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81
581화. 삼십 년 전 약조 (2)
열여덟 살의 백무흔은 어딜 가건 주변의 시선을 잡아끄는 소년이었다.
-저 소협이 소문의 그…….
-옥면공자 맞지?
-세상에. 청룡학관에선 저 얼굴을 매일 보는 거야?
빼어난 외모는 언제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으며, 과하게 자유분방한 행실도 강사들에게나 골칫거리일 뿐, 또래의 무인들에게는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해의 천무제에서도, 백무흔은 호북의 거리를 활보하며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축제를 즐겼다. 마찬가지로 축제를 한껏 즐기는 듯 보이는 사람과 함께였다.
-옆에 같이 다니는 소협은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입생인가 봐. 저쪽도 잘생겼다…….
-근데 사내치고는 너무 여리여리하지 않나?
오대학관의 많은 학생들이 옥면공자와 그 곁에 있는 이름 모를 미소년을 보고 수군거리기 바빴다. 하지만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두 사람은 옷에서 미약한 주향을 풍기며 밤거리를 즐겁게 쏘다녔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그들을 막아선 이는 체구가 작은 소녀였다.
-당신이 청룡학관 제일의 망나니라는 옥면공자입니까?
-뭐야 넌?
당시에는 오대학관의 격차가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천무학관의 후기지수들이 가장 뛰어난 편에 속했다.
-저는 천무학관 학생회 소속, 아미파의 금산산이라 합니다.
금산산은 그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난 후기지수로, 그해 용봉비무의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오대학관 학생들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무흔은 그런 것에는 관심 따위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청룡학관의 옥면공자가 이 인근에서 여인들을 희롱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장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뭐, 뭐?
눈을 크게 뜨고 황당해하는 백무흔의 바로 옆에서, 의문의 미소년이 눈을 흘기며 백무흔을 추궁했다.
-저 말이 진짜예요?
-진짜일 리가 있겠소? 당연히 모함이지!
-그럼 아미파의 제자가 없는 소리를 한다는 건가요?
-억울해 미치겠군. 하루종일 같이 다녀 놓고 못 믿겠다니!
정말로 억울해하는 백무흔과 그 옆에서 웃음을 꾹 참으면서도 계속 추궁하는 미소년.
소문과는 다른 백무흔의 모습에 금산산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두 분 모두 저를 따라오십시오. 주향이 풍기는 것을 보니 음주까지 의심되는바, 제가 직접 청룡학관 숙소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훗날 알고 보니 천무학관의 짓궂은 선배들이 금산산을 골려 주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었지만, 당시 고지식했던 금산산은 깜빡 속아 넘어가고야 말았다.
물론 청룡학관의 전설적인 두 망나니가 순순히 그녀를 따라갈 리 없었다.
-네가 우리 안전을 걱정해 준다고?
얄밉게 코웃음을 치는 얼굴마저도 어찌 저리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잠시 멍하니 있던 금산산은 이내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되물었다.
-……지금 비웃으셨습니까?
-웃으라고 한 소리 아니었나? 시간 없으니까 비켜. 같은 장소에 오래 있으면 우리 학주가 귀신같이 알고 잡으러 온단 말이다.
-끝내 따라오지 않으시겠다면 힘으로라도 제압하겠습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어? 천무학관주님!
-관주님?
깜짝 놀라서 외치는 백무흔을 따라 금산산의 고개도 함께 움직였다.
그 순간, 백무흔의 신형이 흐릿해지면서 금산산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검결지로 그녀의 마혈을 짚고 난 이후였다.
-어? 분명 천무학관주님인 줄 알았는데 사람을 잘못 봤나 보다.
-비겁한……!
금산산은 뒤늦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몸이 뻣뻣하게 굳어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상태였다.
백무흔이 키가 작은 금산산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쥐어박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소문만 듣고 와서 사람 함부로 모함하는 거 아니다. 밤톨만 한 게 벌써부터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아미파의 제자로서 처음 당해 보는 치욕이었다. 금산산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으나, 마혈이 제압된 상태라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방심, 조금 방심했을 뿐입니다! 제대로 싸웠다면 당신 정도는 얼마든지……!
다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말인지.
그러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혼란스러웠던 금산산은, 상대를 비겁하다고 매도하는 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백무흔이 씩 웃으며 내기를 제안했다.
-그럼 나중에 용봉비무에서 정식으로 붙어 볼까?
-……예?
-아무리 나라도 여기서 사고 치다 걸리면 퇴학당할지도 모르거든. 하지만 비무대 위라면 상관없겠지?
-용봉비무에서……. 당신과 내가 싸우게 될지 어떻게 알고요?
오대학관의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참가하는 대회가 용봉비무였다. 천무제의 꽃. 하지만 아직 대진표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용봉비무에서 붙자는 말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백무흔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말했다.
-너도 꽤 세 보이는데. 둘 다 안 떨어지면 언젠가는 당연히 만나지 않겠어? 아무리 운이 나빠도 결승에선 만나겠지.
-하……!
그 황당할 정도의 자신감에 금산산은 말문이 막혔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의문의 미소년이 쿡쿡 웃었다.
-……용봉비무에서 당신에게 설욕할 기회를 주겠다, 이겁니까?
-단, 오늘 있었던 일은 서로 간의 비밀로 하겠다는 조건으로.
-…….
금산산이 고민 끝에 알겠다고 대답하자, 백무흔은 곧바로 그녀의 마혈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용봉비무에서 보자고.
-오늘의 약조! 잊지 마십시오!
백무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의문의 미소년과 함께 골목길을 빠져나가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왜 이렇게 대화를 오래 해요?
-저렇게 어린 여자애를 점혈만 해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잖소.
-하여간 죄 많은 남자라니까.
-……갑자기 또 무슨 소리요? 전부 청산한 지 반년도 넘었는데.
-됐네요.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어서 공연패나 보러 가요.
옆에 있는 미소년과 투닥거리며 홀연히 모습을 감추던 백무흔의 뒷모습.
-……어리지 않습니다. 저는 천무학관 삼 학년, 금산산입니다.
그것이 금산산이 기억하는 옥면공자 백무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멸절신니는 매서운 눈빛으로 백무흔을 노려봤다.
“당신은 약조를 저버리고 대회에서 기권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설욕할 기회를 잃어버렸지요.”
아미파의 금산산이 용봉비무에서 우승하던 날, 백무흔은 용봉비무 사강에서 대회를 기권했다.
당시에도 말이 많은 사건이었다. 내상을 입었다는 말도 있었고, 무리한 운공으로 심마가 찾아와 그것을 다스리느라 포기했다는 말도 있었다. 비겁한 수를 써서 올라와 들키기 전에 포기했다는 말도 있었다.
멸절신니는 그중 무엇도 진실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삼십 년이 지나 비무대 위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너 혹시……. 그때 우리를 가로막았던…… 그 여자애?”
비로소 생각이 났는지, 백무흔의 표정에 서서히 반가움이 번졌다.
“하하하! 못 알아볼 수밖에. 그때는 머리도 길고 키도 겨우 요만했는데, 그사이에 이렇게나 훌쩍 컸단 말이야? 그 밤톨만 한…….”
멸절신니의 매서운 눈빛에 백무흔은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구파의 장로였다. 반갑다고 예전처럼 놀려서는 안 될 때였다.
“흠흠. 미안하오. 옛 생각에 반가워서 그만…….”
“되었습니다. 다시 묻지요. 왜 약조를 지키지 않았습니까?”
“그게, 사정이 있어서 말이오.”
백무흔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비무 전날 술에 많이 취했거든. 술병에 걸려서 도저히 비무를 할 수가 없었소.”
삼십 년 만에 듣는 진실은 허탈할 만큼 별것 아니었다. 그러나 멸절신니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끝까지 거짓말로 넘어가려 하는군요.”
“정말이오. 운기조식으로도 쉽게 회복이 안 될 만큼 속이 엉망이었거든. 그 전날에…… 일이 좀 있어서.”
뒷말을 얼버무리며 능청스럽게 웃는 얼굴에 대고, 멸절신니는 검을 들어 겨누었다.
“검을 뽑으세요. 변명은 더 듣지 않겠습니다. 약조를 지킬 시간입니다.”
“우선 사과부터 하겠소. 삼십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까지 기분이 상했다면…….”
그 순간 빛살 같은 일검이 백무흔의 어깨를 찔러 들어갔다. 동시에 백무흔은 몸을 반 바퀴 회전시키며 발검해 멸절신니의 검을 위로 올려쳤다.
까앙!
멸절신니는 튕겨 나온 검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적갈색 승복이 바람에 펄럭이며 아름다운 물결을 이뤘다. 그 사이로 번뜩이는 검이 백무흔의 빈틈을 노렸다. 무엇이 실(實)이고 무엇이 허(虛)인지 구분하기가 몹시 까다로웠다.
그에 맞서 백무흔도 집중해서 검을 휘둘렀다. 여유를 부려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일순간 그의 검이 수십 개로 불어난 듯했다.
“멸절신니의 옥허삼십육검이다!”
“상대도 만만치 않습니다. 검이 마치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옥면공자라니. 누구 저 별호를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졸업생들이 보여 주는 무위에 관중석이 들썩였다. 환호성과 경악성, 승부의 결과를 두고 내기와 열띤 응원이 뒤섞였다.
“멸절신니라……. 구파에 저런 고수도 있었군.”
백수룡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비무를 구경했다.
부친인 백무흔의 실력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상대인 멸절신니의 검에도 조금 놀라고 있었다.
‘십대검수라던 청성신검보다 이쪽이 훨씬 나은데.’
게다가 위력도 위력이지만, 저건 마치…… 누군가를 상대하기 위해 오랫동안 갈고닦은 검법 같았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 눈치챈 백수룡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죄 많은 양반이라니까.”
그러자 비무대 위를 주시하던 남궁수가 눈동자만 돌려 백수룡을 힐끗 바라봤다.
“부전자전이로군.”
“잠깐. 그거 욕이야 칭찬이야?”
“네 양심이 알려 줄 것이다.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
“…….”
할 말을 잃은 백수룡은 다시 비무에 집중했다.
비무대 위에는 수많은 검흔이 새겨져 있었다.
반면 두 검객의 무복은 별다른 상처 없이 깨끗한 편이었는데, 그들은 잠시 싸움을 멈추고 마주 섰다.
멸절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삼십 년 전 그 일이 있고 나서, 금산산은 용봉비무 예선에 올라간 백무흔의 검을 보게 되었다.
“그해의 당신은 저보다 강했습니다. 사강까지 오르며 단 한 번도, 백 초식 이상 겨룬 적이 없었으니까요.”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걸 다 기억하고 계시오?”
이기려고 정말 죽도록 수련했으니까.
다행히 운도 따라 주어서 먼저 결승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백무흔은 사강에서 기권했고, 자신은 용봉비무의 우승자가 되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올해가 아니어도, 다음 해에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들은 삼 학년이었고, 아직 일 년이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다음 해에도 오지 않았지요. 나중에 듣기로는, 정인과 함께 청룡학관을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
이후 금산산은 천무학관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아미파로 돌아간 후에도 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강호에 나가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대라면 반드시 뛰어난 무인으로서 명성을 떨칠 거라고 확신했으니까요.”
강호에 나가 많은 악인을 베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중생들을 도왔다. 멸절신니라는 과분한 별호도 얻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생긴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당신은 그 어디에도 없더군요.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습니까?”
덤덤한 목소리에는 이제 조금의 원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궁금해할 뿐이었다.
당신처럼 뛰어난 자질을 지닌 무인이, 강호와 담을 쌓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느냐고.
백무흔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내와 강호유람을 했소. 이후에는 시골에서 무관을 열고, 아들과 함께 그럭저럭 먹고살았지.”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전혀.”
그 대답에 멸절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진심이 느껴지는군요.”
“약조를 지키지 못해 미안하오.”
백무흔의 눈빛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멸절신니의 검을 막기에 급급했던 그의 기세가 일변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만큼, 확실하게 이겨 드리겠소.”
“좋습니다. 그렇게 나오셔야지요.”
처음으로 멸절신니가 웃었다.
이후, 두 사람의 검에 강기가 맺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