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18
618화.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염병 떨지 말고 일어나라. 죄책감 때문에 네게 이용당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
목소리가 싸늘하게 내리꽂혔다. 무릎을 꿇고 지존을 경배하려던 일사도가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어찌하여?”
일사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수룡을 올려봤다.
곧 고통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린 일사도가 간절히 애원하기 시작했다.
“당신께서는 이미 자격을 갖추고 계십니다. 절세지경에 닿은 무공, 지금껏 천하를 속이고 기만해 온 간계, 또한 본교의 수많은 무공과 율법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요.”
과거, 사도들은 무공뿐만 아니라 혈교와 관련된 기본적인 모든 것을 스승에게 배웠다.
훗날 산산조각이 난 혈교를 사도들이 다시 일으켜 세울 때, 옛 스승에게 배운 지식들은 새로운 혈교의 뿌리가 되었다.
“옛 스승이여. 지금의 혈마신교는 오롯이 당신의 유산입니다.”
“…….”
“그대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지존의 적법한 계승자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광신(狂信).
백수룡을 바라보는 일사도의 두 눈에서 증오와 환희가 교차하고 있었다.
쿵!
수십 년간 혈마의 대리인으로서 군림해 온 사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온전한 복종의 자세였다.
그의 목소리는 간절하게 떨리고 있었다.
“부디 저희를 다시 버리지 마십시오. 나의 지존이…… 되어 주십시오.”
간신히 고개를 든 흉터투성이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건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백수룡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기만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옛 제자의 얼굴을 외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백수룡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더욱 싸늘해진 표정으로 조소를 지었다.
“그리고 같잖은 연기도 집어치워라. 네가 간계를 누구한테 배웠다고 생각하는 거냐?”
“정녕 제 모든 말과 행동이 연기로 보이십니까?”
“…….”
사곤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저 아이의 말에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순하고 무디던 사호가 어떤 사내로 장성했는지 알게 된 지금, 백수룡은 또 다른 옛 제자를 조금은 차분한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제자가 오랜 시간 동안 변화했고, 성장했으며, 스승의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이미 한 번 보았기에.
백수룡은 힘없이 웃으며 혀를 찼다.
“네 수작이 너무 뻔히 보여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꽤나 물렁해졌다고 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나.”
조금 전까지 지존이 되어 달라고 애원하던 일사도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백수룡의 맞은편에 앉았다.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우웅-
두 사람의 사이, 탁자 위에 올려진 혈마검이 부르르 진동하며 검명을 울렸다. 동시에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방 안을 채웠다.
혈교의 신물이 주인을 부르고 있었다. 백수룡은 검에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며 말했다.
“혈교를 무너뜨리고, 혈마를 없애는 것이 내 운명이라면 굳이 거스를 생각은 없다만?”
느긋한 표정에 여유로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일사도는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피차 거짓과 기만에 능수능란한 이들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상대를 관찰하고 가늠하며 아슬아슬한 대화를 이어 갔다.
“이제야 지존의 위대한 뜻을 알겠군. 당신은 지존께서 안배한 그릇이다.”
일사도는 백수룡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깊은 곳에선 붉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무리 숨긴들 자신에게서 역천신공의 기운을 감출 수는 없었다. 수십 년을 연구하고 찾아 헤맸으니까.
-나는 돌아올 것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너희는 다음을 준비하여라.
그 말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 냈다.
일사도는 지난 세월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하얗게 웃었다.
“본교를 배반하고, 몰락하게 만든 자를 환생시켜 부활의 그릇으로 삼는다……. 괴이하고도 놀라운 일이야. 실로 지존께서 행하실 법한 계획이다.”
피식.
“몰랐더냐? 역천이란 운명을 거스르는 힘이다. 혈마가 나를 안배했을지 모르되, 그 계획은 완벽하게 실패할 것이다.”
제자를 마주 보는 백수룡 또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단언하듯 말을 이었다.
“기대하지 말거라. 나는 절대로 혈마가 되지 않을 것이니.”
“허세가 심하군. 이미 눈빛이 꽤 불안정해 보이는데.”
“자신감과 허세를 구분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확인하는 방법은 기억하고 있다. 당신이 청룡학관의 제자들을 그토록 아낀다지?”
“설마 내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확인해 보면 알 테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부디 신중하길 바라마. 장로들도 그리 만용을 부리다가 모조리 내 손에 죽었으니까.”
두 사내는 말로 서로를 도발하고 상처 입혔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긴장감이 극도로 더해졌다. 방 안의 공기가 조용히 들끓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조금만 삐끗하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서, 일사도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닐 텐데.”
“지독하고 끔찍한 기억뿐이지.”
“…….”
“…….”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내는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찰나에 공방이 벌어졌다. 탁자 위에 놓인 혈마검을 잡기 위한 금나수 대결. 똑같은 궤적을 그린 손과 손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대기를 일그러뜨렸다.
파바바박!
결국 승부를 내지 못한 두 사람의 손이 동시에 혈마검의 검파에 닿았다. 그러나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사도의 손은 혈마검이 뿜어낸 기운에 밀려난 반면, 백수룡의 손은 검파를 쥐는 순간 혈마검이 강렬하게 반응했다.
화아아아악!
머리카락이 끝에서부터 타오르듯 붉게 물들고, 눈동자는 선명한 핏빛 보석안으로 변했다.
척추를 짜릿하게 타고 오르는 쾌감에 백수룡의 몸이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공에 한 치쯤 떠 올랐다.
일사도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능히 팔성의 경지……. 아니, 구성 이상인가……! 하하하하……!”
흉터로 일그러진 일사도의 얼굴에 희열이 가득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다.
확신할 수 있었다.
옛 스승은, 이 사내는,
반드시 혈마가 될 것이다.
일사도는 저도 모르게 혈마지존에게 한 발을 내디뎠다.
“……물러나라.”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무릎을 꿇으려는 그에게, 적발적안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일사도는 그것조차 기껍게 여기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스스스슷…….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손안에 쥔 검을 노려보는 사내의 눈빛에 흉험한 살기가 어렸다.
“꺼져라.”
백수룡이 혈마검을 내던지듯 바닥에 떨어뜨리자, 그의 몸에서 역천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힘에 겨운 듯 숨을 몰아쉬는 백수룡에게, 일사도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절대로 혈마가 되지 않을 거라고.”
“도대체 왜 거부하는 것인가!”
일사도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옛 스승과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냥 받아들이면 전부 해결될 일이었다.
자신들의 번뇌와 고통을 한 번에 해결해 줄 유일한 구원이었다.
평생을 기다려 온 순간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일사도는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거스르지 마라! 우리와 지독하게 엮인 당신의 운명을! 그대는 혈마지존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해. 그래야만 나의 지난 삶에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그러니까…….”
덮칠 듯이 다가온 일사도가 백수룡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제 그만 역천의 힘을 받아들이고, 내가 당신을 거역하지 못하도록 만들란 말이다.”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백수룡이 지친 표정으로 옛 제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흔들리는 제자의 눈동자 속에서, 그가 맥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운명은 너희들을 다시 가르치는 것이겠지.”
“아직도 그따위……!”
그 순간, 낯선 기척을 느낀 두 사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낯선 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 속도라면 반 각도 지나지 않아 이곳에 도착할 터였다.
‘고수다.’
미리 주변에 기막을 둘러 두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기감이 극도로 예민한 고수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역천의 기운을 느꼈을 수도 있다.
백수룡이 일사도에게 잡힌 멱살을 풀어내며 말했다.
“이만 가거라.”
“…….”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절세고수 중 상당수가 이 도시에 있었다. 여기서 일사도가 정체를 드러낼 것이 아니라면,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천무제가 이틀 남았다. 조만간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을 터. 오늘은 이만 돌아가거라.”
“…….”
“일호.”
백수룡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일사도가 결국 몸을 돌렸다.
그는 옛 스승에게서 등을 돌린 채 잠시 머뭇거리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묻지. 당신은 우리를 용서했나?”
“……무엇을?”
일사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밤하늘 먼 곳을 바라보다가, 경공을 펼쳐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
백수룡은 제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바닥에 혈마검이 떨어져 있었다. 백수룡은 거짓말처럼 기운을 숨긴 마검을 수습해 침상 아래에 숨겼다.
그리고 잠시 후, 문밖에서 새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백수룡 선생. 안에 있습니까?”
문을 열어 주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선객이 있었던 모양인데……. 벌써 돌아간 모양이군?”
천무학관주 진량이었다. 한 손에 술병을 든 그가 백수룡의 어깨 너머로 방 안을 힐긋거렸다.
백수룡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천무학관주님이 이 늦은 시간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오늘이 아니면 청룡신협과 무론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네.”
오기 전에 한잔하였는지, 술에 꽤나 취한 듯 천무학관주의 얼굴이 붉었다. 그와 같은 절세고수에게는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되겠나?”
“거절한다면?”
찾아온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싸늘한 냉대에도, 천무학관주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먼저 다녀간 선객과 작은 다툼이 있었던 듯한데, 혹시 조용히 고민을 의논할 상대가 필요하지 않은가?”
명백한 협박이다.
먼저 다녀간 선객의 정체까지는 모를 테지만, 이곳에서 무언가 수상쩍은 일이 있었다는 것은 눈치챈 태도였다.
잠시 고민하던 백수룡은 천무학관주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저 역시 기회가 닿는다면 천무학관주님과 무론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하하. 문전박대를 당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로군.”
안으로 들어온 천무학관주는 찬찬히 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탁자에 한동안 머물렀다가 다시 백수룡을 향했다.
“헌데……. 눈이 많이 충혈되었군?”
이자를 이곳에서 죽여 버릴까.
백수룡은 치미는 충동을 억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