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44
343화. 현천신녀 (2)
짧지 않은 침묵 끝에, 백수룡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나를 환생시켰다고?”
현천신녀를 노려보는 눈빛에서 진득한 살기가 묻어났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명백한 살의가 뭉쳐진 기운이었다.
“되지도 않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백수룡은 이를 갈며 현천신녀를 노려봤다.
그의 전생은 평생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는 삶이었다.
고아로 자라나 혈교의 무인이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인생.
단 한 번도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자유를 얻기 위한 마지막 시도마저 끝내 혈교에 의해 가로막혔고, 결국 사부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는데…….
‘이번 생마저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거라고?’
손끝이 떨려올 만큼 커다란 분노가 일었다.
백수룡은 당장 현천신녀의 멱살을 틀어쥐고 윽박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정확하게 말해. 뜬구름 잡는 소리나 늘어놓으면, 주둥이를 찢어 놓을 테니까.”
사나운 살기와 험악한 말투에도 현천신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백수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안에서 나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현무학관 전체가 현천신녀의 술법 영역이었다.
비록 천기를 엿본 대가로 쇠약해지긴 했지만, 이 안에서 그녀는 무적을 논할 수 있는 고수였다.
그러나 백수룡은 코웃음을 쳤다.
“이 거리면 놓치지 않아.”
둘 사이의 거리는 일 장도 되지 않았다. 백수룡은 현천신녀가 술법을 펼치기 전에 붙잡을 자신이 있었다.
스스슷…….
백수룡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지금껏 고수들 앞에서는 최대한 역천신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현천신녀에게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환생했다는 사실을 아는 걸 보면, 당신은 내가 전생에 누구였는지도 알겠지. 그럼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독한 놈이라는 것도 알 거야.”
과거에도 백수룡에게 운명을 들먹이던 존재가 있었다. 지금의 현천신녀는 그자를 떠오르게 했다.
-너는 훗날 본교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데 필요한 반석이 되거나……. 본교를 불태울 불씨가 될 운명이구나.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피처럼 붉은 적발과 그에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 나른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도무지 인간 같지 않던 초월자.
혈마(血魔).
“……이렇게 보니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겠구나. 환생이 의도된 것은 확실한데, 너에게서 느껴지는 역천의 힘은 오십 년 전 그날을 떠오르게 하니, 네 안에 깃든 것은 과연…….”
휘이익!
벼락처럼 짓쳐든 백수룡이 현천신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가 현천신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며 스산하게 말했다.
“내가 쉬운 말로 하라고 했지?”
현천신녀가 피하지 못한 것인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목이 잡힌 상태에서도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십여 년 전, 천리(天理)가 크게 어그러지는 일이 있었다.”
현천신녀의 의지에 따라 주변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기가 물결처럼 번져 나가며 술법이 펼쳐졌다.
화아아아악!
두 사람은 깊은 산속에 세워진 문파 앞에 서 있었다.
현천문(玄天門).
지금은 사라진 고향을 바라보는 현천신녀의 눈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현천문은 대대로 역천의 힘이 퍼지는 것을 감시하고, 때에 따라서는 인세에 개입해 그것을 막아 왔다. 그것이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업(業)이기 때문이지.”
현천신녀가 가볍게 손끝을 휘젓자, 시간이 빠르게 휘감겼다.
현천문 위로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수십 줄기의 벼락이 그 위로 겹쳐졌다.
쿠르르릉! 콰콰쾅!
쿠르르릉! 콰콰쾅!
뿐만 아니라 폭우가 쏟아지고 지진이 발생했다. 세상의 종말이 온 듯한 자연재해가 현천문을 무너뜨리고 불태웠다.
그렇게 완전히 무너지고 불탄 현천문에서, 피투성이가 된 현천신녀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현천문의 문도들 중 생존자는 그녀가 유일했다.
“……하늘의 경고였다. 천리가 어긋났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경고. 현천문에 펼쳐진 지옥도가, 훗날 온 세상에도 펼쳐지리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현천신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열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린 모습을 한 그녀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꺽꺽 울었다.
“인세로 내려온 나는 천리를 어긋나게 한 존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한발 늦고 말았지.”
“…….”
백수룡의 손에서 저절로 힘이 빠져나갔다.
그 순간, 풍경이 한 번 더 바뀌었다.
이번에는 백수룡에게도 아주 익숙한 장소였다.
“혈교?”
두 사람은 불타오르는 혈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정파무림의 무인들과 혈교의 무인들이 곳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사방에 비명과 고함이 난무했다.
더러운 혈교의 마인들을 죽여라!
만마앙복! 혈세천하! 혈마재림!
독기에 찬 정파무림의 무인들과 눈에 광기가 어린 혈교도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땅이 피로 물들고, 시체가 쌓여 언덕을 이뤘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무인의 기억을 재현한 것이다. 나는 참여하지 못했지.”
터벅, 터벅.
비틀거리는 시야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백수룡은 이 기억의 주인이 바라보는 장소가 교주전임을 눈치챘다.
그때, 무림맹 측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사도들이 도망쳤다! 혈마를 죽여라!
분노에 찬 정파무림의 결사대가 교주전으로 향했다. 한 명 한 명이 천하에 이름을 떨친 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다. 그런 고수들 수십 명이 일제히 경공을 펼쳤다.
콰아아앙!
교주전의 문을 부수고 난입한 정파무림의 결사대.
그들을 맞이한 것은, 태사의에 고고하게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혈마였다.
혈마여!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다!
너를 지키던 사도들도 전부 도망갔느니라!
이 자리에서 네놈의 수급을 베어 무림의 평화를 이룰 것이다!
외모나 기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분위기.
혈마에게서 느껴지는 불길함에, 정파무림의 고수들은 마치 겁먹은 짐승이 몸을 부풀리듯 허세를 부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적들이 교주전까지 쳐들어왔음에도, 혈마에게선 어떠한 반응이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백수룡은 그 이유를 얼마 전 개방주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말로 죽었군.”
혈마는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 자리에 있는 고수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들 믿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혈마가 자결을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아직 방심하지 마시오! 귀식대법을 펼쳐 우릴 속이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간악한 놈! 당장 눈을 뜨지 못하겠느냐!
무인들 사이로 숨길 수 없는 동요가 퍼져 나갔다.
혈마를 죽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찾아왔건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이미 숨이 끊어진 혈마의 시체라니.
허탈함에 바닥에 주저앉는 자들도 있었고, 태사의로 다가가 혈마의 시신을 살펴보는 자들도 있었다.
“……자결일 리가 없어.”
백수룡이 중얼거렸다.
그가 아는 혈마가 결코 자결을 택할 위인이 아니다.
설령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다 해도, 최후까지 무림의 재앙으로 존재하다가 쓰러질 존재였다.
스스스슷…….
과거의 기억을 재현한 술법이 사라지고, 두 사람은 다시 처음의 장소로 돌아왔다.
연이어 큰 술법을 펼친 탓인지, 현천신녀가 초췌해진 얼굴로 말했다.
“혈마는 죽기 전에 역천의 술법을 펼쳐 천리를 어그러뜨렸고,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아니, 스스로 바쳤다고 봐야겠지.”
“……그리고 내가 환생했다?”
사실 현천신녀로부터 누군가가 자신의 환생을 의도했다는 얘기를 들은 순간, 백수룡은 혈마를 떠올렸다.
천하에 그런 짓을 꾸밀 수 있는 존재는 혈마뿐이니까.
현천신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나는 꾸준히 천기를 살폈다. 어그러진 하늘에서 역천의 힘이 커지기 시작했고, 온갖 괴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지.”
-누군가가 역천의 힘을 퍼트리고 있다.
백수룡은 어미 은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상 곳곳에 역천의 기운이 움트고 있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존재들이 깨어나고, 섭리를 벗어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현천신녀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누군가’는 바로 전대의 혈마를 의미했다.
“천기를 살피던 나는 스물여덟 해 전, 역천의 운명을 지닌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야?”
현천신녀가 인형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뿐만이 아니다. 네가 특출나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역천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들을 모두 살폈다. 그중 한 명은 혈마의 환생일 것임이 분명하기에. 하지만 모르겠구나. 모르겠어. 역천의 운명은 천기를 보는 눈으로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털썩.
갑자기 현천신녀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백수룡이 놀라서 그녀를 부축했다.
“이봐. 괜찮아?”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 천기를 누설한 대가로, 이 육신은 한동안 깊은 잠에 들 것이다.”
현천신녀의 눈도 조금씩 감기고 있었다.
백수룡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더 있었다.
“놈의 목적은 뭐야? 날 환생시키고, 세상에 역천의 힘을 퍼트리는 이유가 뭐냐고!”
“……그의 목적은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하리라는 것, 그리하여 세상이 멸망하리라는 것, 현천문이 그리되었듯이…….”
현천신녀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녀가 흐릿한 눈으로 백수룡을 올려보며 말했다.
“나는 너를 꾸준히 지켜보았다. 태어난 이후로 줄곧, 청룡학관에 입관한 후에도, 남궁세가에서도, 그리고 이곳에 오는 길에도. 네가 정체를 감춘 혈마일 거라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는 데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 그만큼 지켜봤으면 내가 혈교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 텐데.”
“……만약 네가 정체를 숨긴 혈마였다고 확신했다면, 이 자리에서 현무학관과 함께 소멸시켰을 것이다.”
백수룡은 등줄기가 오싹해짐을 느꼈다. 현천신녀의 말이 진심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제 의심은 벗었다 이거지?”
“나는 역천의 운명을 읽지 못한다. 살필 수 있는 것은 네가 살아온 인생뿐. 하지만 그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지. 너는 과거를 후회하고 있고, 보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뭔…….”
뜬금없는 칭찬에 백수룡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면서도 현천신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너는 역천의 운명을 타고났으나, 세상을 멸할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르지.”
천천히 감겨 가던 현천신녀의 눈이 일순간 번쩍 뜨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신령한 기운이 담겼다.
“어그러진 천리를 바로잡고, 세상의 멸망을 막는 일을 도와주겠느냐?”
“……그런 거창한 명분이 아니더라도, 혈교든 혈마든 전부 없애 버릴 생각이었어.”
백수룡은 당연하지 않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몰라.”
“……잘되었다?”
“놈이 날 환생시켰기 때문에 전생에선 없었던 가족도 생겼고, 망나니 같은 제자들도 생겼잖아?”
“…….”
“그리고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도 얻었지.”
옛 제자들이 혈교의 사도라는 존재로 살아 있다.
과거의 망령이나 다름없는 녀석들.
녀석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날 환생시킨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반드시.”
굳게 다짐하는 백수룡의 눈을 들여다보던 현천신녀가 말했다.
“내가 너를 도울 수 있을 것 같구나.”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신령한 기운이, 백수룡의 몸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