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54
3.
물기를 짜고 털어낸 흑의를 흑호단은 그대로 입었다. 본래 지닌 작은 행낭과 등패와 요도를 챙겨 들고 다시 소림사로 향했다. 맹렬한 기세로 올라가며 뜨거워지는 해는 체온과 안팎으로 조응하며 젖은 옷을 말렸다.
소림사 앞에서 흑호단을 멈추게 한 목계백은 말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요구를 받은 소림승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유를 물었다.
흑호단의 식사문제와 거처 문제를 비롯해, 백 필이나 되는 말로 소림사에 폐를 끼친다는 이유를 말했다. 무엇보다도 좌군총사를 모시는 임무를 끝냈다는 말도.
소림승은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보고를 하러 사라졌다. 그런 모습과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던 태웅과 하대구와 조승이 곁에 다가 와 물었다.
“허락하겠습니까?”
굵은 태웅의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목계백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한다. 지금쯤이면 우리에 대한 처분을 결론 냈을 거다. 우리 요구가 순리이기도 하거니와, 등봉현에 머물며 명령을 기다리란 조건을 달겠지.”
세 사람이 수긍의 빛을 보이는 가운데 소림승이 돌아왔다.
“등봉현에 머물며 명령을 기다리라는 지시요.”
정확히 목계백이 예측한 대로의 답과 함께 말들이 나왔다.
인계받은 말들의 상태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점검한 흑호단은 목계백은 선두로 이동했다.
등봉현에서 제일 크다는 초성객잔에는 투숙객들이 거의 없었다.
때가 때인지라서다. 백혈맹과 혈천이 전쟁을 벌이는 마당에 누가 소림사에 향화하기 위해 올 것이며, 배포 큰 상인이나 등짐장수들도 찾지 않는 때다.
자연히 날벌레만 날아다니던 객잔이다. 그곳에 든 흑호단은 복이다.
“어서들 오십시오. 저희 초성객잔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객잔주인의 장황한 설명과 침 튀기는 친절 속에 혹계백과 흑호단은 여장을 풀었다. 그렇다고 해봐야 백 필의 말을 돌보는 것이고 식사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흑호단은 즐거웠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돼서다.
백인분의 식사를 마련하게 된 초성객잔이 음식준비에 사투를 벌이는 동안 목계백은 흑호단에게 술잔을 돌렸다. 단, 두잔 이상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 그사이 음식이 차례로 나왔다. 모두 게눈 감추듯 음식을 먹었다.
기름진 음식이 담긴 접시를 부술 듯이 젓가락을 놀리는 흑호단을 보며 목계백은 미소 지었다. 두 잔째로 채운 술잔을 들어 마시는데 그가 보였다.
‘왔군.’
잔을 비운 목계백은 일어서서 우군총사 유위명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목계백이 그러하자 태웅을 비롯한 흑호단 전부가 식사를 멈추고 기립했다.
객잔 안으로 들어선 자, 유위명은 근엄한 표정과 걸음으로 다가왔다.
“식사를 방해했군.”
목계백은 엷은 미소로 대꾸했다.
“기대하지 않은 술맛이 제법입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니 됐네. 그보단 긴히 할 말이 있네.”
둘만이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이었지만 목계백은 무시했다.
“그럼 앉으시지요.”
모르는 척 흑호단에게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식사를 마저 해라. 우리는 언제 어떤 명령을 받고 움직여야 할지 모른다. 배를 채워둘 기회가 있을 때에 채워라. 먹고 자고 싸우는 건 늘 같이한다. 생사를 함께하는 형제의 눈을 항상 봐라. 그래야 전장에서 한몸이 된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하고자 하는 말을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듣겠다는 행동이다. 그런 의지를 보였음이다. 그래서 유위명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더 내색하지 않고 목계백을 마주 보고 앉아 입을 열었다.
“이번에 큰 공을 세웠네. 뒤늦었지만 치하하는 바이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흑호단의 능력과 명령을 수행하는 의지와 훌륭한 결과를 본맹은 높이 평가하는 바일세. 좌군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총사를 소림까지 모셔온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지.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일임을 아네.”
치사를 먼저 늘어놓은 유위명은 파란 눈빛을 순간적으로 보이며 다시 말했다.
“대단한 무용담도 들었네. 좌군 진영이었던 무영사의 접전에서는 녹림신군 종패와 겨루었다하더군. 대치에서는 흑혈승들의 수령인 마율아합이란 자를 베었다고 들었지. 그 후 확산에서는 장문이란 해남파 고수를 벴다지?”
저 정도 파악했으면 다 알고 있는 거다.
장문이 혈천 지군을 실질적으로 이끈 자 라는 것도 알고 있는 거다. 녹림신군 종패를 대신하여 그가 백혈맹좌군 공격의 지휘를 총괄했다는 것까지는 모르나, 종패와 더불어 명령권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안 거다.
좌군 패주병들이 돌아와 전했을 터다. 바로 그러한 자와 흑혈승들을 확산에서 도륙한 이가 목계백이다. 그런 마당에 더 이상은 숨기고 약한 척할 수가 없음이다.
목계백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했습니다. 확산에서는 위험했었지요. 흑혈승들을 서른 명이나 상대해야 했습니다. 다행이라면 그들을 이끄는 장문이란 해남인물을 먼저 베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당황한 그들을 생각보다 쉽게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상대는 많고 암기를 날리자면 거리를 벌려야 하는 조건을 역이용했습니다. 그들보다 먼저, 그들의 사이에서 공격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유위명은 파란 안광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일이야. 말을 쉬울 수 있으나 그런 상황을 맞아 그 누가 그렇게 싸울 수 있겠나? 흑혈승들을 서른 명이나 단신으로 도륙한 인물은 자네밖에 없을 것일세. 맹호라는 이름이 그토록 회자 되는 이유를 이제 알겠군.”
“과찬이십니다. 흑호단과 함께 싸워 이뤄낸 결과입니다. 후방 조응이 없었다면 검하고혼이 됐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모두 합심한 결과입니다.”
유위명은 표정없는 얼굴로 식사하는 흑호단을 돌아봤다.
들어오며 본 객잔의 마구간에는 백 필의 말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안장에 걸린 활이 눈길을 끌었다. 흔치 않은 활이다. 그 활을 이들이 귀신처럼 사용한다 했다.
‘그랬을 지도, 흑호단이 뒤에서 화살을 날리고 맹호가……’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의 답을 끼워 맞추려던 유위명은 자신의 그런 생각을 깨달았다.
‘못났구나 유위명아. 그렇게 돼서 만들어질 결과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느냐? 맹호는 혼자서 그들을 도륙한 거다. 이자는 강자다.’
새삼스럽게 마주앉은 목계백이란 인물을 주시하며 유위명은 호흡을 다스렸다. 그러지 않으면 평정을 잃고 대면한 목적마저 잊을 것 같아서다.
“다시 한 번 흑호단의 활약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네.”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평정을 찾은 유위명은 남은 이야기를 이어냈다.
“당연히 활약과 수고에 대한 응분의 상급과 보답이 있어야 할 것인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당장 그리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길 바라네.”
목계백은 아무런 감동 없는 얼굴로 단호하게 대꾸했다.
“어인 말씀이십니까? 당치 않습니다. 흑호단은 보답을 바라고 명령을 수행하지 낳습니다. 항주무림맹으로부터 백혈맹에 참여한 것도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에서입니다. 항주의 위란을 구해주신 일에 감히 비하겠습니까?”
“그리 생각해 준다니 감사한 일일세.”
담담한 표정과 눈빛으로 중심을 잡은 유위명은 찾아온 목적을 드디어 꺼냈다.
“흑호단에게 특별히 맡겨야 할 일이 있네.”
마침내 핵심을 뱉어낸 유위명을 목계백은 차분히 바라봤고, 태웅과 조승과 하대구를 비롯한 흑호단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바로 이일 때문일세. 다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시급을 다투는 일이기에 그러하네.”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흑호단을 다시 한 번 돌아봤던 유위명은 말했다.
“혈천의 총사를 제거하는 일일세.”
* * *
“원시천존.”
도호를 읊으며 부관승의 손목을 잡은 원혜진인은 맥이 뛰는 것을 살폈다.
하루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맥동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림의 영단과 의생각의 도움을 톡톡히 본 것이다.
기다리면 무당에서도 자소단을 가져올 것이지만, 부관승의 상세가 심각했다.
그 시기를 놓치지 않았음이다. 그리고 그건 솔직히 흑호단의 덕분이다.
“맹호와 흑호단이 살린 것과 마찬가지야……”
작게 중얼거린 원혜진인은 부관승의 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들었다. 부스스 눈을 뜬 부관승이 눈길을 맞추더니 방금 전 중얼거림에 동의했다.
“사형 말씀이 옳습니다. 소제의 목숨은 그들이 살린 겁니다……”
아직 약기운과 잠기운이 남아있으나 훨씬 힘이 들어간 목소리를 내는 부관승, 확연한 회복의 상태를 보이는 그를 향해 원혜지인은 미소 지었다.
“그런 건 이제 잊도록 하게. 그들에 대한 걱정도 이젠 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바로 반응하며 눈썹을 꿈틀한 부관승은 물었다.
“흑호단에 대한 대처가 마련된 것입니까?”
“그러하네. 장문인들이 모여서 결론을 냈지. 반간계일세. 제갈세가 등의 배신자들을 이용해 혈천을 함정에 끌어들이는 유인책일세. 그 일련의 계획 속에 흑호단을 끼워 넣었지. 혹호단은 혈천에게 죽임을 당할걸세.”
눈동자에 힘을 주며 부관승은 염려를 드러냈다.
“그들은 정말로 강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이번엔 어쩔 수가 없을 것이야. 우리가 흑호단의 행로를 알려주게 될 것이니까.”
“그건……”
“말 그대로일세. 혈천은 아직 제갈세가 등이 저리된 것을 모르지. 제갈세가의 연통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야. 놈들은 비밀리에 연통하는 방법이 있다 하더군. 자네가 흑호단과 함께 우군에 합류한 것을 혈천도 알고 있을 터, 그로 인한 대책을 급히 마련하자는 연락을 하게 할 것일세.”
부관승은 자세한 내막을 듣기 위해 미간을 좁혔다.
“내용은 이러하네. 사제가 백혈맹 내부에 간자가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는 것이지. 그로 인한 위기의식을 느낀 제갈세가가 혈천에 긴급연락을 하여, 우군을 습격할 방도를 알려주는 것일세. 상황이 급박하니 차제에 전력을 다한 공격으로 백혈맹의 숨통을 끊자는 계책인 거지. 그걸 혈천이 물어 다가온다면, 우리는 준비하고 있다 그들의 목을 치는 걸세.”
“그렇다면 흑호단은 어찌 되는 겁니까?”
“그들은 따로 처리할 걸세.”
“따로요?”
“유총사가 그 일을 위해 흑호단을 직접 만나러 갔네.”
잠시 뜸을 들은 후 원혜진인은 계획을 말했다.
“우선은 맹호와 흑호단의 공명심을 자극한 후에, 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일을 맡기노라 하는 것이지.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혈천의 수뇌부를 제거하는 일, 바로 그에 관한 정보를 곤륜비검자들이 알아낸 것으로 하는 걸세.”
미간을 와락 좁히는 부관승의 반응을 응시하며 원혜진인은 뒷말을 이어냈다.
“혈천천군의 총사가 은밀히 이동하는 동선을 알아냈으니 혹호단이 그 일을 해달라는 것이지. 오직 흑호단만이 할 수 있다는 청을 하는 거네. 그리곤 흑호단이 그런 일을 하러 간다는 걸 제갈세가가 알리는 것이지.”
수도하는 도사와는 거리가 먼 미소가 원혜진인의 얼굴에서 피어났다.
“혈천도 이젠 흑호단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터, 특별한 환영을 해주겠지.”
이제 알았다는 뜻인지 부관승은 좁혔던 미간을 풀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간 아무 반응도 내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때문에 원혜진인은 도리어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 전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다.
“왜 그러나 사제? 무엇이 잘못되었나?”
느릿하게 눈을 든 부관승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과연…… 뜻대로 될까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실패할 계획이 아니질 않은가? 흑호단도 혈천도 알 수가 없을 일일세. 이야말로 본맹으로선 절호의 기회인 것이네. 솔직히 흑호단에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네. 사제를 살려온 것이 그들이고, 결과적으로 제갈세가 등의 배신을 적발케 하여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이니까. 하지만 사제도 말하지 않았나? 그들이 위험하다고 말일세.”
지그시 어금니를 물며 부관승은 이야기했다.
“그러합니다. 그들은 위험합니다. 할 수 있다면 제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구스럽습니다. 본맹의 능력이 못 미더워서가 아닙니다. 흑호단이, 맹호의 능력을 헤아릴 수가 없어서입니다.”
“사제, 아무리 그렇다 하나 이번 일은……”
“그들은 소제와 사질들이 제거하려 한 모계도 걷어내고 살아 돌아온 자들입니다. 그렇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소제를 살려서 사지를 뚫고 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들의 처지가 더 이상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위험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했습니다.”
원혜진인은 입을 다문 채 미간만 잔뜩 찌푸렸고, 부관승은 남은 말을 뱉어냈다.
“소제는 그들이 무섭습니다.”
* * *
객잔 문으로 사라지는 유위명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 목계백은 미소 지었다.
“이제 이빨을 보이는구나.”
태웅이 부라리며 유위명을 바라보던 눈을 돌렸다.
“확실하게 죽여없애겠다는 수작입니다.”
조승과 하대구도 한마디씩 뱉었다.
“혈천총사의 동선을 파악했다는 건 거짓말일 게 뻔합니다.”
“차도살인지계로군요.”
목계백은 고개를 끄덕이고 흑호단 모두를 향해 말했다.
“백혈맹의 의지를 이제 우리는 보았다. 우리 목숨을 혈천으로 하여금 끊게 하려는 모계다. 우리가 가는 곳에선 혈천이 준비하고 기다릴 거다. 제갈세가로 하여금 그렇게 알리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혈천에게 치명타를 가할 다른 함정을 준비하겠지. 이건 동시작전이다. 백혈맹은 이번 일에 사활을 건 거다. 제갈세가의 적발을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거다.”
빈 술잔에 세잔 째의 술을 따른 목계백은 단숨에 넘기고 다시 말했다.
“혈천천군의 총사를 없애는 중대한 일, 다른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 흑호단과 같은 용맹무쌍함을 증명한 조직만이 해낼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 다 좋다. 우리 얼굴에 금칠을 해도 좋다. 그렇게 해서 저희의 생각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절대로 당하지 않는다.”
채운 잔을 든 목계백은 흑호단에게 지시했다.
“모두 잔을 채워라.”
태웅과 조승과 하대구와 흑호단 전부가 세 번째 잔을 채워 들었다.
“이 잔을 마신 후, 할 일을 마치고 네 번째 잔을 다 함께 비울 것이다.”
목계백이 잔을 넘기자 흑호단 모두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해는 점점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