이려 했다고?
연적하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
사해상방으로 돌아간 방주 상재용은 대행수 이화수를 불러들였다.
“방주님, 찾으셨습니까?”
“화수야.”
이화수가 흠칫 놀란 눈으로 상재용을 바라보았다.
방주인 상재용이 저렇듯 은근하게 나올 때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누군가 피를 보았다.
상인이라고 장사만 하는 게 아니다.
이렇듯 거대한 상방을 키우려면 정적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를 거쳐야 한다.
살수 단체의 큰 손님이 상인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자잘한 일은 낭인 출신인 추엽진이 처리했지만, 정말 큰일은 대행수인 이화수의 몫이었다.
“너도 용희루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겠지?”
“예, 형님. 살수가 그곳 호위인 풍가를 죽이려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화수도 ‘방주님’이라는 호칭 대신에 ‘형님’이라 불렀다.
“오늘, 탁가와 그를 돕기 위해 온 늙은이와 어린놈이 나를 모욕하고 겁박했다.”
“예?”
“늙은이가 내 수신호위 다섯을 병신으로 만들었다. 탁가와 어린놈은 나를 개처럼 취급했고…….”
“그런 미친! 당장 죽방에…….”
“죽방이 감당할 수 있는 늙은이가 아니다.”
그 늙은이가 마지막에 보여 준, 하늘을 나는 신위만 떠올려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입니까? 허면?”
“칠파이문에 준하는 문파만이 그 늙은이를 상대할 수 있을 게다.”
이화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살인 청부를 받아 줄 만한 문파 중에 그만한 문파가 금방 떠오르지 않아서다.
“흑사회를 만나 볼까요?”
“흑사회도 무리다.”
단호한 상재용의 말에 이화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흑사회는 개봉의 사파연합으로 어지간한 문파 하나쯤은 씹어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상재용은 그마저도 안 되는 것처럼 말했다.
“형님, 개봉에서 가장 큰 사파는 흑사회입니다. 흑사회가 안 된다면…….”
대체 어디에 가서 손을 벌려야 한단 말인가?
“유명교. 최소 십두마병은 돼야 그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겠지만 유명교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들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알고 있다. 칠파이문에서 우리를 고깝게 여기겠지.”
대부분의 상방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야말로 돈에는 정사(正邪)가 없다는 식이었다. 사실 장사는 그렇게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한을 풀어 줄 곳이 유명교밖에 없는데…….
잠시 생각하던 이화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형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요즘은 유명교가 대세라 사람들도 그러려니 할 겁니다.”
“언사의 월하교당을 찾아가라.”
“와룡장의 자리에 세워진 교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풍가와 탁가가 와룡장 출신이라는 걸 말하면 그들도 거절하지 않을 게다.”
“알겠습니다.”
“풍가가 해약을 먹고 나으면 그놈들이 떠날 수도 있으니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예, 바람처럼 다녀오겠습니다.”
이화수가 떠나자 상재용은 전표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다음은 천향반점의 일을 처리할 차례다.
‘척도광이 살아 있어야 할 텐데…….’
추엽진을 처리하는 일은 척도광이 맡아 주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그를 다독여야 할 필요도 있고, 다른 곳에 의뢰해 봐야 뒷소문만 무성해질 뿐이니까.
***
그날 밤.
상재용은 은밀하게 천향반점을 방문했다.
척도광이 살기 어린 눈으로 상재용을 노려보았다.
“알아보니 네놈이 나를 팔았다더군. 그래 놓고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찾아가는 수고를 덜어 고맙기는 한데,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상재용이 척도광 앞으로 전표를 내밀었다.
“뭐냐?”
“보면 모르시오? 어제 내가 의뢰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이건 계약금이오.”
척도광이 전표를 받아들고 금액을 확인했다.
은자 일만 냥이다. 뜻밖의 거금에 척도광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의 안색을 살피던 상재용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의뢰는 아주 손쉬운 일이오. 척 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개 한 마리 죽이는 것만큼이나. 사실 그 돈은 추엽진이 저지른 일에 대한 배상이라고 할 수 있소. 일이 끝나면 일만 냥을 더 드리리다.”
“또 무슨 잔머리를 굴리려고?”
반신반의하면서도 척도광은 관심을 보였다.
상재용을 때려죽이는 것보다는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는 게 훨씬 이익이었다.
“추엽진을 처리해 주시오.”
척도광이 기이한 눈으로 상재용을 바라보았다.
추엽진은 상재용의 측근으로 그동안 굳은 일을 도맡아 해 오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하필 이 시점에서 죽여 달라니?
“흐흐흐. 묘하구나. 그의 죽음으로 얻게 될 이익이 없을 텐데 죽여 달라고? 그것도 정체불명의 고수가 그놈을 찾아다니는 지금?”
척도광은 한순간 그가 자신에게 모든 걸 다 뒤집어씌우려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 정도로 상재용의 의뢰는 엉뚱하고 치명적이었다.
“이 일로 척 대인이 손해를 볼 일은 없소. 만약 일이 잘못 되면 나를 팔면 될 텐데, 뭐가 걱정이시오? 그 늙은이가 너무 무서워 못 하겠다면 모를까.”
상재용이 슬쩍 척도광의 자존심을 긁었다.
아니나 다를까?
척도광이 발끈해서 바로 한마디 했다.
“무슨 그런 개소리를! 그 늙은이가 고수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겁 먹고 꼬리를 말 내가 아니다. 네놈도 두려운 것을 피해 다녔다면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텐데?”
“옳으신 말씀이오. 나 역시 척 대인을 만나는 게 겁이 났지만 찾아왔소.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오. 척 대인은 어떻소? 추엽진을 처리하고 일만 냥을 더 받으시겠소? 아니면 일만 냥으로 만족하시겠소?”
“…….”
상재용이 그렇게까지 꼬드겼는데도 척도광은 선뜻 맡겠다고 하지 않았다.
괴노인의 무자비한 손속이 떠올랐다.
괴노인의 폭력은 단지 겁을 주기 위한 게 아니었다. 살의로 가득 찬 폭력은 몸이 기억한다. 척도광은 자신이 구사일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괴노인과 얽힐 수도 있는 이 의뢰가 꺼려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세상에 고수는 많다.
살아오면서 자신보다 강한 사람들과 숱하게 부대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흥! 추가 놈이 어디 처박혔는지 모르는데 무슨 수로 죽인단 말이냐? 추가 놈이 슬슬 기어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놈들이 채 갈 텐데. 마음이 있다고 한들 과연 내 차례까지 오겠느냐?”
“허허. 척 대인은 이 몸이 처음에 쉽다고 한 말을 잊으셨소? 어려운 일이면 뻔뻔하게 척 대인을 찾아왔겠습니까? 나는 대책 없이 일을 벌이지 않소이다.”
“혹시 너는 추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느냐?”
“알다 뿐이오. 두 번째 살수가 죽던 날 그를 모처에 빼돌린 사람이 바로 나요. 이제 결심이 섰소?”
상재용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상방의 방주쯤 되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이중 삼중으로 덫을 놓는 건 기본이다. 무식한 무림인들이야 힘이면 다 되는지 알지만 말이다.
“후! 정말 여우 같은 늙은이로군. 너는 왜 그를 죽이려고 하느냐? 득 되는 게 전혀 없을 텐데?”
“사해상방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린 그를 벌주려는 것뿐이오.”
“푸흣! 가증스러운 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믿고 안 믿고는 척 대인의 자유요. 그래서 이 손쉬운 의뢰를 맡겠다는 거요? 말겠다는 거요?”
“나에게 손해를 입힌 놈이니 내가 처리하겠다. 지금 그놈은 어디에 숨어 있느냐?”
“그는 유천진(有川镇)의 이가장에 숨어 있소. 대행수 소유의 집이오만 관리를 하지 않은 지 꽤 되오. 당연히 상방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고. 하루 정도 주변 상황을 지켜보다가 잠잠해지면 그때 가 보시오.”
“멀리도 보냈군.”
척도광이 질린 눈으로 상재용을 보았다.
유천진은 말을 이용한다 해도 하루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그것만 봐도 상재용이 얼마나 치밀한 놈인지 알 수 있었다.
***
탁고명과 심통은 끝내 추엽진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탁고명이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풍연초를 힐끔 본 후에 연적하에게 말했다.
“주루, 기루, 도박장, 심지어 객점까지 싹 다 뒤졌지만 추엽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라.”
심통이 한마디 거들었다.
“공자님, 저도 추엽진과 알고 지내는 놈들을 만나 봤습니다. 탁 형제가 살수를 죽인 날 이후로 본 사람이 없더군요. 일이 꼬이자 바로 튄 것 같습니다.”
“심 노인, 상 방주를 증인으로 세워서 내일은 장문호라는 놈을 족쳐 봅시다.”
탁고명의 말에 심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재용이라는 늙은이가 좀 수상하지만, 일단 장문호가 청부를 한 건 사실 같습니다. 그놈이 실토를 하면 산 채로 묻어 버리지요. 공자님, 어떻습니까?”
“쯧쯧! 살 만큼 산 늙은이가 말하는 것 좀 봐. 사람이 씨앗이야? 묻긴 뭘 묻어.”
“흐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요. 공자님께서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풍 형님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아. 풍 형님을 죽이려고 한 놈이니까 풍 형님이 복수를 해야지.”
“아,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탁고명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장문호의 운명은 잠든 풍연초의 손으로 넘어갔다.
다음 날 아침.
탁고명은 득달같이 포목점으로 달려가 가게에 있던 장문호를 잡아 왔다.
그사이 심통은 기루의 호위 하나를 사해상방으로 보내 방주 상재용을 불렀다. 바쁜 와중에도 상재용은 뜸 들이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와 주었다.
확인은 족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싱겁게 끝났다.
상재용이 추엽진에게 들은 말을 꺼내자 장문호가 땅에 머리를 처박은 것이다.
“용서해 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이 술기운에 미친 짓을 했습니다! 하지만 풍 대협을 죽여 달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여자를 되찾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자 마루에 나와 듣고 있던 풍연초가 옆에 있던 화병을 집어 던졌다.
챙그렁.
“에라! 이 후레자식아! 그게 남편을 죽여 달라는 것과 뭐가 다르냐! 저런 개만도 못한 놈을 봤나!”
이번에는 분노한 탁고명이 발로 장문호를 짓밟았다.
“이 개 같은 놈아! 형수님을 넘본 것도 죽을죄인데, 한술 더 떠서 뭐? 풍 형님을 죽여 달라고 사주를 해? 그러고도 네놈이 살기를 바랐더냐? 죽어라! 죽어!”
퍽.퍽.퍽.퍽.
“아이쿠! 살려 주십쇼! 악! 살려 주십쇼! 윽윽! 방주님! 도와주십쇼!”
요란한 비명에도 탁고명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때려죽일 기세였다.
보다 못한 풍연초가 탁고명을 만류했다.
“탁 아우, 그만해.”
그제야 탁고명은 발길질을 멈추었다.
하지만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형님, 이런 놈은 그냥 때려죽여야 됩니다. 형님을 죽이려고 했다고요.”
“하아! 알아 인마. 그런데 나 안 죽었잖아.”
“그게 무슨 소리요? 적하 아우가 제때 와서 살았지, 그게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소. 후환거리는 남겨 두지 맙시다. 다음에도 운 좋으리란 보장 있소? 형수님과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탁고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풍연초가 비틀비틀 내려가더니 들고 있던 박도로 장문호의 목을 베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