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15
414화. 사부라고 불러라
‘여긴…….’
지하 뇌옥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래된 곰팡이와 짙게 밴 피 냄새, 오물 냄새 따위가 뒤섞인 곳.
지하로 내려가는 벽면에 드문드문 횃불이 걸려 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벽면에 비친 그림자가 불길하게 일렁였다.
“곧 보게 될 자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함구해야 할 것이다. 너는 그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다.”
“예.”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자는 혈교의 이장로, 마뇌였다.
가증스러운 원수의 뒷모습을 본 순간, 백수룡은 전생의 어느 기억에서 깨어났는지 깨달았다.
‘처음 사부들과 만난 날이군.’
쿠구구궁……!
두꺼운 철문을 몇 번이나 지나고 나서야, 그들은 뇌옥의 가장 깊은 장소에 도착했다.
혈교의 장로나 팔대세가의 가주들 중에서도 와 본 자가 드물 정도로 깊은 곳.
“저자들이다.”
“…….”
천장에 박힌 야명주가 흐릿한 빛을 뿜어내며 뇌옥 안을 밝히고 있었고, 그 안에는 반쯤 송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의 절세고수들이 갇혀 있었다.
‘사부들…….’
백수룡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스승들을 바라봤다.
녹림투왕 맹호악.
광마 헌원후.
빙월신녀 은예린.
검존 모용혼.
한 명 한 명이 천하를 진동시킨 개세(蓋世)의 고수들.
당시 역사상 최대의 성세를 누렸던 혈교조차, 정파 무림에 저들이 합류할까 저어하여 신경을 곤두세웠던 존재들.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당시의 백수룡, 아니 교관 이십칠호는 떨리는 눈동자로 절세고수들을 바라봤다.
“네가 할 일은 저자들의 무공을 본교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곳까지 와서 거절하거나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마뇌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죽일 테니까.
혈교 최고의 교관이라 한들, 장로 앞에서는 언제든 밟아 죽일 수 있는 벌레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뇌는 자신이 고른 벌레가 혈교에서 가장 지독한 독충(毒蟲)임을 알지 못했다.
“……다만, 시간은 상당히 걸릴 듯합니다.”
“대계(大計)란 무릇 길게 봐야 하는 법이지. 그래.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돌아보는 마뇌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너무 긴 기간을 말한다면 마뇌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할 수도 있었고, 너무 짧은 기간을 말한다면 스스로의 목을 조일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십칠호는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거친 끝에 대답했다.
“……십 년이면 충분합니다.”
“듣던 것보다 더 냉정하고 대범하구나. 십 년이라…….”
마뇌는 대답이 마음에 든 듯했다. 그가 흡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성공적으로 이번 일을 해낸다면, 교주님께서 네게 직접 상을 내리실 것이다.”
이십칠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혈마재림 만마앙복. 사명을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뇌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이십칠호의 표정을 보았다면, 마뇌는 즉시 그를 죽였을 것이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와 달리, 입가에는 싸늘한 냉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이장로님. 바로 일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좋다. 나는 이제 나가 볼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요청해라.”
마뇌가 나간 후에도, 이십칠호는 한참 동안이나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있었다.
“…….”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한 후였다.
“어이. 애송아.”
뇌옥 한쪽에 주저앉아 있던 거한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비록 단전에는 커다란 금침이 박히고, 팔다리는 쇠사슬로 결박돼 있었지만, 우리에 갇힌 맹수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바깥세상 얘기 좀 해 봐라.”
맹호악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아무리 단전을 폐하고 근맥을 자른다 한들, 절세고수가 가진 기세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에 이십칠호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지금 봐도 무시무시하군.’
백수룡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전생의 기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했던 것처럼 필요한 기억을 찾아가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지만, 어째선지 지금은 스스로의 의지를 전혀 개입시킬 수가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강제로 그를 이곳에 머물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지켜봐야겠군.’
백수룡은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 하기보다,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험상궂은 맹사부의 얼굴이 철창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가 사납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엿 같은 곳에서 바깥 얘기라도 듣지 않으면 너무 심심하거든. 새로 온 간수 놈들도 하나같이 툭하면 도망이나 가 버리고 말이다.”
“…….”
사실 네 사부의 무공을 빼앗으려 한 시도는 그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실패했다.
난다긴다하는 혈교의 고수들이 두손 두발을 다 든 후에야, 무공교관인 이십칠호에게까지 차례가 온 것이다.
“귓구멍이 막힌 거냐? 아니면 이 어르신이 무서워서 말문이 막혔나?”
뇌옥에 갇혀 있는 것은 분명 맹호악일진대, 호랑이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두려운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나 전생의 이십칠호는 주눅 들지 않았다.
최소한 겉으로는 두려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귓구멍도 안 막혔고, 별로 무섭지도 않은데.”
“흐. 용감한 사내라기엔 비실비실한 장로 놈 앞에서 벌벌 떨던데?”
녹림투왕 맹호악은 타고난 기질이 맹수에 가까운 자였다.
그 앞에서 한 번이라도 기가 꺾인다면, 다시는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맹호악과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다면, 다른 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파악한 이십칠호는 오히려 상대를 도발했다.
“우리에 갇힌 짐승이 말을 하다니. 신기하군.”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맹호악의 두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동시에 이마로 뇌옥의 철창을 힘껏 들이받았다.
콰아앙-!
뇌옥의 두꺼운 철창은 조금 흔들릴 뿐 멀쩡했으나, 이십칠호는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백수룡도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때는 정말 놀랐지. 다시 봐도 미친 인간이라니까.’
녹림투왕 맹호악.
이때의 그는 단전은 물론이고, 타고난 용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쇠사슬로 온몸이 묶이고, 말뚝에 가까운 쇠침이 열두 개나 박힌 상태였다.
그럼에도.
콰앙! 콰앙! 콰아앙!
“이리 와서 다시 말해 봐라! 당장 골통을 으깨 버리게!”
광인처럼 날뛰는 맹호악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그가 제풀에 지쳐 그만둘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곳에 이십칠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큼성큼 뇌옥으로 다가간 그는 맹호악의 정면에 섰다.
그리고…….
“닥쳐!”
콰앙-!
똑같이 이마로 뇌옥의 철문을 들이받은 것이다.
“엿 같은 상황이긴 나도 마찬가지니까!”
“……뭐냐, 너?”
맹호악은 벙찐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팍까지밖에 안 오는 애송이를 바라봤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분노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미친놈이 왔군.”
눈을 감고 있던 헌원후가 눈을 뜨며 중얼거렸고, 은예린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검존도 새하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도 어지간히 미친놈이었군.’
백수룡은 잊고 있던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워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이십칠호는 뇌옥 안에 갇힌 고수들을 한 명씩 노려봤다. 제대로 인상을 남긴 신고식이었다.
“엿 같기는 나도 마찬가지라고. 내가 바보인 줄 아나? 당신들의 무공을 캐내면 그 후엔? 마뇌가 나를 살려 두겠어?”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네 사람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전까지 찾아왔던 혈교의 무인들은 온갖 감언이설 혹은 협박으로 그들에게서 무공을 캐내려 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드높은 절세고수에게서 무공을 캐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실패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놈은 무언가 달랐다.
무공도 보잘것없고, 지위도 낮아 보이는데 독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은 맹호악이었다.
“큭……. 크하하하!”
맹호악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뇌옥 안에 울려 퍼졌다.
감히 자신에게 머리를 들이미는 놈이라니!
살면서 이만한 배짱을 가진 녀석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너, 마음에 든다. 산적이었으면 바로 내 부하로 삼았을 텐데.”
“사양하지. 대신, 당신들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싶은데.”
일단 모두의 흥미를 끄는 데는 성공했다.
평소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고수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헛소리를 한다면 바로 흥미가 식을 것이다.
“아까 마뇌 앞에서 말한 십 년. 그 안에 당신들의 몸을 회복시켜 주지.”
““……!!””
경악과 불신, 의혹, 분노, 여러 가지 감정이 네 사부의 얼굴에 떠올랐다.
이십칠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는 네 사람의 배에 꽂힌 금침을 가리켰다.
“단전은 아직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지? 이런 뇌옥에서 단전까지 부서지면 곧 죽어 버릴 테니까. 당신들 정도의 고수라면, 그 금침을 뽑고 영약을 쓰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영약 따윈 필요 없다.”
헌원후의 말에 백수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두 번째 문제는 잘린 근맥. 혈교에 비약이 있어. 그걸 쓰면 끊어진 근맥을 다시 잇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아. 물론 예전과 똑같진 않겠지만, 다시 붙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왜?”
은예린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십칠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아?”
“…….”
훗날 혈교를 탈출할 계획이 처음으로 시작된 순간.
물론 아직은 뼈대만 있는 어설픈 계획에 불과했지만, 십 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이십칠호의 두 눈에서 시퍼런 귀화가 일렁였다.
“하지만 마뇌를 속이려면, 이쪽도 미끼를 던져 줘야 해.”
“미끼?”
마지막으로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설득이 남아 있었다.
“자그마치 십 년이야. 꾸준히 성과를 보여 줘야 놈을 속이고 방심시킬 수 있어. 그러려면 당신들의 무공이 필요해.”
“결국 우리의 무공을 혈교에 갖다 바치겠다는 뜻이더냐?”
검존의 싸늘한 반응에, 이십칠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짜를 알려 주면 돼. 처음에는 멀쩡하게 익힐 수 있겠지만, 뒤로 갈수록 기혈이 엉켜서 주화입마로 뒈져 버리도록. 제대로 엿을 먹이는 거지.”
가짜 무공을 넘겨주자는 계획은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대략적인 계획을 모두 설명한 이십칠호는 모두에게 물었다.
“자, 선택해. 이곳에서 천천히 죽어 가든지, 아니면 나와 함께 발악이라도 해 보고 죽든지.”
뇌옥 안의 사부들은 한동안 말없이 이십칠호를 노려봤다. 이십칠호도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
‘이때 속으로 얼마나 떨렸는지…….’
백수룡은 사부들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바라보며 기가 질렸다.
마치 생사대적을 앞에 두고 약점을 찾는 듯했다.
그리고 이때 사부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찾았는지는 몰라도.
“좋다. 네 계획에 동참하마.”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바에야.”
“……배신하면 죽여 버리겠어.”
“이곳을 탈출하기 전에, 사람을 한 명 찾아 줄 수 있겠나?”
일생일대의 도박에 성공한 이십칠호는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십 년. 잘 부탁하지.”
물론 아직 그들 사이에는 그 어떤 신뢰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일 뿐.
그 와중에 맹사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너, 계속 우리한테 당신들이라고 부를 거냐?”
“그럼?”
“어쨌든 이제부터는 네가 우리의 무공을 전수받을 테니, 앞으로는 사부라고 불러라.”
“알겠소. 그리하지.”
맹호악의 말에 이십칠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어떻게 변할지, 그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