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96
996회.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니?
남연객점은 남수경의 조부인 남초결이 세웠다.
그녀에게 남연객점은 애틋한 과거일 뿐 아니라, 현재의 삶이자, 미래다.
합비에서 가장 부자인 연적하가 친구인 그녀를 위해 남연객점 절반의 소유권을 넘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외상도 된다’는 말에 남수경은 오히려 크게 당황했다.
‘연적하가 남연객점에서 손을 떼려 한다’고 오해한 까닭이다.
“연 공자, 아직 나는, 나는, 준비가 덜되었어요.”
그녀는 거액의 돈은 물론이고, 연적하와 완전히 결별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놀란 남수경이 말까지 더듬자 연적하는 얼른 수습에 들어갔다.
“아,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야. 혼자서 꾸려 갈 준비가 되면 말해. 나는 언제라도 내 지분을 넘겨줄 용의가 있으니까.”
그제야 굳어 있던 남수경의 표정이 풀어졌다.
한 걸음 뒤에 물러나 있던 상도가 다가와 꾸벅 머리를 숙였다.
“공자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상도는 요리 안 배우냐?”
“헤헤, 공 숙수님께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 공 숙수가 다른 건 몰라도 초반 하나는 하남제일이니 잘 배워 둬라.”
“예, 헤헤.”
상도는 천하의 남천이 자신을 생각해 주자 실실 웃었다.
“참, 상도야. 문밖에 남자 둘 있는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라.”
“예, 예.”
상도는 예전에 삼보방의 녹담평 때처럼 연적하에게 뭔가 잘못한 사람들이려니 생각했다.
상도에게 주의를 준 연적하는 창가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남궁연의 옆자리에 지안이, 그 맞은편에 월아와 금아가 앉아 있었다.
‘어라? 내 자리는?’
먹을 때는 지안이 월아와 금아 사이에 앉았는데, 갑자기 배치가 달라진 것이다.
연적하가 애매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자 지안이 얼른 월아와 금아의 사이로 자리를 옮겨 갔다.
잠깐 남궁연의 옆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연적하는 빈자리로 가며 내심 안도했다.
한편으로 ―별것 아닌 지안의 사소한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 남궁연과의 관계가 서먹해졌다니 기가 막혔다.
이틀 전의 말다툼 이후로 자신과 남궁연이 대화를 피하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된 것이다.
잠시 후 식사가 나왔다.
석경장 식솔들이 한창 식사에 열중하고 있을 때다.
규칙적인 발소리와 함께 등장한 포졸들이 남연객점을 에워쌌다.
그 숫자가 무려 이백여 명이 넘어 보였다.
객점 앞에 쪼그리고 있던 이두호와 상소엽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포졸들을 살폈다.
그때 포졸들 속에서 먼저 하선했던 호위, 유종이 튀어나왔다.
“두 분 괜찮소? 어디 다친 곳은 없소?”
이두호와 상소엽은 대답 대신 급하게 유종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 왜 그러시오? 내 개봉부에 고변(告變)하여 포졸들을 데리고 왔소. 어디 포졸뿐인 줄 아시오? 때마침 개봉부에 나와 계시던 금의위 분들까지 관심을 보여 함께 모시고 왔소.”
유종이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이두호와 상소엽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두호가 등지고 선 객점을 힐끔거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다 소용없게 됐소. 두 공자를 죽인 사람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객점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연적하였다.
이두호와 상소엽은 찔끔 놀란 얼굴로 허리를 조아렸다.
그사이 유종이 뒤로 펄쩍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이잡니다! 이자가 석 공자와 임 공자를 살해했습니다!”
순간 근처에 있던 포졸들이 일제히 박도를 뽑아 들었다.
차차차창―.
그러나 동작만 요란할 뿐 포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금의위와 함께 왔으니 그들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다.
빼곡하게 포위하고 있던 포졸들이 뒤쪽부터 좌우로 갈라서며 길을 냈다.
이윽고 금의위 북진무사 장부아와 남진무사 동유수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 나왔다.
멀리서 연적하를 발견한 동유수 남진무사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와 나란히 걷던 장부아 북진무사도 속보(速步)로 보조를 맞췄다.
마침내 연적하의 앞에 도착한 동유수 남진무사와 장부아 북진무사가 마치 황제에게 하듯 허리를 접으며 인사했다.
“남천 대협,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쪽은 북진무사 장부아라 합니다. 남천 대협께 인사를 올리게 해 달라고 사정해 함께 왔습니다.”
동유수 남진무사를 예의 주시하던 포졸들이 허겁지겁 칼을 거두었다.
소란이 가라앉자 북진무사가 공수의 예를 올렸다.
“북진무사 장부아라 합니다. 소관 남천 대협을 가까이서 뵙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개봉부 포졸들이 덤비면 가볍게 혼쭐을 내려고 나왔던 연적하는 뻘쭘한 얼굴로 대답했다.
“연적합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자 동유수 남진무사가 웃으며 답했다.
“낙양에서 육로가 아니라 황하를 이용하셨으니 개봉이라 예측했습니다. 개봉에 남연객점이 있지 않습니까. 하여 장 북진무사와 의논을 하고 있던 차에 요상한 고변이 들어오지 뭡니까. 아무래도 남천 대협이신 것 같아서 저희들이 동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동수유 남진무사는 석은평과 임우한의 이름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연적하에게 이미 황제가 부여한 생사여탈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양현 현령 아들이 아니라 현령 석강월을 죽였다 해도 그걸 두고 뭐라 할 금의위는 없었다.
하지만 연적하는 다르다.
그는 행여나 금의위와 포졸들이 오해할까 봐 묻지도 않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구천노도의 제자이자, 내 사손들을 기녀 취급하고 협박까지 하더라고요. 그래서 황하에 집어 던진 거예요.”
동유수 남진무사가 바로 말을 받았다.
“현양현 현령과 임해수 대행수가 자식 농사를 망쳤군요. 혹시 물질을 할 수도 있으니 던지기 전에 다리라도 자르지 그러셨습니까.”
장부아 북진무사도 얼른 장단을 맞췄다.
“잘하셨습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인두겁을 쓴 축생들은 빨리빨리 보내 줘야 합니다.”
두 금의위의 아부성 발언에 민망해진 연적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참, 동 대인. 우리 진우생 매제는 잘 지내고 있나요?”
“예, 진 총기는 파견 중이라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일을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다행이네요. 동 대인이 가끔 우리 외숙 집안도 좀 살펴봐 줘요. 내가 자주 들여다봐야 되는데 게을러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관은 물론, 정주 안찰사 서 대인께서 각별히 신경 쓰고 있으니까요.”
“나쁜 짓 한 걸 봐 달라는 게 아닌 거 알죠? 나쁜 놈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예요. 뒷배가 없으면 잡아먹히는 세상이라.”
“남천 대협의 의기가 어떠한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기대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맙네요. 바쁘신 분들이니 그만 가 보세요.”
가라는 말에 동유수 남진무사와 장무아 북진무사는 군말 없이 작별 인사를 올리고 돌아섰다.
밀물처럼 몰려왔던 포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포졸들을 이끌고 온 유종은 포졸들과 떠나지 못하고 이두호와 상소엽의 옆에 나란히 섰다.
다시 객점으로 들어가려던 연적하가 문득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형씨들. 호위면 딱 호위만 해. 나쁜 짓 하는 고용인을 도와줄 거면 차라리 하오문으로 가. 알겠어?”
“예.”
이두호, 상소엽, 유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입맛 떨어지니까 가 봐.”
“예, 예…….”
굽실거리던 세 명의 호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한심한 눈으로 그들을 보던 연적하는 객점으로 돌아갔다.
석경장 식솔들이 식사를 마치자 연적하는 남궁연과 지안을 데리고 효자암으로 갔다.
평평한 바위에 도착하자 지안은 바위 끝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바위 아래로 흐르는 황하의 흙탕물이 꽤나 신기했던 모양이다.
연적하는 감회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봉산에서 하산해 객점을 구입할 때만 해도 여기가 자기 인생의 종착지일 줄 알았다.
딱히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었다.
객점을 운영하며 빈둥거리다가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자살바위라 불리던 이 바위에서 심심파적으로 무공을 다듬었다.
칠파의 제자들은 면벽수련을 한다고 하던데, 자신에게는 이 곳에서의 생활이 그랬다.
누구의 눈치를 볼 일도 없었고,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이곳에서는 순수하게 무도의 극의(極意)만 생각했다.
창고에서의 십 년을 제외하면 이 바위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알찼던 것 같다.
지안이 너무 바위 끝으로 가자 연적하가 소리쳐 주의를 줬다.
“지안아!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뒤로 조금 나와!”
“네!”
황하의 격류가 바위를 때려 대며 내는 소음에 지안도 소리를 높였다.
남궁연도 신경이 쓰였던지 지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남궁연과 지안을 보고 있던 연적하가 말했다.
“나한테는 누님과 지안이 전부예요. 누님과 지안이 없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알아. 나도 그래.”
“그런데 왜 가라고 해요?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면서.”
“네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님이 더 좋은 사람인데, 나는 누님을 절대로 어디 보낼 생각이 없다고요.”
그러자 남궁연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좋은 사람이 못돼. 남궁세가를 재건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짓밟았는지 몰라. 나는 아버지를 닮았어.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거든. 그런 뒤에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그게 뭐 어때서요? 정파가 말하는 대의를 위한 거잖아요.”
“그래, 나와 아버지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야. 하지만 너는 달라.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보는 사람이지. 그래서 사람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을 그냥 흘려버리지를 못해.”
“그건 내가 모자라서 그래요.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치우쳐서 그런 거지 좋은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에요. 어제도 아홉 명이나 황하에 집어 던졌다고요.”
“남맹은 너를 등에 업고 호천맹과 전쟁을 벌일 거야. 가장을 잃은 가정이 붕괴되고, 굶주린 아이들이 거리로 내몰린다고 생각해 봐. 네가 그걸 언제까지 참고 견딜 수 있을 것 같니?”
“그래서…… 가야 된다고요?”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가는 게 맞아. 이곳에 남아 있으면 너만 힘들어져. 한번 경험했으면 됐잖아. 평생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아. 나를 만나 그렇게 된 것 같아서, 미안해 죽을 것 같아. 그러니까…….”
“가라고요?”
“응. 지금은 그게 너와 나를 위한 최선이야.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올 거라 믿어.”
“정말요? 정말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어요?”
한순간 연적하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의 지혜는 하늘에 닿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연적하에게 남궁연의 말은 사막의 생수와도 같았다.
남궁연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래. 다시 만날 거야.”
“진짜죠?”
“그렇다니까.”
“진짜, 진짜, 진짜죠?”
“훗! 그래. 진짜야.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니?”
“없어요. 그렇다면 갈게요. 구주에서처럼 돌아오는 방법이 있겠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올게요.”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남궁연이 연적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본 연적하는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다잡았다.
남궁연과 지안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네 번째 하늘’이 아니라 아홉 번째, 열 번째 하늘도 두렵지 않았다.
연적하가 결의를 다질 때, 남궁연은 지안을 안고 황하를 향해 돌아섰다.
연적하를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다.
조금 전에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했건만, 그는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