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55
455화. 이독제독
시간을 조금 거슬러.
백수룡이 귀령왕을 처음 찾아간 것은 회합날 새벽이었다.
“누가 모산파 아니랄까 봐…… 음산하기 짝이 없군.”
귀령왕이 머무는 봉우리 주변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라곤 해도,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이 안개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백수룡은 거침없이 그 경계 안으로 발을 디뎠다.
누구냐!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퍼지자, 희뿌연 안개가 사납게 출렁였다. 마치 안개가 살아 있어서 침입자를 경계하는 듯했다. 일부는 스멀스멀 다가와 피부에 들러붙으려 했다.
[불쾌한 술법이로다.]녹림에 온 이후로 계속 천에 둘둘 말려서 백수룡의 등에 짐처럼 메여 있던 창룡신검이 신령한 기운을 내뿜자, 다가오던 안개가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굳이 안 이래도 되는데? 나한테 이런 안개는 안 통해.”
[본보기를 보여 주지 않으면 계속 수작을 부릴 것이다.]“그건 그렇지.”
백수룡은 피식 웃고는 귀령왕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 무슨……!
귀령왕의 목소리에 분노와 당혹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 일대에 펼쳐진 안개는 모산파를 수백 년간 신비지문으로 만들어 준 진법이었다.
섣불리 발을 들였다간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환영을 보고, 공포에 질려 미쳐 버리는 끔찍한 술법진.
물론 모산파 주변에 설치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식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파훼될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천하제일의 술법사와 함께하는 백수룡에게는 조금 눅눅한 안개에 불과했으니까.
잠시 후, 백수룡은 가마 위에 앉아 자신을 내려보는 귀령왕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본좌의 진법을 파훼하고 여기까지 오다니. 한가락 재주가 있는 모양이구나.”
귀령왕은 애써 목소리에서 당혹스러움을 지우고 위엄을 세우려 했지만, 백수룡의 눈에는 그가 낯선 상황에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다루기 쉬울지도 모르겠군.’
순간 눈을 빛낸 백수룡은 귀령왕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러나 과한 예의는 차리지 않았다.
“맹룡휘라고 하오. 녹의수사께서 다스리는 염라채 소속이오.”
“……감히 산적 따위가 본좌의 거처에 멋대로 찾아온 것이냐!”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귀령왕이 귀기를 뿜어내며 맹룡휘를 노려봤다. 자줏빛 장포가 사납게 펄럭이고,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온 강시들이 맹룡휘를 포위했다.
그르르르…….
그르르르…….
안개 속에서 강시들이 다가오는 모습은 웬만큼 담이 큰 무인이라도 간담이 서늘해질 광경이었으나, 맹룡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마치 강시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태연했다.
“조용히 나누고 싶은 말이 있어서, 실례임을 알고도 이렇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소.”
“채주가 직접 온 것도 아니고 부하 따위와 나눌 이야기는 없다!”
피식.
맹룡휘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묘한 미소가 맺혔다.
“내가 녹의수사의 부하라고 생각하시오?”
“……뭐라?”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맹룡휘라는 사내의 태도가 범상치 않았다.
어떤 산적이 혼자서 모산파의 술법을 파훼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몸 위로 흐르는 기파 또한 상당히 강렬했다.
“너……!”
한동안 맹룡휘를 살피던 귀령왕은 그의 등에 메여 있던 무언가를 보곤, 앉아 있던 가마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패(寶貝)를 가지고 있었구나! 그것도 대단히 귀한 상등품을…….”
귀령왕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들거리자, 창룡신검이 불쾌한 듯 부르르 검신을 떨었다.
[그냥 저자를 끌어내려 칼로 겁박하면 안 되겠느냐?]‘안 돼. 일단은 협력을 제안하러 온 거니까.’
[평소에는 잘만 하더니…….]‘말이 정 안 통하면 그렇게 해 볼게.’
투덜거리는 창룡신검을 다독이고, 백수룡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러자 강시들이 동시에 자세를 낮추며 위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하지. 손을 잡읍시다. 오늘 회합에서 녹의수사에게 힘을 실어 주시오.”
“하. 내가 왜?”
귀령왕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욕심을 드러냈다.
“네가 등에 멘 보패라도 준다면 모를까…….”
[일단 저놈의 주둥이부터 베어 버렸으면 좋겠구나.]백수룡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 보물은 넘보지 마시오. 욕심을 부렸다간 화만 부를 테니. 대신에 다른 조건을 제안하지.”
“다른 조건?”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귀령왕에게, 맹룡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은 마공을 익힌 상급의 절정고수 둘이면 어떻소?”
“……무슨 소리냐?”
“거령채주, 호문채주. 두 놈은 마공을 익혔소. 혈교에서 흘러나온 것이지.”
“…….”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 귀령왕은 잠시 침묵했다.
맹룡휘가 말을 이었다.
“우리와 동맹을 맺는다면 거령채주와 호문채주의 시체를 약속하겠소. 당장은 아니지만, 녹의수사가 녹림맹을 장악한 후에 건네드리지.”
“…….”
“망설일 이유가 있나? 마공을 익힌 고수만큼 강시로 만들기 좋은 재료도 없을 텐데.”
그 말에 귀령왕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일개 산적 놈이 알 만한 내용이 아니건만, 네놈이 어찌 아는 것이냐?”
맹룡휘의 말은 정확했다.
마공을 익힌 무인은 대체로 원한이 깊고, 마공을 익힌 신체 자체가 강시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독극물과 상성이 좋다.
즉, 거령채주와 호문채주 수준의 고수라면 강시로 만들기에는 최상급의 재료라고 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귀령왕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제법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다. 헌데 말이다.”
그가 가볍게 손을 휘젓자, 주변의 안개가 더욱 짙어지고, 사방에서 귀곡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아아아아악-
강시들이 몸을 뒤틀며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귀령왕이 킬킬 웃으며 맹룡휘를 바라봤다. 옥가면 너머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고, 네가 가진 보패를 취하는 것보다는 못한 제안이구나.”
백수룡은 다가오는 강시들을 보며 한숨을 작게 쉬었다.
“하여간, 말로 좋게 하면 안 듣는다니까.”
그리고 벼락처럼 도를 뽑아 가장 가까이 있는 강시를 베었다.
촤아아악!
머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진 강시가 좌우로 쿵! 하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본좌의 앞에 설 자격은 있었군.”
귀령왕은 곧바로 강시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말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그는 맹룡휘가 칼을 뽑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만약 저 공격이 자신을 향했다면……. 가마를 든 강시들이 눈치껏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나와 싸우면 손해가 클 거야. 가진 강시를 전부 잃어도 상관없으면 어디 해보든가.”
백수룡은 어깨에 도를 걸친 껄렁한 자세로 귀령왕을 올려봤다. 어느새 그의 말투도 바뀌어 있었다.
“다시 제안하지. 마공을 익힌 두 채주를 모산파에 넘겨주겠다. 당장은 아니고, 녹의수사가 녹림을 장악하면 그때 가져가서 강시로 만들든가 삶아 먹든가 해. 또한 우리와 동맹을 맺고 혈교를 치자.”
“……고작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맹룡휘의 무위에 놀라기는 했으나, 귀령왕도 만만한 자는 아니었다.
마공을 익힌 절정고수의 시체를 구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지만, 갑자기 동맹을 바꾸어 혈교에 맞설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대가가 있다면…….
맹룡휘는 마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피식 웃었다.
“물론 더 드려야지. 고작 강시 둘로 협상하러 온 줄 아셨나?”
“……한번 지껄여 보거라.”
“혈교와 전쟁이 끝난 후 생길 전리품들 중, 술법과 부적, 강시술, 대법을 모두 당신에게 넘겨준다면 어때?”
“그건……!”
귀령왕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과거 혈교는 괴력난신의 술법과 온갖 사마외도의 수법들로 유명했다.
전대의 혈마만 하여도 천하제일의 술법사로 명성을 떨치지 않았던가.
귀령왕이 애초에 혈교 쪽에 붙으려고 한 이유도, 그들 편에서 공을 세우면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혈교 옆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얻는 것과, 혈교를 무너뜨리고 전리품을 챙기는 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귀령왕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맹룡휘를 바라봤다.
“네가 나에게 그것을 약속할 자격이 있느냐?”
혈교와의 전쟁이 끝난 후라면 그 처리를 두고 논공행상이 벌어질 텐데, 그 자리에서 귀령왕에게 약속한 것들을 받아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맹룡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약속할 수 있다. 미리 빼돌려 두는 방법도 있고.”
“내가 네 말을 어찌 믿을 수 있지?”
피식 웃은 맹룡휘는 등에 메고 있던 창룡신검을 앞으로 가져왔다.
검집에 둘둘 말아 둔 천은 풀지 않았지만, 신령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보패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신물에 걸고 약속하겠다!”
화아아악-!
창룡신검에서 흘러나온 신령한 빛이 백수룡의 전신을 휘감았다.
보패에 걸고 한 말은 영성을 지닌다. 약속을 어기거나 저버린다면, 보패는 주인에게 더 이상 그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보패에 대한 상식이자, 술법사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
물론, 창룡신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나를 팔아먹어서까지 사기를 치는구나.]‘진짜로 혈교의 술법을 넘겨주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리고 저 자식 싫다면서.’
[그야 그렇다만…….]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창룡신검은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어냈다. 귀령왕이 그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때? 이만하면 구미가 당기지 않소?”
“……네놈. 절대로 산적 따위가 아니로군.”
귀령왕은 맹룡휘의 정체가 녹림도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상관없는 문제였다.
어차피 서로에게 필요한 이득만 챙기면 되는 것이니까.
“좋다. 너에게 협력하도록 하지.”
결정을 내린 귀령왕의 옥가면 뒤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이야기였다.
* * *
“으윽…….”
“끄으윽…….”
거령채주와 호문채주가 끔찍한 몰골로 쓰러져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둘의 상태를 확인한 귀령왕이 혀를 쯧쯧 찼다.
“겨우 숨만 붙여 놓았군. 오래 살아 봤자 일 년이 고작이겠어.”
“마공을 익혔으니 육체는 곧 회복할 거다. 수명이 줄겠지만 그건 내가 알바 아니지.”
“뭐, 나도 이놈들이 오래 살아서 좋을 건 없으니.”
방금 전까지 술법을 펼친 탓에, 귀령왕은 피곤한 목소리로 백수룡에게 말했다.
“내 할 일은 끝났으니, 너도 반드시 약조를 지켜야 할 것이다.”
“물론. 내 신물에 걸고 한 약속이다.”
귀령왕은 그 말을 의심하지 않고 다시 가마에 올라탔다. 곧 그를 태운 가마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뒷정리는 내 몫이군.”
귀령왕이 떠난 후, 백수룡은 자리를 정리했다.
기절한 산적들을 한자리에 모아 다시 수혈을 짚었다. 몇 시진은 더 지나야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호문채주와 거령채주를 앉혀 놓고 물었다.
“너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뭐지?”
두 채주가 멍하니 풀린 눈으로 대답했다.
“산채로 돌아가서, 녹의수사를 맹주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한다…….”
“녹의수사에게 충성을……. 절대 배신하지 않고……”
귀령왕의 술법과 약물로 두 채주를 세뇌했다.
지금은 세뇌 초기여서 어설프게 말을 하지만, 날이 밝을 때쯤엔 세뇌당한 사실조차 잊을 거라고 했다.
“나, 그리고 귀령왕을 만났던 일은 모두 잊는다. 알겠나?”
두 채주는 멍하니 풀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룡은 그들을 내버려 두고 몸을 돌렸다.
다시 녹의수사의 거처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창룡신검의 걱정이 담긴 말에, 백수룡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어쩔 수 없었어. 이런 상황에선 이독제독(以毒制毒)의 방법이라도 써야지.”
술법으로 사람을 세뇌하고, 끔찍할 정도의 폭력을 행사했다.
상대가 아무리 끔찍한 악인이었다고 해도, 스스로의 행동 또한 옳지 못한 짓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전생의 자신이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백수룡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해야 했어.”
[……누구나 옳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지.]“웬일이래? 위로를 다 해 주고.”
창룡신검의 위로에 복잡해졌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피식 웃으며 걷던 백수룡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표정을 굳히고 앞을 응시했다.
스윽. 스윽.
한 사내가 바위에 걸터앉아 연마석에 칼날을 갈고 있었다.
평생 칼날을 갈아온 장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정성스럽고 진지한 모습.
감히 말을 걸기도 어려울 정도로 몰두한 모습이었기에, 백수룡은 그의 일이 끝나기를 잠시 기다렸다.
“손속이 꽤 잔인하더군.”
칼날에 얼굴을 비춰보며 흑사련주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 칼날이 달빛을 머금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도신이 은은히 검붉게 빛났다.
“……왜 여기 계십니까?”
맹룡휘의 말에 흑사련주는 슬쩍 웃었다. 여전히 그는 칼날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날이 균일하게 갈렸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날 보고 놀라지도 않는군. 꽤 신경 써서 기척을 숨겼는데……. 음. 이만하면 됐군.”
결과물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인 흑사련주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맹룡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지켜봤다는 걸 아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
맹룡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흑사련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주변으로 어둠이 번지는 듯했다.
“재미있어. 당황하지 않았으면서 당황한 척하는 것도, 그만한 무공을 숨기고 녹의수사를 밀어주는 이유도, 귀령왕과 무슨 거래를 했는지도……. 맹룡휘.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묘하게 익숙한 이유도. 혹시 맹호악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
백수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흑사련주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혼잣말이었다.
그는 이미 스스로 결론을 내렸고,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더 강해.’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
방금 전까지 상대했던 자들과는 비교조차 불가한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궁금한 게 뭔지 아나?”
“……뭡니까?”
흑사련주가 달빛 아래에서 즐거이 웃었다.
“그야 당연히 너의 도법이지.”
검붉은 궤적이 어둠을 가르는 순간, 백수룡도 동시에 칼을 뽑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