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43
4.
대유장주 공손명(公孫銘)은 올해로 딱 환갑이다.
잔치를 벌일 나이가 되도록 살았으니 한평생 제대로 살긴 산 셈이다.
물론 아직도 정정하고 매일같이 소림권을 수련하는 덕에 이삼십년은 거뜬하리라 생각한다.
재산도 제법 모았고 명성도 얻어서 여남 인근에서는 대접받는 위치다.
그게 다 소림과 연을 맺은 덕분이다.
일찌기 소림의 속가제자로서 소림권을 배우고 무관 교두 노릇을 하다 대유표국의 표사가 됐다. 표국주의 외동딸과 눈이 맞은 것은 천운이라 하겠다.
소림속가출신의 배경이 작용한 것인지 국주는 딸과의 혼인을 허락했다. 그 후로 순탄행로를 걸었다.
어려운 일이 없었다.
표행도 언제나 성공했고, 간혹가다 산적들에게 털리는 때가 오면 손수 나서서 응징하고 표물을 찾아왔다. 그러한 일들로 인해 명성을 쌓았다.
실상 대적했던 산적들이나 흑도무리들은 잡배들에 불과했다. 진짜 녹림십팔채의 산적들과 부딪쳤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말 순탄한 인생이었다.
장인인 국주가 타계하고 표국을 물려받아 운영하며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아 기르고 출가시키고 강호의 명성과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살았다.
소림과의 관계도 돈독했고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돈독한 소림과의 관계가 그 평정을 깨고 말았다. 벌써 이레나 됐다.
“쯧.”
서편으로 기우는 해를 보며 혀를 찬 공손명은 장원의 전경을 다시 한 번 돌아봤다.
삼천의 병력이 우글거리는 장원은 시장판을 방불케 했다.
물론 저자처럼 시끄럽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절도 있는 행동들을 보이고 있지만, 백혈맹 우군의 별기군이 차지한 장원은 짐승 우리처럼 변했다.
‘이들이 어서 물러가야 할 텐데.’
간절히 바라는 바다. 소림과의 연이 있고 백혈맹의 요청을 물리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이들을 받아들이고 말았지만 이건 아니다. 이레씩이나 이들과 같이 있자니 숨이 막히고 불안에 겨워 자꾸 혈압만 올라간다.
‘아이들을 내보낸 건 잘한 거야.’
그렇게 했다. 다들 피신시켰다.
금방 가리라던 자들이 벌써 이레나 눌러앉아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다.
이 전쟁이 얼마나 갈지 모르기에 불안은 더욱 커진다.
풍문으로는 백혈맹이 고전하고 있다 한다.
만일 혈천이 이기기라도 하는 날이면 보복을 피하지 못하리라.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불안을 씹으며 공손명은 후원으로 향했다. 별기군의 수뇌부가 있는 곳이다. 가산을 만들고 정자를 들였는데 그 높이가 제법 돼 망루 역할을 한다. 거길 차지한 수뇌부에게 술과 밥을 들인 게 벌써 이레가 된 거다.
‘내 정자를 더럽히고 있는 놈들.’
불만과 울화를 억누르며 공손명은 후원에 접어들어 정자로 걸음을 바삐 옮겼다.
오늘은 언제 움직일 것인지 확실하게 물어볼 작정이다.
삼천병력을 먹이고 재우느라 장원의 곳간이 거덜 날 지경이다. 물론 저들은 군량미를 조달하고 보급받고는 있지만, 호의를 안 보일 수가 없다.
‘제대로 된 전쟁을 하긴 하는 것이냐?’
울화 끝에 곤두서는 것은 역시 그 생각이다.
이 전쟁의 시발이다.
백혈맹과 혈천으로 나뉘어 벌이는 이 혈투의 시작은 해남파의 멸문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사건으로 인해서다.
십 년 전에 일어난 그 일은 강호의 비사다.
온갖 추측과 소문만 무성했을 뿐, 정확한 진상은 아무도 말지 못했다.
그런데 그 비사의 진실이라며 해남파의 후인들이 말하고 나섰다.
해남무인들이 나타난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멸문이 강호의 음모로 인해서라고 주장했다. 소림과 무당을 위시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와 유력문파들이 합작하여 만든 추악한 살육이었다는 주장이다.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들은 처절한 복수를 외치며 전쟁을 시작했다. 녹림과 소뢰음사와 하나가 된 그들은 혈천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소림과 무당을 공격했다.
충격적이게도 소림과 무당은 본산이 유린당했다. 그 후에 백혈맹을 결성에 반격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어려운 전쟁이다. 아미파는 이미 그들에게 멸문당했다.
‘혈천의 주장이 만일 사실이라면?’
언제부턴지 고개를 들기 시작한 한 가닥 그 의혹이 점점 커지고 있다.
만일 정말로 강호문파들이 음모를 꾸며 해남파를 멸문시킨 것이라면 엄청난 일이다. 해남파의 복수천명은 당연하다. 강호의 누군들 그런 일을 당하고 복수하려 하지 않겠나? 원수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는 법이다.
‘거짓이라고는 하지만……’
백혈맹은 터무니없는 모함이라고 말하지만, 그 주장을 믿었지만, 이제는 모호하다.
아니 상관없다. 어차피 강호의 싸움이다. 이기는 쪽이 진실이 된다.
그렇기에 이 전쟁의 향배를 유의 깊게 지켜보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선.’
그 한마디를 가슴속에 새기며 공손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평생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살아온 시간이 말년에 큰 난관을 만났다. 이번 난관을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한다.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도 그러했으니까.
정자를 보고 그 안에 모여있는 지휘부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던 공손명은 흠칫했다.
뿌우우.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비상을 알리는 소리다. 그 소리에 맞춰 정자의 지휘부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 * *
“백기를 흔들어라!”
목계백의 외침에 맞춰 조승과 하대구가 흰색 면포를 꺼내 흔들었다.
뿔나팔소리가 울려 퍼진 대유장의 장원 담장에는 궁수들이 새카맣게 일어섰다. 그들에게 적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조승과 하대구는 소리쳤다.
“좌군의 혹호단이다!”
“좌군총사를 모시고 왔다!
짧은 호각소리가 타더니 궁수들이 화살을 날렸다. 수십 발의 화살이 질주하던 흑호단의 발 앞에 박혔다. 목계백과 모두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편으로 기우는 해를 한번 확인한 목계백이 손짓했다. 태웅이 바로 소리쳤다.
“우리는 백혈맹 좌군소속의 무사들이다! 총사를 모시고 왔다! 부상 중이시니 속히 장원문을 열고 맞으라! 지체하면 천추의 한을 남기리라!”
장원 담장 위로 오른 한 사내가 소리쳤다.
“무엇으로 너희의 말을 믿겠는가!”
태웅은 종소리 같은 큰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누구든 나와서 확인을 하라! 무엇이 두려운가? 우리는 일백 명뿐이다! 우리가 설령 적이라면 물리쳐야 하지 않나! 장원 안에만 숨어 있을 텐가?”
태웅의 도발이 먹혀들었는지, 잠시 후에 장원 문이 열렸다.
창검을 잡은 기마대가 밀려 나왔다.
물경 삼백의 숫자다. 아마도 별기군이 보유한 전부일 터다.
그들이 반원형으로 포진하며 다가왔다. 그중에서 한 명이 나섰다.
“좌군총사의 존안을 뵙겠다!”
목계백이 고갯짓하자 태웅은 말을 탄 채로 앞으로 나갔다.
사내가 멈춘 지점까지 다가가 말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자연히 면포로 동여매고 함께 탄 부관승의 모습이 드러났다. 창백한 안색과 처참한 표정이다.
부관승의 모습을 알아본 별기군 사내는 즉각 호각을 불고 소리쳤다.
“좌군총사시다! 장원문을 열어라!”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거둠과 동시에 장원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으로 별기군 삼백기마대와 흑호단이 들어갔다.
예상보다 훨씬 넓은 장원 안에는 별기군의 전 병력이 있었다. 기마대를 수용할 마구간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흑호단의 말 일백 필이 더해졌으니 한계를 넘어선 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목계백과 흑호단은 대유장에 계속 머물 생각이 없다. 그럴 수 있는 여건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장원 내부의 상황과 무사들의 눈빛을 살핀 목계백은 별기군 수령이 누군지를 찾았다. 곧 알았다.
검은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다. 근엄한 얼굴에 공동파의 문장이 들어가 있는 검을 쥔 자다. 그에게 바로 말했다.
“혈천의 지군이 추적해 오고 있습니다. 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공동파의 속가인지 본산제자인지 알길 없는 검은 수염의 중년인, 확실히 도사로는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에 당황이 곤두섰다. 좌군 총사가 부상당한 채 찾아왔다는 것도 놀라울 지경인데, 혈천지군이 공격해 온다니?
“그게 무슨……”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뿔나팔소리가 또 울려 퍼졌다. 정자의 지붕에서 망을 보는 무사가 불어댄 비상경고다.
저 소리는 적의 공격을 알리는 소리다.
“전투준비 명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다급하고 간곡하게 말한 목계백은 부관승을 돌봐야 한다는 기세로 장원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 자리에 남은 별기군 수령은 멍한 시선을 던졌다.
부관승의 얼굴을 보긴 했으나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다. 그의 몰골을 보니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저 모습이 말하는 건 하나, 좌군이 무너진 거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화가 치밀었다.
‘혈천을 우리에게 몰고 오다니!’
하지만 화를 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상황, 명령을 외쳤다.
“맞서 싸울 준비를 해라! 우군진영에 전서를 날려라!”
* * *
해는 이제 불그스름한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을이 지고 있다.
저 해가 넘어가기 전에 끝장을 낼 것이다.
장원 안의 개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도륙하리라. 그 일에 종패의 도움은 필요 없다.
이대로 끝낸다.
점점 가까워지는 대유장을 향해 말달리며 호인량은 외쳤다.
“흑혈승들은 앞으로 나서라!”
서른 명밖에 남지 않은 흑혈승들이 호인량의 옆으로 튀어나왔다.
말 배를 차며 무섭게 질주하는 그들과 호인량은 전력으로 달렸다.
그 뒤를 삼천의 기마대가 따랐다. 종패의 지군이 도착하기 전에 끝을 낼 생각이다.
“우리만으로 끝장을 낸다!”
호인량의 외침을 들은 혈천 기마대 삼천은 함성을 질렀다.
어차피 종패가 이끄는 지군병력의 도착은 늦다. 그들이 온다면 더욱 쉬울 일이지만, 현재의 삼천 기마대 병력만으로도 충분한 일이다.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
“전군 삼방병진(三方竝進)!”
호인량의 외침에 따라 삼천기마대는 세 무리로 나뉘었다. 호인량과 흑혈승들의 뒤를 일천기마대가, 나머지 이천은 좌우로 나뉘어 장원을 공격했다.
함성이 터졌다. 접전이 시작됐다.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품었다가 버린 목계백은 부관승을 업은 태웅과 같이 선두로 이동했다. 장원의 후원을 향해서다. 그 뒤를 흑호단이 따랐다.
신속한 그 움직임 앞을 막는 자는 없었다.
좌군총사를 보호해 온 자들이고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 이동이 후원 뒷문에 이르자, 수문무사들에게 막혔다.
“무슨 일이오?”
곱지 않은 눈을 치켜뜨는 수문무사들과 방어병력들의 기세는 날카로웠다.
느닷없이 접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과 흥분이 칼날처럼 곤두서게 만들었다.
게다가 다가온 자들의 요구가 터무니없기도 하다.
“문을 열어라. 좌군총사를 모시고 나가야겠다.”
목계백이 말하자 수문무사들은 눈썹을 확 곤두세웠다.
“뭐라? 나가겠다고?”
“무슨 헛소린가! 지금 혈천과 접전이 시작된 걸 모르는가!”
목계백이 마주 소리쳤다.
“그래서 나가겠다는 거다! 봐라! 좌군총사께선 심각한 부상을 당하셨다! 여기에 계속 모실 순 없지 않나! 어서 빨리 의원에게 보이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 시기를 놓치면 생명이 위험해진다! 너희가 그 책임을 질 테냐!”
수문무사들은 움찔했다.
좌군총사의 목숨을 책임질 것이냐는 말에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시도 없이 문을 열 수는 없다.
“사, 상황은 알겠지만, 지시 없이 문을 열 수는 없소.”
어투까지 변한 수문위사에게 이번엔 태웅이 벽력같은 호통을 던졌다.
“무슨 개소리야! 접전이 시작된 마당이라고 너희가 말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나! 잠시 후면 후문까지 포위될지 모른다! 그 전에 나가야 해! 좌군총사의 목숨이 달린 문제다! 책임소재 구분과 문책은 차후다!”
소리치며 태웅이 흑철대력부를 세우자 수문무사들은 흠칫 물러났다. 칠 척 거한의 위세도 위세지만 좌군총사의 목숨이 걸린 문제라는 말이 더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렇기는 주변의 후문 방어무사들 모두가 같았다.
“당장 문을 열어라!”
태웅이 재차 호통치자 우물쭈물하며 서로 눈치를 보던 수문무사들은 에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 즉시 흑호단은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말을 끌고 온 대원들로부터 고삐를 넘겨받은 목계백은 태웅에게 지시했다.
“이제 목적지는 우군진영이다. 충분히 거리를 벌리도록 달려라. 곧 뒤따라간다.”
태웅은 즉시 부관승과 함께 말에 올라타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혹호단 칠십 명이 함께 달렸다. 목계백과 조승과 하대구와 서른 명은 따로 움직였다. 앞선 흑호단을 뒤쫓는 것 같은 그 움직임은 급하지 않았다.
후문을 통해 나가는 검은 무복의 무사들 무리를 보고 공손명은 결심했다.
‘나가야 해.’
더는 장원에 남아 있을 수 없다. 이제 혈천이 직접 공격해 왔다. 장원 내의 백혈맹 전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
혈천이 이긴다면 백혈맹에 협력한 대가로 받을 것은 죽음이다.
더군다나 별기군은 혈천이 공격해 오는 징후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건 아주 좋지 않다. 그런데다가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자들도 있지 않은가?
‘좌군총사를 데리고 온 자들이야. 좌군이 무너졌다는 소리지. 하, 정말로 황당무계한 일이로구만. 저들이 혈천을 몰고 온 게 아닌가? 그런데 도망을 가?’
후문으로 나간 자들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고 공손량은 내실로 급히 들어갔다.
준비해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행낭을 메고 지팡이를 잡았다.
검이 들어 있는 지팡이지만 쓰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마지막으로 정든 집을 다시 한 번 돌아봤다. 아이들을 키우던 기억이 떠올라 감정이 복받쳤다.
‘한평생 잘 살았구나.’
갑자기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지나간 생을 돌이켜보니 복 받은 인생이어서다. 그게 조부님 대부터 쌓은 공덕이라고 늘 생각했다. 소림과의 연을 만들어 주신 것도 조부님이다. 그분은 언제나 열심히 사셨다.
‘호생지덕. 함께 사는 거라고 늘 말씀하셨지.’
조부님의 가르침이다.
특별하지 않다. 병들어 어려운 이웃을 돕고 흉년엔 곡식을 나눠 먹고 하는 작은 일이다. 선친도 그 가르침에 따라 사셨고 공손명 자신도 따랐다.
대단한 일은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가르침 받았다.
그냥 여유 있는 내 삶의 일부를 부족한 이들과 나눈다 생각했다.
다른 이들이 살아야 내가 사는 건 당연한 일, 그 덕을 받고 잘 살았다.
‘손주들 얼굴이나 보고 죽어야지.’
미소를 남긴 공손명은 벽장 문을 열고 들어가 비밀통로 안으로 몸을 넣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