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08
508화. 부탁 하나만 하자
상황은 분명 최악이었다.
주변에는 아는 얼굴들이 시체로 변해 쓰러져 있고, 정체 모를 흑의인들은 살기를 드러낸 채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으며, 등 뒤에는 지키면서 싸워야 할 부상자까지 있는 상태.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아직 십 대에 불과한 학생들이 감당하기에는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가혹한 환경이야.’
포위망의 선두에 있던 흑의인은 저들이 금방 생각을 바꿔 도주를 시도하리라고 생각했다. 앞선 몇 사람들이 그래 왔듯이.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독고준. 누가 더 많이 쓰러뜨리나 내기할까?”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소년들은 한때 청룡학관 최악의 망나니였지만 독하게 마음먹고 갱생한 천재와.
“진 사람은 수학여행 동안 이긴 사람의 잔심부름을 해 주기로 하지.”
지난 십 년간 천무제에서 꼴찌만 해 온 청룡학관을 변화시키겠다고 발버둥쳐 온 학생회장이었다.
둘 다 청룡학관에서 첫 번째를 다툴 고집불통들.
그들의 표정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칼끝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침착해라, 헌원강. 뒤에 관주님이 계신 걸 잊지 마.”
“너나 침착해. 난 지금 집중력 최고거든?”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노군상이 호기심 가득한 소년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는 걱정치 말거라. 내 한 몸 건사할 여력은 있으니…….”
눈앞의 적들을 경계하느라 헌원강과 독고준은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은 다 죽어 가는 관주님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관주님은 가만히 계세요!”
“저희가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고오……맙구나…….”
힘겹게 대답한 노군상은 흑의인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뭐 하나? 시작 안 하고?’
그 무언의 압박에 선두의 흑의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복면에 가려진 터라 누구도 그것을 볼 수는 없었다.
“죽이지 말고 생포해라. 인질로 삼아 청룡신협을 협박하는 데 쓸 것이다.”
흑의인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어딘가 외워서 말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그걸 눈치채기란 쉽지 않았다.
흑의인들이 둔기와 쇠 그물 따위를 꺼내 들며 거리를 좁혔다. 일부는 뒤에서 활을 꺼내 들었다.
“누가 순순히 잡혀 준대!”
자신들을 인질로 삼아 백수룡을 협박하겠다는 말에, 헌원강의 눈이 사납게 치켜떠졌다. 동시에 흑도가 하늘을 갈랐다.
시작은 수라혈천도였다.
화아아아악!
밤하늘이 일순간 붉게 물들며 맹렬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헌원강은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쇠 그물을 단숨에 찢어발기곤 폭발적으로 앞으로 치고 나갔다.
“……!”
찰나지만, 헌원강과 눈이 마주친 흑의인은 흠칫했다.
지독한 살기가 일렁이는 눈동자.
그러나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년의 이성은 차갑게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정파 맞아?’
흑의인은 일단 들고 있던 칼로 공격을 쳐 냈다.
쩌어엉!
“쳇. 대장으로 보이는 놈부터 해치울 수 있었는데.”
헌원강은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지만,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노군상을 지키면서 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기습으로 적을 하나 줄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무리해서 날뛸 생각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독고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헌원강을 구박했다.
“……다음부터는 신호라도 주고 뛰쳐나가라.”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상황에 따라서 판단하는 거지.”
“보조 한번 맞추기 힘들군.”
작게 한숨을 내쉰 독고준은 독고구검을 펼쳐서 날아오는 화살을 쳐 냈다. 그리고 신중하게 적들을 살폈다.
-너희 실력이 뛰어난 건 알아. 하지만 그걸 활용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는 거야.
불쑥 백수룡 선생님이 해 준 조언이 떠올랐다.
헌원강과 손발이 맞지 않아서 몇 번이나 허점을 지적받으며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던 시간.
분풀이가 섞여 있지 않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지만, 어쨌든 덕분에 마지막에는 어느 정도 합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야. 독고.”
마침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헌원강이 눈동자만 굴려 독고준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손발을 제대로 맞춰 보자고.”
“……그래야지. 지금은 뒤에 관주님도 계시니까.”
그들의 뒤에서 노군상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너희의 무공을 펼쳐 보이거라. 뒤에서 따라갈 정도의 기력은 남아 있으니.”
지금은 서로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두 소년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포위망을 향해 내달렸다. 그 뒤를 흐뭇한 표정의 노군상이 뒷짐을 지고 따라 달렸다.
“막아라!”
흑의인들이 포위망을 두껍게 만들며 무기를 겨눴다.
칼날이 빽빽하게 자신들을 향하는데도 두 소년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 한 호흡 만에 지척까지 다다랐다.
쩌어어엉!
선두에서 독고준과 병기를 부딪친 흑의인들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다들 손바닥이 저릿저릿한지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무슨 검력이…….”
“들었던 것과 달리 굉장히 거칠잖아?”
몇몇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와중에, 독고구검이 만들어 낸 넓은 공간에서 수라혈천도가 사납게 날뛰었다.
촤아아아악!
흡사 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파공성을 내면서 흑도가 붉은 궤적을 연달아 그렸다. 섬뜩함을 느낀 흑의인들이 황급히 물러났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공격이었다.
“이러다 우리가 다치겠는데…….”
“다들 정신 바짝 차려!”
흑의인들도 진지하게 싸우기 시작한 와중에, 노군상만이 흡족한 표정이었다.
“허허.”
사납고 화려한 수라혈천도와 무겁고 진중한 독고구검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연환식을 펼쳤다. 등을 맞댄 소년들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흑의인들을 공격을 막아 내고, 쳐 내고, 반격에 나섰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 명 한 명도 보통내기가 아닌데, 둘의 조합은 그보다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흑의인들도 강했다. 전력을 다한 헌원강과 독고준의 공격에도 포위망이 출렁이기만 할 뿐, 결코 뚫리지 않으며 버텨 냈다.
“제기랄! 만만한 놈이 없네.”
“선생님들을 해치고 관주님에게 중상을 입힌 자들이다. 만만할 리가 없지.”
독고준의 말에 지레 찔렸는지, 노군상이 뒤에서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놈들이 독까지 쓰더구나. 너희도 독을 조심하거라.”
마치 무슨 신호라도 된 것처럼, 흑의인들 중 일부가 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정체불명의 가루가 날아왔다.
그러나 독에 대처하는 능력이라면 청룡학관에서 독고준보다 뛰어난 학생은 없었다.
품 안에서 피독주를 꺼낸 독고준은 헌원강과 노군상에게 하나씩 던지고, 자신도 하나를 입에 물었다.
싸우느라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헌원강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비싼 피독주를 평소에 몇 개씩이나 가지고 다니는 거야?”
“당소소의 폭주에 대비해서 항상 갖고 다니는 편이다.”
“……음. 이해했어.”
자리에 없는 당소소에게 잠시 고마움을 느끼고, 그들은 다시 이를 악물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에 오기 전 사천왕과 싸우면서 체력을 크게 소비한 것이 발목을 잡았다.
“허억…… 허억…….”
“후욱…… 후…….”
숨이 점점 가파르게 차오르고,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한 시진은 정신없이 싸운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 지난 시간은 고작해야 일각도 되지 않았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한계 이상을 끌어낸 탓에 더 빨리 지쳐 가고 있었다.
“젠장. 아까 옥면음랑한테 두들겨 맞지만 않았어도…….”
“체력을, 후우. 아껴라. 곧 지원군이 올 테니까.”
그나마 아직까지 둘 다 크게 다친 곳이 없는 것이 기적이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노군상에게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할 정도였다.
“관주님. 괜찮으세요?”
“……괜찮다. 이자들이 나는 다 죽어 간다고 생각하는지 공격하지 않는구나.”
“하아, 그나마 다행입니다…….”
점점 적들에게 밀리다 보니 세 사람의 등이 맞닿았다. 헌원강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독고준에게 말했다.
“야. 독고.”
“힘들다. 말 걸지 마.”
“부탁 하나만 하자.”
헌원강은 목소리를 낮춰 작게 속삭였다. 전음을 사용할 내공조차 아껴야 할 정도였다.
“내가 아껴 놓은 초식이 하나 있거든. 그거 한 방이면 길을 열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그 직후에 탈진할 것 같아.”
“그런 쓸모없는 초식을 어디에…….”
“관주님 업고 도망쳐.”
“……뭐?”
독고준이 멍하게 돌아보았으나, 헌원강은 여전히 적들을 경계하며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만약에 살아남으면…… 내 대신 여민한테 선물 좀 전해 주라.”
그 순간, 그들을 넓게 포위한 흑의인들 중 하나가 수치심에 못 이겨 몸을 바르르 떨었다.
다른 흑의인들은 “어휴. 진짜.” “토할 것 같아요.” “그냥 죽이죠?”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한 헌원강과 독고준에겐 그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두 사람만의 세계에 있었다.
“너……!”
독고준은 친구의 마지막 부탁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고민할 시간조차 사치였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살아 나간다면 꼭 전해 주마.”
“그리고 이 말도 함께 전해 줘. 너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전부 행복했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좋…….”
“야-!”
비명 같은 고음과 함께 뒤쪽에 있던 흑의인 중 한 명이 솟구쳐 올랐다. 벗어 던진 복면 아래로,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너 진짜 미쳤어?!”
헌원강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자신 앞에 내려선 여민을 보며 눈을 몇 번이나 꿈뻑였다.
“어? 네가 왜……?”
헌원강이 아직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자, 얼굴이 새빨개진 여민이 잔소리를 쏟아냈다.
“넌 진짜 어디까지 눈치가 없을 거야? 이렇게까지 적들이 수상하면 눈치를 채고도 남아야 정상…….”
여민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헌원강이 그녀를 덥석 끌어안아 버린 것이다.
“……!”
여민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헌원강에게 안기자 완전히 파묻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헌원강의 심장 고동 소리를 잠시 멍하니 듣다가, 여민은 뒤늦게 그를 홱 밀쳐 냈다.
“너, 너, 너 미쳤어 진짜? 뒈질래?”
“아악! 아파! 아프다고! 빙백신장으로 때리지 마!”
헌원강이 이유도 모르고 등짝을 두들겨 맞는 와중에, 상황을 대충 파악한 독고준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평소의 학생회장답지 않은 언행이었으나, 지금은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휴, 진 빠져.”
복면을 벗은 사마영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흑의인으로 변장해 있던 주작학관 강사들도 복면을 벗었다.
“주작학관 선생님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흑의인들 중에 일부는 육조보다 먼저 출발한 학생들이었다. 독고준은 그들을 보곤 허망하게 웃었다.
“끄응……. 이것도 못 할 짓이군.”
“……슬슬 교대 좀 합시다.”
동시에 쓰러져 있던 부관주, 풍진호 등도 멀쩡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귀식대법을 펼쳐서 시체 연기를 하고 있었다.
“허허. 둘 다 많이 놀랐느냐? 이게 진짜 담력시험이었단다.”
노군상이 혈색이 좋아진 모습으로 말을 걸자, 비로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헌원강이 펄쩍 뛰었다.
“세상에 이딴 담력시험이 어딨어요!”
“하, 하하. 관주님…….”
분해하고 허망해하는 두 소년을 향해, 노군상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노인의 눈가에 맺힌 주름이 부드럽게 짙어졌다.
그는 학생들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곧 다음 조가 올라올 텐데. 이번에는 너희도 함께하겠느냐?”
저 밑에서 사천왕이 열심히 시간을 끌어주고 있고, 이곳에서 신호를 보내면 다음 조를 올려보낸다고 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흐흐. 물론이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아래에서 올라오는 다음 희생자들을 숨어서 지켜보는 두 소년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