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19
619화. 긴 밤
무공광(武功狂).
백수룡은 전생과 현생을 살아오며 무공에 미친 자들을 숱하게 보았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괴력난신을 마다하지 않고, 인면수심의 행위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광인들.
가깝게는 광마 사부도 무공을 완성하겠다는 집념으로 백인비무행을 벌여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히지 않았던가.
-……내가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헌원세가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불렸던 사내조차, 자신만의 무(武)를 완성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끝없는 탐욕과 갈망은 무공에 미친 자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리고 그 점은 오히려 상대하기 편하게 해 주었다. 상대의 욕망이 투명할수록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는 것도 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하에 존재하는 무공이 천차만별이듯, 그에 집착하는 광인들도 단순하게만 정의 내릴 수는 없었다.
정파무림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도, 이렇게 점잖은 척하는 미친놈이 실재하는 것처럼.
“눈이 많이 충혈되었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광기조차 숨길 수 있는 인내심을 지닌 자. 백수룡이 아는 미친놈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유형이었다.
“피곤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요즘 잠을 좀 설쳤더니.”
백수룡은 충혈된 눈을 한 손으로 비비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역천신공의 기운은 이미 흔적도 없이 흩어진 이후였다.
떠보기에 불과한 말에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저런. 수면 시간은 꼭 지키게. 자네 같은 인재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무림의 큰 손실이 아닌가.”
천무학관주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일사도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태연하게 손에 들린 술병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한잔하겠나? 독한 술을 몇 잔 들이켜고 푹 잠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
“싫다면 나 혼자 마셔야겠군.”
백수룡의 싸늘한 표정에도 개의치 않은 듯, 천무학관주는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전부 무공(武功)에 관한 이야기였다.
평생을 정립해 온 자신만의 무론은 물론이거니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대표하는 무공들의 장단점과 파훼법, 특정한 마공을 익힐 때 드러나는 특징 등등.
두서없이 아무렇게나 떠들어 대는 이야기 중 어떤 것에는 절세고수의 현기가 깃들어 있고, 어떤 것은 정파무림인으로서 결코 범해선 안 될 금기를 넘나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천뢰검법과 제왕검형을 새로운 신공을 탄생시켰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앞선 두 신공보다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네. 결국은 당사자의 자질과 성향에 달린 문제이지. 천뢰제왕검형이 후대까지 이어지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와 같은 절세고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라면 영혼도 갖다 바칠 무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백수룡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종종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정도의 반응만을 보여 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천무학관주는 그것으로 충분한 듯 환히 미소 지었다.
“하하! 이토록 생각이 잘 맞는 친구는 오랜만이군. 자네의 눈빛이나 표정에서 느껴지는 대답이 저 머저리들의 백 마디 말보다 나아.”
그들은 상대의 미세한 표정 변화마저 읽어 낼 수 있는 절세고수였다.
천무학관주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백수룡에게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한참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던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이지. 요즘 들어 무척이나 즐겁다네. 지난 십 년 중에서 가장 기쁜 날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이제야 살아 있다고 느껴질 정도네. 어째서인지 아나?”
피식 웃은 백수룡이 처음으로 대답했다.
“난세가 오고 있어서겠지.”
“……하하하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에 방 안의 물건들이 흔들렸다.
천무학관주는 유독 백수룡 앞에서는 자신의 광기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광기를 드러내며 상대의 반응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이쯤 되면 어울려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백수룡이 차갑게 내뱉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상한 짓거리를 하셨나?”
불청객의 등장으로 인해 수십 년 만에 해후한 옛 제자를 급하게 돌려보낸 참이었다. 자연히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짓이라니? 혹시 내가 학생들에게 무공을 몇 수 가르친 것 가지고 그러는 것인가?”
천무학관주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나는 그저 약간의 조언과 각자에게 필요한 걸 주었을 뿐이야.”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불구가 될 수도 있는 방법을 조언이라고 하진 않아.”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일이지. 무인이 주화입마가 두려워 몸을 사린다면 어찌 무극(武極)에 닿을 수 있겠나?”
현인과 같은 얼굴로 사마외도의 방법을 논한다.
백수룡은 눈앞의 사내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날 너무 경멸하지 말게. 나 또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낱 무부일 뿐이니까.”
씁쓸하게 미소 지은 천무학관주가 탁자 위에 남겨진 흔적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일사도와 백수룡이 서로 혈마검을 쥐기 위해 금나수를 나눌 때 생긴 미세한 균열을 살펴본 그는 뛰어난 예술 작품을 보고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놀라운 성취로군. 둘 모두.”
“…….”
“정녕 자네의 나이가 아직 이립에도 미치지 않았다고?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어.”
탁자 위의 흔적에서 시선을 뗀 천무학관주가 고개를 들어 백수룡을 바라봤다. 순간 그의 눈에서 불그스름한 안광이 번쩍였다.
“혹은…… 하늘을 거스르는 재능일지도 모르지.”
역천(逆天).
천무학관주는 그 말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하지만 백수룡은 그 순간 결심했다.
‘죽여야 한다. 지금 당장.’
그의 마음속에서 한 자루의 검이 일어났다.
동시에 침상 밑에 숨겨 둔 혈마검이 그의 의지에 따라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절세고수조차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은밀하고 조용하게.
‘일검으로 끝낸다.’
주변에 둘러친 기막이 찢어지기 전에 처리할 수 있다면, 이후에는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때, 백수룡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던 천무학관주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내 명줄을 일검에 끊어 낼 수 있을지 가늠하는 중이군?”
“불가능할 것 같나?”
서늘하게 되묻는 음성에 천무학관주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피부를 타고 오르는 지독한 희열 탓이었다. 그가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자네의 일검을 견식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오늘은 그만두지.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할 것이 서로에게 너무 많으니.”
“내 생각에는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을 것 같은데?”
백수룡의 오만한 미소에도, 천무학관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지 않은 도박은 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들었네. 오늘 우리 둘의 진솔한 대화는 비밀로 가져가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내가 평생을 추구해 온 무(武)에 걸고 약조하면 믿어 주겠나?”
“…….”
평생을 무공에 미쳐 산 사내가 한 약속이었다. 그 광기에서 묻어나는 진심에 백수룡은 천천히 기세를 거둬들였다.
“……하마터면 내 명줄이 얼마나 질긴지 시험당할 뻔했군.”
참았던 숨을 짧게 뱉어 낸 천무학관주가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럼에도 입은 활짝 웃고 있었다.
백수룡이 그를 경멸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더 지껄일 말이 남았나?”
“자네와는 하루 종일도 떠들 수 있을 것 같지만…… 싫어할 것 같으니 하나만 더 말하지. 보다시피 나는 역천신공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네.”
정파무인의 입에서 역천이 언급되었지만, 더 이상 놀라운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천무학관주의 붉은 안광은 역천신공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 말은 만약 그가 백수룡을 혈교와 엮어 모함하려고 한다면, 백수룡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역린을 알게 된 셈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괴이한 무공. 아니, 그것을 정녕 무공이라고 정의해도 될지 모르겠군. 고견이 있다면 들려줄 수 있겠나?”
백수룡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천무학관주 역시 어떤 반응을 바라고 물어본 것은 아닌 듯,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역천신공을 찾기 위해, 이제는 사라진 혈교의 기록을 샅샅이 뒤졌네. 오랜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지. 그리하여 알아낸 정보가 있다네.”
무공에 미쳐 잊혀진 혈교의 역사마저 파헤친 절세고수가 알아낸 정보였다. 그 지독한 집념은 진실에 가까이 맞닿아 있었다.
“수십 년 전, 전성기를 구가하던 혈교에는 뛰어난 무공 교관이 한 명 있었다더군.”
“그 교관은 어떤 초식이라도 한 번만 보면 흉내 낼 수 있고, 두 번을 보면 파훼할 수 있었다고 하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것도 없지. 천재라고 불리는 무인들은 흔히들 듣는 찬사가 아닌가?”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그다음일세.”
천무학관주는 자신의 목소리에 취한 달변가처럼 빠르고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교관은 하나의 몸에 성질이 다른 여러 개의 절세신공을 담았다고 전해지네. 심지어 그중에는 역천신공도 있었다는 게야. 그는 혈마의 권좌를 찬탈하기 위해 뇌옥의 죄수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더군. 허나 그 반란으로 인해 혈교는 크게 쇠락했고, 훗날 무림맹이 혈교의 본거지를 쓸어 버릴 수 있었지.”
천무학관주는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는 백수룡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 전쟁에 얽힌 비화인데도 시큰둥한 반응이로군. 너무 허황되게 들려서 그런 것인가?”
백수룡의 표정을 관찰하는 천무학관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어쨌건 그 교관이란 자의 이야기 말이야.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하나의 몸에 절세신공을 여럿 담아냈다는 것이 사실일까? 아니면 과장된 거짓일까?”
이것만큼은 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천무학관주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백수룡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흔한 천재가 아니라 불세출의 천재였던 모양이지.”
“……크하하하하!”
그 말에 천무학관주가 폭소를 터트렸다.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어젖힌 그가 끅끅거리며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무인은 자네가 처음일세. 불세출의 천재라……. 과연. 그렇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혈교 이야기를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다는 건가? 그랬다간 아무리 십존이라도 목 위의 물건이 멀쩡하기 힘들었을 텐데.”
적어도 천무학관주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천무학관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물론 내 아주 가까운 지인들, 지금은 고인이 된 친우들만 아는 이야기라네.”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지?”
천무학관주는 처음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이야기 즐거웠네. 피곤할 텐데 이만 쉬게나.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지.”
“미친놈과 더 할 이야기는 없어. 당장 꺼져.”
면전에서 욕설을 들어도 천무학관주는 흡족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아, 구파의 늙은이들 중 몇몇은 자네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무공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던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던 천무학관주는 갑자기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백수룡을 바라봤다.
“적당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거야. 장래가 촉망되는 자네의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지.”
“…….”
가능성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후기지수들이 그런 일로 꺾이는 건, 안타까운 일이거든.
천무학관주는 의미심장한 중얼거림을 남기고 떠났다.
비로소 방 안에 홀로 남게 된 백수룡은 천장을 올려보며 한숨을 토해 냈다.
“……긴 밤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