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03
503화.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고수의 안광은 조용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위축시킨다. 더욱이 그것이 절세고수라면, 심령을 뒤흔드는 것은 물론이고 심약한 자들이라면 혼절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호사가들이 무형검(無形劍) 혹은 심즉살(心卽殺)의 무공을 목격했다며 떠드는 일화들의 진실은, 대개 하수가 절세고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객기를 부리다가 그 안광에 픽픽 쓰러지는 경우였다.
그리고 이 순간, 창왕이라 불리는 절세고수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흐읍……!”
“컥……!”
정면에서 바라본 것이 아님에도, 창왕의 안광과 마주한 학생들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이 굳어 버렸다. 호흡곤란이 와서 숨이 가빠지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악가주! 그만두지 못하겠나!”
“다들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거라!”
염왕과 노군상이 공력을 일으켜 창왕의 기세에 대응했다. 부드러운 기운이 학생들을 보호하자, 학생들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또…….”
남궁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낮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백수룡을 말리기보단 우선 상황을 관망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창왕을 도발하진 않았겠지.’
백수룡이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항상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남궁수는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판단했다.
“말석이 아니다?”
주변의 모든 상황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악비는 백수룡을 똑바로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자신의 존재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사내에게서 천하를 오시하는 강자의 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도 오늘만큼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피식.
그와 마주한 백수룡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의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리며 달싹였다.
“글쎄요.”
창왕의 것보다 몇 배는 무거운 기세를 받아 낸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보기에 따라서는 비웃음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웃음이었다.
“십존이 다 같이 모여서 비무대회를 한 것도 아닌데, 그중에 저보다 약한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백수룡은 어깨를 으쓱이며 의뭉을 떨었다.
상대를 도발하면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피해 가는 교묘한 화술.
창왕이 노군상을 상대로 했던 짓을 배로 갚아주는 말이었다.
그러나 창왕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혹, 자네보다 약한 십존이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나?”
피차 말장난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십존은 두 사람뿐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가늠했다.
“길고 짧은 것이야 대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내 창은 제법 긴 편이지. 청룡신협은 검을 쓴다고 들었는데.”
“창도 제법 휘두를 줄 압니다.”
“궁금하군. 언제 한번 견식할 일이 있겠나?”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두 사람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러다가 진짜 한판 붙는 거 아니야?’
‘미쳤군! 십존들끼리 만나자마자 기 싸움이라니!’
다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는 가운데, 창왕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끝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 백수룡의 모습에, 그의 인내심도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듯 보였다.
결국 그의 오른손이 등에 메여 있던 창으로 미세하게 움직인 순간이었다.
“그만-!”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터져 나오고, 시뻘건 화염의 채찍이 두 사람의 중간에 선을 그었다.
치이이익…….
화염이 닿은 바닥이 녹아내렸다. 가공할 열기에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돌아봤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도를 넘는구나!”
염왕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치솟아 사방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화염이 넘실대며 뱀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당장 멈추지 않는다면 이 늙은이와 먼저 푸닥거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좋다면 어디 계속해 보거라.”
지금은 성질이 많이 죽었지만, 과거 염왕은 성깔이 사납기로 유명한 절세고수였다. 사파의 수많은 마두가 그의 손에 잿더미로 변했고, 잘난 척 으스대던 정파의 고수들은 머리털이 홀라당 타 버리는 수모를 당했다.
“…….”
“…….”
두 사람은 이것이 염왕의 경고이자 배려임을 모르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전에, 그들이 물러날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후배가 호승심에 잠시 취해 선배님께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배려를 먼저 받아들인 쪽은 창왕이었다.
백수룡과 싸우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명분을 취하며 발을 뺐다.
기세를 누그러뜨린 창왕이 백수룡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은 날에 기회를 잡아 겨루어 보도록 하지. 오늘은 푹 쉬고 여독을 풀게나.”
“선배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백수룡도 언제 시비를 걸었냐는 듯 예의를 차렸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약간의 미련이 남았다.
‘아쉽군. 한 수 정도는 겨뤄 보고 싶었는데.’
백수룡은 멀어지는 창왕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았다.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 * *
남궁수는 미간을 모으며 백수룡을 노려봤다.
“이제 설명하도록.”
강사 숙소에 짐을 대충 던져 놓은 백수룡은 남궁수를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뭘?”
“비록 네가 상식과 교양이 부족하긴 해도,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할 인간이 아닌 것은 알고 있다. 그 상황에서 굳이 악가주를 도발한 이유가 뭐지?”
“그게 대체 욕이야 칭찬이야?”
“창왕이 혈교와 관련된 인물인가?”
정곡을 찌르는 남궁수의 질문에 백수룡은 잠시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남궁수는 눈치가 빨랐다.
주변에 듣는 귀가 없음을 확인한 백수룡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교도는 아니었어.”
노군상을 무시한 것에 화가 난 것도 사실이었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에 창왕을 도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그럴듯한 명분에 가까웠다.
“악가가 양자들을 잔뜩 입양해서 세력을 넓힌 건 알고 있지?”
“……안 그래도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더군.”
“이상한 부분?”
“정문의 수위 무사, 분가에서 일하는 무인들 중 일부가 연호와 면식이 있었다. 그들도 악가의 기본공을 익힌 것 같았다.”
남궁수는 선발대로 먼저 와서 보고 들은 것을 간략하게 전했다. 그러자 백수룡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악가의 세력을 넓히는 방식은 혈교의 그것과 상당 부분 닮아 있었다.
단순히 사고방식이 닮은 것인지, 아니면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백수룡이 말했다.
“창왕에게서 마공을 익힌 흔적은 찾지 못했어. 그 자리에 있던 악가의 다른 고수들도 전부 마찬가지였고.”
절세고수라 해도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면 빈틈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특히 감정적으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마공을 익혔다면, 상대의 도발에 걸려들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창왕에게서는 어떠한 마공의 징후나 부작용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주 완벽하게 숨겼거나, 애초에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뜻.
백수룡은 후자라고 거의 확신했다. 자신을 상대로 마공을 숨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근방에 술법의 기운이나 사이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구나.]이곳까지 오는 내내 술법으로 주변을 살펴준 창룡신검도 백수룡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창왕과 악가의 고수들, 그리고 이곳 분가에서는 혈교와 관련된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일단은 안심해도 되겠어.”
“……방심할 단계는 아니다. 본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당연하지. 계속 신경 쓰자고.”
두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백수룡이 숙소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연호는 어디 갔어?”
강사들의 숙소는 삼인 일실이었다.
선발대로 온 남궁수, 악연호, 그리고 백수룡이 자연스럽게 같은 방을 쓰게 됐는데, 지금은 악연호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네가 오기 전에 악가에서 불러서 갔다. 그 녀석. 가문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모양이더군.”
“……그 녀석? 너 언제부터 연호랑 그렇게 친해졌냐?”
백수룡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어봤으나, 남궁수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식사 시간에 늦겠군. 이만 나가지.”
“하여튼 저것도 지 할 말만 한다니까.”
함께 숙소를 나선 두 사람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먼저 온 강사들과 학생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주작학관과 청룡학관이 양쪽으로 나뉘어 앉아 있었다.
“저기 봐. 청룡신협과 뇌룡신검이야.”
“소문으로는 저 둘이 사이가 엄청 안 좋다던데요?”
“진짜? 나는 둘이 엄청 친하다고 들었는데?”
“소문이 어쨌건…… 저 얼굴들 뭐야? 왜 우리가 벌써 진 기분인 건데?”
백수룡과 남궁수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처음 본 주작학관 학생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곳곳에서 수군거렸다.
두 사람에게 엄청나게 많은 시선이 쏟아졌지만, 둘 다 익숙한 일인 듯 개의치 않고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친 이후에는 각 학관에 배정된 건물로 이동했는데, 청룡학관 학생들은 실내 연무장에 전원이 집결했다.
“다들 식사는 맛있게 했나?”
““네!””
“숙소를 배정하기 전에, 오늘부터 사흘간의 일정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겠다.”
인솔 강사인 남궁수가 수학여행 동안의 일정과 주의사항을 모두에게 전달했다.
“첫 번째 날인 오늘은 저녁 식사 이후 자유시간. 해가 완전히 진 이후에 담력시험을 겸한 야간 산행 수련이 있을 예정이다.”
“두 번째 날에는 주작학관과의 교류 수업 및 실습 대련이 있을 예정이다.”
“마지막 날에는 산동악가에서 준비한 창술시범 진법 견식, 그리고 저녁에는 휴식을 겸해 장기자랑이 있을 예정이다.”
‘장기자랑’이라는 말에 일부 학생들이 커다란 환호성을 터트렸다가, 남궁수의 서늘한 금안과 마주하곤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여기까지. 혹시 질문 있나?”
그 순간 사위가 어찌나 조용한지, 날아다니는 벌레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모두의 얼굴에는 빨리 숙소로 가서 짐을 풀고 자유시간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보였다.
“알겠다. 그럼 백수룡 선생님.”
남궁수가 물러나자, 이번에는 백수룡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가 친근하게 웃으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밥부터 먹느라 아직 숙소 구경도 못 해 봤지?”
““네!””
학생들은 빨리 숙소에 가게 해 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짐도 실내 연무장에 전부 놓아 두고 식당부터 다녀온 상황.
얼른 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는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백수룡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식들. 알았다. 그럼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자유시간!
학생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나며 모두가 같은 단어를 외치는 순간.
씨익.
백수룡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불길할 정도로 짙어졌다.
“자유시간 전에, 소지품 검사를 진행하겠다.”
““……!””
곳곳에서 소리 없는 경악과 굳은 결의를 다지며 마른 침을 삼키는 모습, 이리저리 눈동자가 굴러가는 모습들이 포착되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흑룡편을 꺼내 어깨에 툭 걸친 백수룡은 단상에서 내려가, 학생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미리 경고하는데, 학생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소지품을 가져온 놈들은 지금 꺼내 놓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
청룡학관 학생들은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학생주임인 매극렴이 없는 대신, 그의 혈육이자 어떤 면에서는 더 지독한 인간이 수학여행에 따라왔다는 것을.
“나중에 걸려서 나오면, 그다음은 너희들의 상상에 맡길 테니까.”
“……!”
악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사악한 미소를 지은 백수룡이 학생들 사이를 느릿느릿 거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