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67
467화. 그의 심장에
백수룡은 음울한 표정으로 초토화된 일대를 바라봤다.
“…….”
몸이 반으로 찢겨 죽은 귀령왕. 피를 토하며 쓰러진 벽안귀. 어깨가 박살 난 채 창백한 표정으로 나무에 기대어 의식을 잃은 녹의수사.
모두 다 혈교의 사도, 그의 옛 제자가 만들어 낸 광경이었다.
혈교가 말하는 선연한 핏빛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이것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겠지.”
사사도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 역시 사투를 벌이느라 몸 곳곳에 상처가 생기고 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경이로운 신위를 떨치며 추혼궁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콰아아앙!
추혼궁귀는 아슬아슬하게 사도의 공격을 피하며 훌쩍 물러났다. 등골이 서늘해진 그녀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
이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백수룡과 추혼궁귀뿐이었다.
무림십존(武林十尊)이라 불리며 수많은 무인들의 추앙을 받는 절세고수들.
그러나 혈교의 사도를 상대로는 둘의 명성조차 빛바래 보였다.
“강할 거라곤 예상했지만…….”
추혼궁귀가 십존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극쾌의 신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또는 녹의수사와 벽안귀가 어느 정도 사도를 지치게 하지 못했다면, 이미 저 주먹에 으스러졌을지도 몰랐다.
“당신은, 저딴 거랑 혼자서 싸우고 있는 거야?”
추혼궁귀는 흑사련주가 있는 방향을 힐긋거렸다.
어느새 거리가 많이 멀어져 있었다.
검고 붉은 기파가 사납게 서로를 할퀴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흡사 멸망의 징조인 것처럼 무시무시한 광경에 추혼궁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죽기만 해 봐.”
솔직히 혼자였다면 벌써 도망쳤을 것이다.
추혼궁귀는 딱히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크게 내세우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끌지 못한다면, 여기 있는 괴물마저 흑사련주에게 갈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드드득…….
허공에서 활시위를 당긴 추혼궁귀는 한쪽 눈을 감고 지상에 있는 사사도를 겨냥했다.
“그러니까 이제 좀 뒈지지?”
콰앙!
지반을 부수며 뛰어오른 사사도가 순식간에 추혼궁귀의 눈앞에 도달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속도였다.
하지만 추혼궁귀의 동체시력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
푸확!
빛살처럼 쏘아진 화살이 사도의 어깨를 스쳤다. 호신강기가 갈라지고 핏물이 번졌다.
‘확실히 약해졌어.’
문제는 집중해서 화살을 쏘느라 추혼궁귀가 사도의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콰콰콰콰콰!
공기를 찢으며 날아오는 사도의 주먹에 무시무시한 기파가 소용돌이쳤다. 한눈에 봐도 위험한 공격. 근접전에 취약한 추혼궁귀는 스치기만 해도 더 이상 싸우지 못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추혼궁귀는 개의치 않고 새로운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백수룡이 사도의 옆에서 달려드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맹룡휘.’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아도 너무 많은 사내.
과연 지금 그를 믿어도 되나 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추혼궁귀는 흑사련주의 안목과 자신의 직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쩌어어엉!
추혼궁귀 대신 사도의 주먹을 막아 낸 창룡신검이 부르르 떨렸다. 저릿한 통증이 손목과 어깨를 타고 올랐다. 백수룡은 이를 악물고 힘의 궤적을 비틀었다.
동시에 추혼궁귀의 화살이 쏘아졌다. 사사도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서며 바닥에 내려서야 했다.
쿵!
바닥에 내려선 사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일자로 꾹 다문 입매가 불만스럽게 꿈틀댔다.
후우우…….
가빠진 호흡을 천천히 정리하는 사도의 모습에, 백수룡의 옆에 내려선 추혼궁귀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괴물도 인간이긴 한가 보네.”
“…….”
백수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굳은 옆얼굴을 본 추혼궁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놈도 지쳤어. 우리 둘이서도 해볼 만해. 너만 똑바로 정신 차리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웃기지 마. 네 진짜 실력이 겨우 이 정도라고?”
추혼궁귀는 코웃음을 쳤다.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백수룡의 모습은 그가 험난한 사투를 벌였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십존급의 고수는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도 보고, 듣지 못하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련주는 네 정체에 대해서 내게 말하지 않았어. 뭐, 굳이 말 안 해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창룡신검의 검집을 두른 천은 기파에 휘말려 찢어진 지 오래였다. 고색창연한 검집에 선명하게 새겨진 ‘蒼龍劍’이란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청룡신협. 추혼궁귀는 최근 혈교를 상대로 수많은 일화를 만들어 낸 청년고수의 별호를 알고 있었다.
“혈교의 마두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으니 보통 악연이 아닐 거라곤 짐작했지만…… 설마 같은 무공을 쓸 줄은 몰랐네. 본의 아니게 들었는데, 너도 저기 쓰러져 있는 벽안귀와 같은 처지인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백수룡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크게 보면 그의 처지도 벽안귀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중인지, 사사도는 공격을 멈춘 채로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비슷하다?”
백수룡의 대답에 추혼궁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기엔 사도를 대하는 백수룡의 태도가 벽안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헌데 손속을 망설이는 이유가 뭐지? 저자는 네 원수나 마찬가지일 텐데.”
“아직 몸이 덜 풀려서.”
이 와중에도 백수룡은 어깨를 으쓱이며 의뭉을 떨었다. 입가에 지독하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요한 순간에 의뭉을 떠는 사내는 인기가 없는 법인데.”
“확실히 당신 취향은 좀 더 단순한 쪽이지.”
“……닥쳐. 하여간 더 이상 망설이면 우리 모두 죽는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
고개를 끄덕인 백수룡은 앞으로 나섰다. 사사도 또한 한걸음 마주 내디디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문득 백수룡은 흑사련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떤 망설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태로는 무엇도 제대로 베지 못한다.
지금 그는 삼사도를 상대로 생사결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망설임.’
백수룡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찰나에 수많은 판단을 내려야 하는 절세고수와의 싸움에서, 순간의 망설임은 팔다리를 묶는 쇠사슬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눈앞에서 사제의 팔이 부러지고, 동료가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데도 제때 막지 못했다. 겨우 목숨만 구해 냈을 뿐이었다.
망설임의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백수룡은 처음으로 옛 제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그만하자.”
그 순간, 사도가 발을 구르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 왔다.
화아아아악!
거대한 압력이 뺨을 먼저 스친다. 사도의 주먹이 공간을 통째로 밀어낸 듯했다. 사나운 바람에 백수룡의 머리카락이 사방팔방으로 나부꼈다.
곧바로 사도의 주먹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절세의 신공으로 수십 년간 단련한 주먹은 신병이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휘릭!
백수룡의 몸이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창룡신검이 사도의 주먹을 위로 쳐내고 그대로 허리춤을 훑었다. 콰가가각! 소리와 함께 사도의 호신강기에서 불티가 튀었다.
“…….”
사도의 무심한 얼굴에서 눈동자만이 살짝 커졌다. 놀라움. 감탄. 희미한 분노 따위가 느껴졌다. 왼쪽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썹을 떠는 버릇. 여전하구나.”
“…….”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백수룡이 사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사도가 곧바로 돌아서며 손을 뻗었다. 벼락같은 손날이 백수룡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을 기세였다.
휘익!
백수룡은 겨드랑이 사이로 사도의 손날을 통과시켰다. 즉시 겨드랑이를 닫아 사도의 팔을 봉쇄하고, 두 손으로 사도의 팔을 붙잡아 강하게 비틀었다.
우득……!
단숨에 사도의 팔을 부러뜨리려 했으나, 그 순간 팔의 근육이 꿈틀대며 버텼다. 오히려 사도는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바닥에 내리 찍히기 직전에 백수룡은 팔을 놓고 물러났다. 동시에 추혼궁귀의 화살 세례가 사도의 전신에 쏟아졌다.
콰콰콰콰쾅!
폭발과 함께 거대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잠시 후, 사도가 흙먼지를 걷어 내며 걸어 나왔다.
퉤.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은 사도가 두 주먹을 부딪쳤다. 콰앙-! 기파가 터져 나오며 충격파가 번졌다. 날아오던 화살들이 힘을 잃고 흔들렸다. 사도는 손을 휘저어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보냈다.
“감히!”
처음 겪어 보는 모욕에 추혼궁귀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녀는 허공섭물을 펼쳐 사용한 화살들을 회수했다. 십여 개의 화살이 그녀의 주변으로 떠올랐다. 몇 개는 시위에 걸고, 나머지는 암기처럼 쏘았다.
백수룡도 다시 사도에게 달려들었다. 사도와 부딪칠 때마다 충격이 뼈까지 전달됐다. 이를 악물어도 신음이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큭…….”
손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대기가 일그러지고 바닥이 깊게 파였다. 끊임없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궤적이 너무 빨라서 흐릿해 보일 지경이었다.
푸화악!
사도의 손등에서 핏물이 터지고.
터엉!
주먹에 맞고 튕겨 나간 백수룡은 숨을 쉬기가 힘든 듯 격하게 기침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몸에 핏물이 번졌다. 무복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찢겨 나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지켜보기 괴로울 정도로 우직하게 맞붙어 싸우는 두 사내의 기백에, 추혼궁귀는 어느샌가 활을 내려놓고 있었다. 어딘가 함부로 끼어들기 어려운 싸움이었다.
콰아아앙!
강한 충격과 함께 두 사내가 동시에 거리를 벌렸다.
“……추혼궁귀.”
자리에 멈춰선 백수룡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가에 피를 닦았다. 사도는 몸에 난 상처를 대충 지혈하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말해.”
추혼궁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백수룡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긴 내게 맡기고, 부상자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시오.”
백수룡의 시선이 잠시 녹의수사와 벽안귀를 향했다. 미리 멀리 떨어뜨려 놓긴 했지만, 싸움이 지금보다 더 험악해진다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부탁이오.”
백수룡의 눈빛이 유언을 남기는 사람처럼 비장했다.
공교롭게도 추혼궁귀는 십 년 전에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던 사내를 한 명 알고 있었다.
“……하여간 사내놈들이란.”
추혼궁귀는 망설이다가 결국 몸을 돌렸다.
백수룡의 부탁 때문이기도 했지만, 흑사련주의 상황 또한 염려된 탓이었다.
“죽지 마. 련주가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추혼궁귀는 의식을 잃은 녹의수사와 벽안귀를 챙겨서 떠났다. 사도는 그 모습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
“…….”
백수룡과 사사도만이 남았다.
둘 다 만신창이에 가까운 상황.
서로가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백수룡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게 설명할 기회를 주겠나?”
사도는 고개를 저었다. 옛 제자가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는 모습을 보며, 백수룡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널 때려눕히고 설명하마.”
그리고 백수룡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콰콰콰콰콰콰!
머리카락이 적발로 변하며 하늘로 치솟고, 두 눈이 새빨간 보석안으로 물들었다. 가공할 기파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며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듯했다.
“…….”
눈앞에서 혈마의 역천신공이 펼쳐졌음에도, 사사도는 그리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치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우우우우웅!
역천신공에 공명하듯 사도의 몸에서도 기파가 번져 나왔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이건…….]그때까지 묵묵히 백수룡을 돕던 창룡신검이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검신이 미친 듯이 진동하자 백수룡이 그녀를 다독이며 물었다.
“왜 그래?”
[사도의 거대한 기 안에, 혈마가 남긴 기운이 존재하고 있구나.]“……뭐?”
백수룡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가운데, 천하제일의 술법사는 혈마가 남긴 술법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
[사도의 심장. 그곳에 혈마가 남긴 술법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