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26
4.
두 동강 내버린 허종벽의 시신은 참혹했다.
그 죽음을 내려다보던 목계백은 무심한 시선을 들어 혈천진영을 응시했다.
경악 어린 탄성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백혈맹무사들의 탄성 아닌 탄성도 작지 않았지만 혈천측의 반응은 상당했다.
해남파의 일대제자 고수가 단칼에 죽었기 때문이다.
요동치는 혈천의 대병력을 응시하며 목계백은 생각했다.
‘갑자기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가 있다.’
그게 뭔지 예감은 잡히는데 분명히 알 수는 없었다.
분명한 건 지금이 접전과 관련한 것이라는 거다.
전세에 영향을 줄 뭔가가 혈천측의 시도로 진행되고 있음이다.
그럴만한 게 뭐가 있는지 바로 가늠이 되질 않는다.
‘기습대를 지렛대로 사용하는 공격은 무산됐다. 우리가 철수하자마자 그 사실을 알았을 터, 그런 이유로 전면공격을 미루고 있다가 이제야 들이쳤어.’
그 부분을 목계백은 곱씹었다.
출정 전에 파악한 사실로는 혈천 측이 대규모 공격 직전이었고, 기습대를 준비해 타격을 주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방령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휴식을 취하고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혈천의 공격을 예상해서다. 그런데 혈천의 공격은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준비한 공격을 해왔고, 접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물러나서는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있다.
이건 사기를 진작시키는 차원으로 계획된 일이 아니다.
‘뭔가 다른 게 있다.’
확실하다.
그게 아니라 혈천의 사기를 드높이고 백혈맹의 사기를 꺾으려는 것이었다면 무참히 실패했다.
허종벽이 단 일도에 갈라질 것이라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중요한건 이게 아니다. 혈천 측이 의도한 것이 따로 있다.
이 상황 뒤에서 벌어지는 무엇인가가 있다.
‘애초에 의도했던 기습이 실패했고 전면전으로 나섰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에 목계백은 미간을 확 좁혔다.
‘설마, 또 기습을?’
불안한 예감을 잡고 목계백은 뒤를 돌아봤다.
좌군병력 뒤로 보이는 총사 부관승을 응시했다. 그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흔들림 없는 그의 시선을 보고 알았다. 저자가 모르는 혈천의 기습은 없다는 것을.
‘호수를 통한 기습대의 사정도 파악하고 있었지. 좌군총사 부관승, 저자가 부리는 기밀 정보수집의 은자들이 있다는 소리. 전선을 드나드는.’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이미 기습대의 정보를 토대로 출정을 명받았을 때부터 짐작했다.
은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모르나 부관승이 예전부터 부려온 자들임이 분명하다.
강남상련을 위해 기밀을 수집하던 자들이다.
그런 소문이 있었다. 부관승이 죽이려 한자는 그 다음 날 시체가 된다는.
흔들림 없이 묵직한 시선을 던지는 부관승, 그를 응시하던 목계백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혈천 측을 향해서다. 그들의 동요는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또 나서 싸우자거나 하는 반응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차분하게 가라앉는 저 모습은 직전의 예감과 맞물려 뇌리를 자극한다.
‘부관승의 은자들이 파악 못 한 뭔가 있다.’
어금니에 힘을 준 목계백은 왼손을 느릿하게 들어 손을 쫙 폈다가 주먹을 쥐었다.
흑호단에게 주는 신호다.
그것이 가자 흑호단은 긴장하며 밀집했다. 그러나 백혈맹의 다른 자들은 아무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혈천 측을 노려보며 목계백은 부관승에 대해 생각했다.
‘혈천기습대를 파훼하러 병력을 보내놓고 그 결과를 은자들로 하여금 확인케 하지 않았다. 우리 뒤를 따른 은자들은 없었어. 그건 그 일에 투입한 인원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고, 혈천본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는 소리.’
호수를 가로질러 가고 돌아오는 동안 배후를 감시하는 자들이나 주변에 숨은 자들은 없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호수주변을 이동하며 뒤졌었다.
혈천배후의 송림에서도 그랬고 은신했던 갈대밭주변과 뭍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부관승이 딸려 보낸 이목은 없었다. 기밀정보를 수집하는 그들이 차후에라도 혈천기습대와 칠대정예들의 몰살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알아낸다 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부관승와 백혈맹으로선 흑호단이 필요할 것이라는, 그렇게 만들 것이기에 그랬다.
게다가 은자들의 존재를 흑호단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는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
흑호단도 모르는 것이 나아서다.
그런 생각과 예측이 들어 맞아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건 다르다.
부관승이 파악 못 한, 그의 은자들이 보고하지 못한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
그 예감이 강력하게 든다.
부관승의 저 흔들림 없는 눈은 자신감에서 나온다.
모든 게 자신의 이목 안에 있다는 자신감이다.
저런 확신은 정말로 다 파악하고 있거나, 아니면 모르고 있을 때의 그것이다.
어금니를 물던 힘을 풀어 목계백은 혈천 측을 향해 소리쳤다.
“동료의 주검을 누가 와서 가져가겠나!”
다섯 자 대검을 움켜쥐고 종패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해남파의 인물이 나가서 단칼에 두 동강이 나는 걸 보고서도 참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죽어버린 인물은 상관없지만, 이러한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 화난다.
‘결전에 임박해서야 그런 계획을 알려주다니, 나를 바보로 만들고 있구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나가서 검을 휘두르고 싶다.
승패를 떠나서 이 가슴속에 들어찬 울분을 터트리고 싶다.
백혈맹에 대한 울화가 아니다.
해남파에 대한 격노다.
방학천과 그 측근들은 녹림을 우롱하고 있다.
주요결정사항과 정보를 제 때에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명색이 녹림의 지배자 녹림신군이다. 혈천에 가담한 핵심전력이다.
그런데 이렇게 홀대를 하고 있다.
호수를 통한 기습공격이 무산된 후에 지금 이 진격이 진행됐다.
그러나 또 다른 공격준비가 있다. 그건 벌써 정해진 것이었다.
‘이 전면공격과 호수진공과는 별도로 계획된 것이야. 내게 알리지 않은.’
그들은 공격의 핵심에 대해서 알리지 않고 있다가 진공을 시작하고서야 알렸다.
급조된 계획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게 아니란 것을 안다.
물론 작전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그러나 녹림신군이면 알아야 하지 않나?
‘방학천, 네가 무서운 자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나를 계속 모욕하면 참지 않겠다.’
대검 손잡이를 움켜잡은 종패는 방학천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온화한 미소 뒤에 숨긴 그의 본 모습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안다.
그는 좌군총사 부관승이 부리는 은자들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그자들을 모르는 척하다가 오늘 일거에 다 제거했다.
그 일을 한 것이 바로 혈승들 중의 악귀들인 흑혈승들이다.
살인기예들만을 도 닦듯이 수련한 그들은 그 누구도 죽일 수 있는 희대의 살인자들, 암살자들이다.
부관승의 은자들은 그들에게 다 죽었다.
흑혈승들이 위치를 파악하고 그들의 뒤로 붙어 따르는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혈천진영을 엿보고 다녔다. 그러다가 오늘 진격을 시작함과 동시에 단번에 해치운 것이다.
‘부관승, 네가 무섭다는 걸 알지만 네 상대는 더욱 무섭다.’
백혈맹좌군병력 뒤로 보이는 부관승을 응시하며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던 종패는 불현 듯 무사들의 앞으로 나갔다. 시선은 맹호에게로 고정했다.
“그대가 항주무림맹의 맹호인가!”
우렁찬 음성으로 터진 물음, 녹림신군 종패의 등장으로 백혈맹이 술렁거렸다.
목계백은 아래로 내린 장도의 끝을 느릿하게 들어 종패를 겨누었다가 다시 느릿하게 내렸다. 그 행동 후에 종패가 던진 물음에 답했다.
“내가 목계백이다.”
성큼 성큼 앞으로 걸어 나온 종패가 목계백이 한 것처럼 다섯 자 대검을 겨누었다가 내렸다. 힘찬 기백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왔다.
“항주에서 겨루지 못한 게 아쉬웠다. 맹호라는 존재를 인지하고 갔음에도 널 찾을 시간이 없었지. 물론 그때에는 널 크게 안중에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너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실력을 갖춘 자로구나.”
목계백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무시당할 칼을 가지진 않았지. 하지만 소림의 사대금강을 홀로 상대하는 녹림신군에 비하겠나?”
목계백은 바로 뒷말을 이어냈다.
“그런 엄청난 실력을 가진 자가 왜 해남파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군.”
종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화를 드러내진 않았다. 천천히 호흡으로 심화를 다스리며 제가 받은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그렇게 말하니 묻겠다. 너야말로 왜 백혈맹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나? 항주무림맹은 자주적인 조직이 아닌가? 너와 같은 실력자가 일개 칼잡이 노릇을 하고 있으니 안타깝고 이상하구나. 무엇을 위한 일인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얼굴로 목계백은 입을 열었다.
“녹림의 총표파자가 해남파와 손잡아 혈천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해남파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극명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녹림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호하지. 무엇을 위한 일이냐는 물음은 누구에게 하는 건가? 내게는 목적이 있다. 분명한 목적이지. 너 역시 그러한가?”
종패와 목계백의 시선이 허공의 한 점에서 만나 무섭게 얽혔다.
인상을 쓴 얼굴로 명기춘은 목계백과 종패를 심각하게 바라봤다.
“저놈들이 무슨 수작질을 하고 있는 것이야?”
수작질까지는 아니어도 죽기 살기로 싸우는 광경이 아니기에 기묘하기는 하다. 종패가 나선 순간에 목계백이 죽을 것이라는 걸 명기춘은 직감했다.
그런데 종패는 검을 휘두르는 대신 혀를 휘두르고 있다. 목계백도 혀를 놀리는 중이다. 논검을 하는 것도 아닌 기묘한 말들을 주고받고 있다.
“녹림신군 저자가 왜 저러고 있는 것이야? 무슨 생각이지?”
명기춘은 의문을 드러냈다. 마음 한구석으로 어서 목계백을 죽여주기를 바라있다.
그게 객관적으로 봐서 백혈맹에게 나쁜 일이라는 것도 망각하고 바라는 바다.
그런데 녹림신군은 검을 휘두르는 대신 말을 하고 있다.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생각하십니까?”
심각한 표정의 명기춘을 무심히 응시했던 부관승은 종패와 목계백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대의 목을 베겠다는 협박이나 욕설은 아니로군요.”
“기묘한 말들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종패가 나섰기에 접전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그것을 기대했다는 말은 삼킨 명기춘의 음성에 담긴 여운이 부관승의 귓가에서 맴돌이를 쳤다.
자신 역시도 그런 광경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도 자못 궁금했다.
“저 둘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예? 승패요? 그거야……”
당연히 종패가 이기지 않겠냐는 말을 하려던 명기춘은 입을 닫았다.
직전에 맹호가 보여준 한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건 도강분출이었다.
그 엄청난 일격으로 해남파의 허종벽이란 자를 두 동강 내 죽였다.
부관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녹림신군 종패가 당연히 이길 것으로 짐작되지요? 하지만 맹호의 무위도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군요. 저들의 승패는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건…… 아무리 그래도 사대금강을 홀로 상대한 종패에게…… 되겠습니까?”
“그렇게도 생각이 듭니다만……”
무의미한 고갯짓을 끄덕이며 말끝을 흐리던 부관승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종패는 왜 저러고만 있는 건가?’
의문이 든다.
어째서 싸우지 않고 저러고만 있는 것이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저건 마치 싸울 생각은 있지만 더 큰 뭔가를 위해 참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맞선 목계백 역시도 비슷하다.
위축된 것은 아니지만 얽혀 싸울 생각도 없는 것 같다.
둘은 서로 바라보며 시간만 보내고 있다.
‘가만,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제야 찜찜하던 한 가지가 뇌리에 곤두섰다.
밀영대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이후부터 그렇다.
평시라면 오전 중에 다시 한 번의 연락이 왔어야 한다.
혈천의 진공 연락 후엔 아직 그것이 없다.
‘혹시?’
부관승이 미간을 뒤틀던 그때였다.
무영사의 뒤로부터 엄청난 살기들이 몰려왔다. 그걸 인지한 순간 살기의 한줄기가 검은 번개처럼 날아왔다.
부관승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태청검법의 조화를 일으킨 검은 흑 빛 번개를 후려쳤다.
강력한 충격이 검을 통해 느껴졌다.
흑 빛 번개는 허공을 선회해 돌아갔다. 그걸 잡는 검은 승복의 혈승들이 보였다.
“습격이다!”
누군가의 외침 속에서 흑혈승들의 손에서 흑 빛 번개가 비상했다.
번쩍하는 선을 허공에 그으며 비상한 흑 빛 번개들은 백혈맹 좌군 진영을 헤집었다. 무사들과 병기들이 풀잎 갈라지듯이 우수수 갈라졌다.
“저게 뭐야?”
기함한 명기춘을 밀어 흑 빛 번개의 공격을 피한 부관승은 혈천의 공격을 보고 알았다.
또 다른 기습이다. 자신의 밀영대는 저들에게 당했다.
“시작했구나.”
나지막하게 나온 종패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목계백은 뒤를 돌아봤다.
적을 앞에 두고 보일 행동은 아니지만, 종패가 자신을 당장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공격한다 해도 상관없기에 고개 돌려 그들을 봤다.
‘검은 승복을 입은 소뢰음사의 혈승들.’
한눈에 봐도 일백여 명의 숫자다. 모두 비상한 무공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들의 손에서 흑 빛 번개와 같은 암기가 비상하고 있다.
일월륜과 같은 무기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다.
닿는 걸 다 가르고 있다.
‘저런 무기는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충격 어린 시선을 던지던 목계백은 다시 종패를 돌아보고 말했다.
“싸울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하지.”
종패는 흑혈승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장검을 세웠다.
“그냥 가긴 섭섭하지 않나.”
종패의 주변으로 새카맣게 밀려오는 혈천무사들을 보며 목계백은 미소 지었다.
“그렇군, 싸움터에 있다는 걸 잠시 잊었어.”
장도를 세운 목계백은 종패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