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22
421화. 할 말이 있다
시간이 멈춘 세계.
핏물에 잠긴 듯 온통 붉게 변해 버린 풍경 속에서, 마주 선 두 사내는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하…….”
혈마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더니,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그 웃음은 크지 않았으나, 세계를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혈마의 웃음소리에 하늘의 일부가 깨져 나가고, 멀리 보이는 산이 허물어졌다.
“하하하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세계의 멸망은 가속화됐다. 그들이 서 있던 땅은 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지고, 무너진 건물은 먼지가 되어 푸스스 흩어졌다.
재해(災害)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공할 능력.
하지만 백수룡에게는 통하지 않는 힘이었다.
“지랄하지 말랬지.”
그 순간 거짓말처럼 세계의 진동이 멈추고, 부서지던 모든 것들이 시간을 거슬러서 원상태로 복구하기 시작했다.
“……놀랍구나. 벌써 이 정도의 힘을 다루다니.”
혈마가 기이한 열망이 담긴 눈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잘난 척은. 남의 꿈에 숨어들어온 기생충 주제에.”
코웃음을 친 백수룡은 ‘꿈’을 조작했다. 붉게 변했던 세계가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전생의 기억을 지켜보기만 하던 상황은 끝났다.
이 ‘세계’는 이제 백수룡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혈마의 입매가 비틀렸다.
“완전한 망아(忘我)에 빠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지?”
전생에 겪었던 십 년의 시간을 다시 경험하면서, 백수룡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점점 잊어 갔다.
스스로의 자아를 잃고, 전생의 이십칠호에 거의 완전하게 동화되었다.
만약 마지막 순간에 깨어나지 못했다면, 혈마의 유혹에 넘어가 영원히 이 세계에 갇히게 되었을 것이다.
“전부 네 말 같잖은 헛소리 덕분이지.”
“나 때문이라고?”
백수룡은 적발적안으로 변한 모습으로 혈마를 노려봤다.
마주 선 그들은 무척이나 닮은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면, 쌍둥이라고 생각할 만큼.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느니, 다시 선택하라느니. 그따위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갈 만큼 순진한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
백수룡을 망아에서 빠져나오게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전생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바꾸고, 다시 시작하라는 혈마의 유혹은 분명 달콤했다.
하지만 백수룡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외면하고 도망쳐 봤자,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백수룡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죄악에서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현실에서 옛 제자들을 다시 만나기로 각오하지 않았던가.
“그런가. 내가 너를 잘못 판단하였구나.”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혈마는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태연자약한 그 모습에 백수룡의 눈썹이 꿈틀댔다.
“언제까지 여유로울 수 있나 보자고.”
우우우웅-!
백수룡의 주먹으로 거대한 힘이 모여들었다.
이곳은 그의 전생을 재료로 만들어진 꿈의 세계.
즉, 이곳에서 그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콰아아앙-!
주먹질 한 방에 혈마의 몸이 벽을 부수며 날아갔다. 단숨에 수백 장을 튕겨 나간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졌다.
그러나 백수룡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땅을 박차고 멀어지는 혈마를 쫓았다. 그의 두 주먹에 시뻘건 강기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무자비한 폭력이 혈마의 몸 위로 쏟아졌다.
땅이 주저앉고, 일대의 지형이 변했다. 전신에 넘쳐 흐르는 시뻘건 강기가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러나.
“이만하면 화풀이는 충분하지 않나?”
“……!!”
바닥에 쓰러진 혈마의 몸에는 그 어떤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키며 백수룡을 바라봤다.
“다 끝났으면 이제…….”
“누가 마음대로 일어나라고 했나.”
콰아앙!
백수룡은 혈마의 가슴을 밟아 다시 넘어뜨렸다. 바닥이 움푹 꺼지며 혈마의 몸이 땅속 깊숙이 파묻혔다.
“언제부터 꾸민 거냐?”
“……무엇을?”
백수룡의 두 눈에서 용암 같은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들을 다시 보면서, 백수룡은 자신의 운명에 혈마가 관여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를 옛 서고로 보내 역천신공을 익히게 한 것도. 제자들에게 억지로 무공을 가르치게 한 것도. 전부 네가 지시한 일이었지.”
혈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과 같은 색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야. 악인곡에서 기연을 얻은 것도, 남궁세가에서 네가 남긴 손가락을 얻은 것도, 독마가 독정을 남기고 죽은 것도. 생각해 보면 전부 역천신공과 관련된 기연이었어.”
백수룡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혈마를 노려보며 발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혈마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옅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전부 다 네가 꾸민 짓이었나?”
백수룡의 눈앞에 있는 것은 진짜 전대 혈마가 아니었다.
역천혈류대법(逆天血流大法)을 펼칠 때 사용한 손가락에 깃든, 기껏해야 사념에 불과한 존재가 형상을 이룬 것.
하지만 그 사념에 남겨진 것은 전대 혈마의 정신이기에, 시공간을 뛰어넘어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했다.
“왜 그토록 화가 났는지 이해한다.”
혈마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백수룡과 대비되는 여유로움이었다.
“내가 너의 운명을 손아귀에 넣고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에 분노와 두려움이 들겠지. 혹시 단전을 잃은 것도 혈마의 안배는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전부터…….”
“…….”
혈마의 동공이 뱀처럼 세로로 수축했다. 간드러진 목소리는 귓가를 몹시 간지럽게 했다.
“너의 운명은 태어난 순간부터 내게 종속된 것이 아니었을까?”
콰아아앙!
혈마가 누워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혈마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스르륵…….
안개처럼 흩어진 혈마는 백수룡의 정면에 다시 나타났다.
백수룡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방금 혈마가 한 말에서 한 가지 불쾌한 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 몸을 빼앗아 부활하는 것이 너의 목적이었나?”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혹은 과정일 수도 있고. 너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혈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모호한 화법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백수룡은 혈마의 권태로운 눈빛을 기억했다.
그는 무림 정복에 야망이 없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보다 훨씬 멀고 아득한 곳이었다.
백수룡은 굳이 돌려서 묻지 않았다.
“부활은 과정이라 이거군. 그럼 진짜 목적은 뭐지? 대체 부활해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그러자 혈마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있어서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아름다운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를 따라오너라.”
혈마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중력이 없는 것처럼 그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백수룡은 잠시 고민하다가 혈마를 따라 몸을 띄웠다. 이곳은 그의 세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두 사람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혈마는 수십 장 높이까지 날아오르고도 멈추지 않았다. 구름을 밟고도 한참을 더 올라갔다.
새카만 밤하늘로부터 별빛이 가득 쏟아졌다.
똑바로 마주 보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자 지상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산과 강이 저토록 작을 수가 있다니. 인간은 먼지보다도 작아서 보이지도 않았다.
“개벽(開闢).”
“……뭐?”
옆을 돌아보니, 자리에 우뚝 멈춰선 혈마가 우주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의 새빨간 보석안에 별이 가득했다.
“나는 하늘을 열 것이다.”
그 순간의 혈마는,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너무나 순수하고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어,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쉽사리 대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하늘을 연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혈마는 묘한 미소를 지을 뿐, 그 이상은 말해 주지 않았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군.’
혈마가 말하는 개벽(開闢)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위험한 일인 것은 분명했다.
저 선언을 들은 것만으로도 피부에 소름이 돋고, 사방에 역천의 기운이 날뛰고 있었으니까.
백수룡은 싸늘한 표정으로 혈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알겠군. 너는 혈교에서 말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그저 상상을 뛰어넘는 미치광이에 망상가라는 걸.”
“하하하하……!”
그 말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혈마는 공기가 진동할 정도로 커다란 광소를 터트렸다.
“네 말이 옳다. 나는 역천의 운명을 타고난 불행한 광인일지도 모른다. 몇 번이고 이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늘을 열려 하였으나, 나를 시기한 하늘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였지…….”
우주를 올려보던 혈마는 돌아서서 백수룡을 똑바로 마주 봤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
새카맣게 물든 밤하늘과 무수한 별빛을 배경으로, 적발적안의 두 사내가 똑바로 마주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너라면, 언젠가 나를 완벽하게 이해할지도 모르지.”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바람이나 염원처럼 느껴졌다. 피식 웃은 혈마는 눈을 감았다.
스스스슷…….
혈마의 모습이 발끝에서부터 먼지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역천혈류대법에 사용된 손가락의 힘이 다하면서, 그의 사념 또한 사라지는 것이었다.
백수룡의 몸을 차지하려던 혈마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백수룡은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날이 기대되는구나. 그때는 또 어떤 모습일지, 너의 운명은 읽을 수가 없기에 더욱 나를 설레게 하는구나.”
푸스스스…….
완전히 먼지로 변한 혈마는 밤하늘에 흩어졌다. 백수룡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상으로 내려갔다.
“대법이 거의 다 끝나가는 모양이군.”
중얼거린 백수룡은 주위를 둘러봤다.
한 폭의 그림처럼 멈춰 있는 과거의 한 장면이었다.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는 옛 제자들의 뒷모습.
낡고 오래된 숙소와 연무장.
바닥에는 깨진 술병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까진 내 기억이 맞아.’
혈마의 사념은 완전히 사라졌다.
처음의 목표 또한 이루었지만, 전생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백수룡의 의지로 남은 것이었다.
‘조금만 더.’
적발적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백수룡의 얼굴은 다시 이십칠호가 되었다.
동시에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녹슨 경첩이 삐걱거리고, 스승의 불호령을 들은 제자들이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깐.”
그의 말에 방으로 들어가려던 제자들이 멈춰 섰다.
돌아보는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없었지만, 백수룡은 개의치 않았다.
“너희에게 할 말이 있다.”
설령 덧없이 깨어날 꿈에 불과할지라도,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