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12
2.
새로 올린 기와의 짙은 빛이 정오의 태양아래 뜨거워져 가는 시간, 기와들이 내는 열기가 의혈대전 안으로까지 스며든 것인지 내부공기가 뜨거웠다.
그 이유는 얼굴을 마주한 자들의 뜨거운 숨 때문이다.
“항주무림맹에는 정말로 면목이 없으나 본 파의 사정이 위태한 마당이라 달리 도리가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남경의 근본을 잃게 되면 본문의 자취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 반드시 막아야만 합니다. 항주의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이러한 결정을 한 고충을 이해해 주십시오.”
관운장의 수염을 흔들며 안타까운 얼굴로 이야기하는 궁모달을 명세기는 찡그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표정은 부상으로 인한 것이기도 해서 그렇게들 이해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짜증과 분노로도 이해했다.
그러한 마음을 표정으로 드러낼 만큼 명세기의 심사는 뒤틀리고 있었다.
‘더러운 놈들이, 소림과 무당이 떠나고 나니 발을 빼겠다고?’
예상하지 않았던 경우가 아니지만 이렇게 빨리, 노골적으로 행동 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유가 아주 치졸하다.
남경제검문과 적대관계에 있던 강호인들이 무리를 지어 공격하려 한다는 것이다.
궁모달이 핵심전력들을 데리고 문파를 비운 때를 노린 위기라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궁모달의 옆에 앉은 칠도문과 해룡문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명세기는 차가운 숨을 이빨 사이로 뱉어냈다.
‘이미 가겠다고 결정을 자들을 구차하게 잡을 수는 없다. 그래, 가라,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야. 너희들은 이렇게 돌아감으로서 기회를 잃는 다는 걸.’
찡그렸던 얼굴을 풀며 짐짓 무거운 한숨을 내 쉰 명세기는 입을 열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세 문파에 적들이 나타난 것은 녹림의 준동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하다면 돌아가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터라 이 명모는 걱정이 큽니다. 명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기 위해서는 수장들이 문파에 있어야 할 것은 자명한일, 그러한 세 분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부디 무탈하시기를 빕니다.”
녹림과 연관한 일이 아니겠냐는 명세기의 언급에서 표정을 움찔했던 세문파의 수장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생각보다 쉽게 결정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무탈하시기를 바란다는 말로서 작별과 절연을 명세기는 말했다.
이로서 항차 항주무림맹과 인연을 다시 맺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없다. 녹림이 재침공한다면 항주무림맹은 사라지게 되리라.
궁모달이 의자를 밀고 일어서서 포권했다.
“그럼 이만, 항주무림맹의 앞날에 광영이 있기를 바라며 맹주의 부상이 쾌차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모두들 안녕히 계시기를.”
궁모달에 이어 해룡문주 왕충과 칠도문주 하진도 포권하며 인사말을 했다. 의례적이지만 정중한 그 인사를 항주무림맹 인사들이 마주 받았다.
뜨겁게 내리치는 태양 아래로 사라져가는 남경제검문과 해룡문, 칠도문의 무리를 항주사람들은 지켜봤다.
항주무림맹의 무사들은 눈에 띄게 동요하며 수군거렸다.
그야말로 모든 병력들이 다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들의 동요를 비격과 모금량이 단속하는 동안 또 하나의 일이 벌어졌다. 패도문주 허일관이 항주무림맹을 탈퇴해 돌아가겠다 밝힌 것이다.
창백한 낯빛으로 허일관을 응시하던 명세기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정말로 항주를 떠나시겠다는 것이오?”
미간을 경련하듯 짧게 꿈틀한 허일관은 짧게 대답했다.
“돌아가겠소이다.”
명세기는 물론 은발야와 오세명과 호일도와 용인성은 허일관의 얼굴에서 좌절을 읽었다.
무의지를 찾아냈다. 모든 것에 대한 포기요 방임이다.
더 이상 항주무림맹에 있지 않겠다는 거다.
뭐가 저 인물의 마음을 저리 만들었는지는 짐작이 가지만, 이건 너무도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다.
갈아놓은 칼날과도 같은 시선을 던지던 명세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당주의, 아니 문주의 의지대로 하시오.”
명세기가 받아들이자 허일관은 궁모달 등이 그랬던 것처럼 일어서 포권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과 눈길을 교환하지도 낳았다.
그대로 돌아서서 의혈대전을 나갔다.
그의 등에 죽은 자들의 그림자가 매달려 있었다. 한규와 관창과 조두량 등의 원혼이다.
의혈대전의 그늘 안에서 떠나가는 자들의 초라한 행색을 지켜보던 목계백은 안으로 들어갔다. 명세기를 비롯해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항주무림맹 인사들을 응시하며 그 앞으로 다가가 허일관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우리만 남았군요.”
목계백의 그 한마디가 마주 앉은 자들의 얼굴을 서로 돌아보게 만들었다.
정말로 특별한 관계를 맺은 자들만 남았기 때문이다.
용인성은 흑전문주로서 항주의 터줏대감이며 뿌리와도 같은 자이고, 은발야와 오세명과 호일도는 각별한 사이이며, 명세기와 목계백은 은밀한 관계다.
물론 이들 전부와 목계백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남은 자들은 항주무림맹의 근간이며 결코 떠날 수 없는 자들이다.
“이제 항주무림맹의 진면모를 만들 때가 됐습니다.”
명세기가 창백한 얼굴을 찌푸린 가운데 역시 부상으로 낯빛이 좋지 않은 은발야가 물었다.
“진면모를 만든 다는 건 무슨 말인가?”
질문한 은발야가 아닌 명세기를 응시하며 목계백은 말했다.
“항주무림맹에 사리사욕을 가지고 참여 했던 자들이 다 떠났습니다. 이젠 진정한 의지와 근본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만 이 자리에 남았습니다.”
진정한 의지란 은발야등을 말하는 것이고 근본적인 의지란 용인성을 말하는 것이다.
용인성의 입장에선 항주를 버리고 떠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흑전사람들에겐 항주가 고향이고 집이며 삶의 터전인 까닭이다.
은발야등은 처음부터 복수라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참여했다.
항주무림맹의 원동력이고 주체인 것이다. 목계백이 말한 근본적인 의지다.
그것에 명세기를 포함한 것일지는 듣는 사람들 모두가 해석을 달리 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들이 항주무림맹의 진정한 주인이겠지요. 그 주인들이 집을 가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손길에 성세가 달렸겠지요.”
목계백의 시선을 받아내던 명세기가 맹주로서의 위엄을 보이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항주무림맹의 부흥의 전기로 삼자는 것이냐?”
고개를 끄덕인 목계백은 정중하고 공손한 어투로 대답했다.
“이제까지 맹주의 영도하게 달려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리하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비금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온 여정은 결코 간단치 않았습니다. 그때의 초심으로 닥친 일들을 헤쳐나간다면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이 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들이고 각기 내막의 한 자락씩을 아는 사람들이지만 목계백은 명세기의 위엄을 최대한 살려줬다. 그의 의견을 좇는 것처럼 했다. 그래야 하고 그러한 체제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생각을 굴리던 명세기는 목계백의 저러한 말을 하는 의도를 짐작하려 애썼다. 쭉정이가 되어버린 항주무림맹의 상황을 알면서도 저러한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제 위험은 사라진 듯한 말.
‘그런가? 녹림의 퇴각은 의도된 것인가? 그들이 이제 공격대상을 바꿨다?’
소림과 무당이다. 그들의 본산이 소뢰음사의 혈승들에게 공격받았다 했다.
진짜 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소림과 무당은 돌아갔다.
회군하는 그들을 녹림이 곱게 보내주지 않는 다면 피해는 더욱 더 커지리라.
하지만 위험한 짐작이다. 말 그대로 짐작일 뿐이다.
그런 요행과 같은 판단을 토대로 안심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그러지 않을 수도 없다.
이러한 때에 녹림이 쳐들어온다면 항주는 함락되고 말 것이다.
‘외통수의 형국인가……’
어금니를 힘주어 물고 생각을 거듭하던 명세기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강호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절감케 한 하루가 됐구나.”
목계백을 향해 그렇게 말한 명세기는 은발야등 좌중 인사들과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어냈다.
“남경제검문을 비롯한 문파들은 저희들의 이익과 안전을 고려해, 계산으로 손익을 따진 후에 돌아갔소이다. 무천당주를 맡았던 패도문주 허일관도 등을 돌렸소. 이게 강호의 현실임을 우리 뼈저리게 느끼고 있소.”
명세기의 눈동자가 대호처럼 퍼런빛을 냈다.
“허나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수는 없는 일, 우리가 건재하고 항주무림맹의 이름이 건재 하는 한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오. 목계백의 말대로 우리의 진면모를 만들어 낼 때가 됐다고 생각하오. 사리사욕으로 발을 들이민 삿된 인사들을 모두 걷어낸 지금이 그 최적의 시기라 여기오.”
명세기는 좌중 인사들 모두를 향해 진심어린 한마디를 던졌다.
“항주무림맹의 이름을 강호의 중심에 세웁시다.”
* *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위험징후가 없었다.
녹림의 자취는 항주 인근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목계백은 흑풍을 타고 산과 들을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예상대로 녹림은 물러갔다. 정탐자들조차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 이유가 소림과 무당과의 결전을 끝내고 항주를 도모하겠다는 의지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항주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흑전사람들은 정말로 열심히 움직였다. 파괴된 포구와 여타의 시설들을 복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흑전 사람들이 기실 항주의 사람들이라 그 정성과 집중이 대단했다. 파괴가 새로운 개발을 더하고 일거리를 만들어낸 측면도 있어 항주를 활기를 띄었다.
용인성은 돈을 아끼지 않고 풀어 사람들의 인심을 샀고, 흑호단의 모집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이어졌다.
하루 종일 혹호단 모집심사에 매달리다 겨우 짬을 낸 비격과 모금량에게 목계백은 술 한 잔을 제안했다. 세 사람은 바로 의기투합해 술자리를 만들었다.
후미진 반점에 들었다.
항주의 번화함과 달리 작은 반점 안에는 손님들이 거의 없었다. 그런 적막과 한가로움을 오히려 즐겼다. 부딪치며 주고받는 세 사람의 술잔에는 술보다 더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흑호단 응모자들의 자질은 쓸 만한가?”
모금량이 술잔을 확 털어 넣고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짜증이 나. 제대로 된 놈들이 없어, 모두 오합지졸들이야. 어디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몰려왔어. 돈 많이 준다는 소리만 듣고 온 놈들이지.”
그렇다. 재천당주 용인성은 파격적인 급료를 제안했고 그걸 명세기가 승인했다.
그런 미끼라도 있어야 현재의 항주무림맹으로선 사람을 모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오합지졸들에 대한 염려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비격과 모금량 등이 두드려 단련해야 하는 것으로 결정인 난 것이다.
“그래도 제법 모였지? 사흘 만에 오백 명이 지원했다고?”
이번엔 비격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가 온 건 사실이야. 녹림이 다시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는 판인데도 그렇게 됐으니 고무적인 일이지. 하지만 탈영자들이 생길 수 있다. 첫 급료의 반을 선불로 지급한다는 조건 때문에 혹한 자들이 상당수야. 그런 자들은 반드시 탈을 만들게 마련이지.”
“그건 대처하기 나름이고, 어쨌든 이제 녹림공격에 대한 두려움은 옅어지고 있는 셈이지? 지원자들의 대부분이 어제 오늘 입맹한 자들이라면서?”
모금량이 다시 또 한 잔의 술을 비우고 입을 열었다.
“맞아. 녹림이 완전히 물러갔다는 소문이 갑자기 퍼져서지. 그 소문의 진원지가 흑전사람들이고 맹호 네가 지시해서 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아무튼 효과가 있었다. 내일도 입맹 희망자가 오늘만큼 넘쳐 날거야.”
엷은 미소를 지은 목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주효했지. 하지만 소문만은 아니야. 내가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비격과 모금량은 동시에 고갤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
손에 잡은 술잔을 들여다보던 목계백은 천천히 잔을 비우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내일쯤이면 소림과 무당에 대한 풍문들이 들려올 것이야. 우리가 예상하는 것 이상의 대단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겠지. 결과도 생각 이상일 거야. 바야흐로 천하는, 강호는 격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지. 이건 해남파의 복수로 인한 한시절의 분쟁이 아니야. 강호의 역사를 바꾸는 엄청난 일인거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우리가 있기 때문이야.”
비격과 모금량은 술잔을 들다 말고 경직했다.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이 두 사람의 가슴을 때리고 영혼을 강타했다.
전율이 일었다. 술잔을 잡은 손은 가늘게 떨렸고 눈동자도 그랬으며 숨은 거칠게 일어섰다.
목계백이 뱉어낸 말, 저 한마디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술잔을 기울였던 남창에서의 그날, 세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아무도 입 벌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물음을 던지지 않았지만 알았다. 그것은 서호에서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 싸우던 때부터 생긴 믿음이다.
목계백은 뜨거운 의지가 일렁거리는 눈동자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우리는 강호무림의 새 역사를 만들 거다. 항주무림맹은 그 시작이야. 해남파의 등장은 강호에 격변을 알리는 신호가 될 것이지만, 진정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야.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 누구와, 그 어떤 세력과도 싸워 이길 준비가 돼야 해.”
목계백의 눈처럼 불길이 솟구치기 시작한 비격과 모금량은 동시에 물었다.
“그럴 방법이 뭐가 있나?”
“우리가 뭘 해야 하지?”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아내며 목계백은 술잔을 뒤집었다.
“철마진기(鐵魔眞氣)라는 것이 있다. 그걸 수련해라.”
미간을 좁히고 작게 중얼거리던 두 사람 중, 모금량이 눈을 확 치떴다.
“서, 설마 이백년 전에 강호에 나타났다 사라진 대살성 철마의 절기를 말하는 것이냐?”
비격은 이제 이해하고 눈을 부릅떴다.
“누구라고? 철마? 이백년 전의 그 철마?”
사실이라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백년 전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절대무인이다.
그 강력한 무공과 손속의 가공함으로 강호가 ‘마’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는 마인이라기보다는 패도의 무인이었다.
중원의 북쪽에서 어느 날 나타나 고수들을 차례로 짓밟고 흑도문파들을 분쇄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야말로 신비한 종적만을 남겼다.
그의 무공을 철마진기라 했다. 강호는 그와 그 무공을 두려워했다.
“그, 그, 철마진기란 말이지?”
말까지 더듬는 모금량에게 목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다. 내가 가르쳐 주겠다.”
비격이 황당한 충격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그때, 반점 안으로 그들이 들어왔다.
“여기들 계셨네요.”
반색하는 얼굴로 다가오는 하대구과 조승의 뒤로 태웅이 커다랗게 걸어왔다.
술 한 잔 하러온 게 분명한 세 사람을 보고 목계백은 작게 말했다.
“이들에게도 가르칠 거다.”
비격과 모금량은 세 사람을 돌아보다가 갈증 난 사람들처럼 술잔을 들이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