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17
617화. 일어나라
휘이이잉-
시린 겨울바람이 다시 한번 창문을 넘어올 때, 창밖에 있던 일사도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기척도 없이 펼쳐진 이형환위(移形換位)에 경악했겠지만, 백수룡은 차분한 시선으로 자신의 앞에 선 옛 제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사도가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올 것을 예상했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 너라면…… 언제 날 만나러 와도 이상하지 않으니.”
“대비한 것치고는 방비가 허술하군.”
“대비하면 막을 수는 있고? 괜히 피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어.”
“대담하군. 혹은 만용에 불과하거나.”
“너와 이렇게 마주 보려면 둘 다 필요하더구나.”
분명 그들은 초면이었다. 그럼에도 물 흐르듯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둘 다 그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앉거라. 내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텐데.”
백수룡은 맞은편의 의자를 권했다. 일사도는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하나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고작 탁자 하나였다. 서로의 얼굴은 물론이고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표정까지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랜만이구나.”
백수룡은 사곤과 처음 마주 앉았던 날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날, 홀로 자신을 찾아온 사곤은 많은 질문을 했다.
그중 하나가 지금까지도 유독 기억에 남았다.
-왜 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당시의 백수룡은 제자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그저…… 말문이 막혀 술잔만 연거푸 비워 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날로부터 많은 일들이 있었고,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때문에, 백수룡은 담담하게 일호의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혼자서 온 것이냐? 다른 아이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구나. 혹여 멀리서 경계하고 있는 거라면…….”
“청룡신협.”
감정이 결여된 메마른 목소리였다. 백수룡이 말을 멈추자, 일사도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하루아침에 강호에 나타난 절세고수. 본교의 계획에 매번 훼방을 놓았고, 장로들의 목을 여럿 베었지. 그로 인해 본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일사도는 눈앞에 있는 사내가 불가해(不可解)의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빤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심지어 본교의 사도마저 배교하게 만들었더군. 본교의 역사를 통틀어 이보다 더 지독한 원수가 과연 있을까?”
“일호.”
백수룡은 옛 제자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굳어 있음을 보았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떠보는 것이라면 관두거라. 너라면 지난 며칠간 나를 충분히 지켜보았을 터. 그런데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이냐?”
일호(一號).
오로지 타인과의 구분을 위해 붙여진 그 명칭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일사도가 백수룡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
일사도는 백수룡을 똑바로 노려보며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천하에 오직 셋만이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나머지는 전부 오래전에 죽어 버렸거든.”
“나는…….”
피식.
“명칭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지.”
일사도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맺혔다. 그에 따라 얼굴에 난 상처들이 일그러졌다. 창백한 달빛이 상처에 더 깊은 음영을 만들었다.
“너의 말이 맞다고, 그렇게 한번 가정을 해 보지.”
“……뭘 하려고?”
다시 몸을 뒤로 물린 일사도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방 안의 먼지들이 떠올라 휘돌며 작은 형상들을 이루었다.
일사도의 손바닥 위에서 완성된 그것들은 손가락만 한 크기의 인형이었다. 극도로 통제된 기로 만들어 낸, 절세고수가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섬세한 기예였다.
달빛 아래에 완성된 다섯 개의 인형 중 가장 큰 인형이 돌아서서 다른 넷과 마주 봤다. 그러자 작은 인형 넷이 무릎을 꿇었다.
“나와 너희들이구나.”
백수룡이 다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사도는 수십 년 전의 과거를 인형극처럼 꾸며 다시 불러냈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자신이 옛 제자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먼지과 기로 이루어진 네 명의 제자들은 바닥에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은 인형들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그 크기가 스승과 비등해졌다.
잠시 후, 새로운 인형들이 생겨났다. 일사도의 손바닥 위에 펼쳐진 세계에서 인형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자신이 만든 인형들을 바라보는 일사도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아마도 이것이, 옛 스승의 마지막 기억이겠지.”
혈교를 탈출하던 날의 싸움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네 사부들과 이십칠호가 혈교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옛 제자들은 그들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그만.”
백수룡이 손을 휘젓자, 일사도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던 인형들이 산산이 흩어져 먼지로 돌아갔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백수룡은 그 의지를 분명히 하며 일사도를 노려봤다.
“굳이 이걸 보여 준 이유가 무엇이지?”
백수룡이 다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일사도는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옛 스승이 죽고 나서 한 가지 의문이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당신이 정말 그의 환생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겠나?”
백수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입에서 나올 질문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숨거나 피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어째서 우리를 먼저 죽이지 않았을까?”
“……뭐?”
“본교를 탈출하던 그날. 옛 스승은 지하뇌옥을 탈출하다가 발각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막아섰지.”
일사도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날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듯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그 전에 손을 쓸 수 있었다. 우리에게 독을 먹이는 방법도 있고, 운기조식을 하는 틈에 기습할 수도 있었다. 그 외에도 수십 가지 방도가 있었을 테지.”
“…….”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교를 탈출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한 우리들을…… 옛 스승은 모른 척 그냥 내버려 두고 떠났다.”
투명한 눈동자 뒤에 숨은 깊디깊은 분노가 보였다. 길게 내쉰 숨이 밤공기를 하얗게 물들였다.
그 순간, 백수룡은 전에 사곤이 했던 질문을 다시 떠올리며 대답했다.
-왜 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죽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때는 이 대답만을 변명처럼 내뱉고 얼버무렸다.
이 이상의 이야기는 구차하게 여겨지고, 마치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비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대답을 해야 할 때였다.
아주 오래전, 자신이 옛 제자들을 죽이지 않고 조용히 몰래 떠난 이유.
“나는…… 너희들을 구하고 싶었다.”
일사도의 경멸 어린 조소에도 백수룡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옛 제자의 옆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사부들과 함께 혈교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면, 그 후엔 언젠가 돌아가서 너희들을 데리고 나올 계획이었다.”
그것은 네 사부들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세뇌에 걸린 제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당시에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든 상관없었다.
네 사부를 먼저 고향으로 돌려보낸 후, 평생을 바쳐서라도 방법을 찾아낼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이제는 덧없는 망상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끔찍한 변명이 더해진 헛소리로군.”
일사도가 백수룡을 무시무시하게 쏘아보며 그 말을 일축했지만, 백수룡은 오히려 작게 웃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혈교를 박살 내고, 혈마를 죽여 버리고, 너희들의 몸에 새겨진 술법을 지워 버릴 생각이다. 그리해서…….”
백수룡이 손을 뻗자 일사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허공을 움켜쥔 백수룡이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너희를 그 지옥에서 꺼내 줄 것이다.”
“…….”
잠시 숨을 멈춘 듯 굳어 있던 일사도는 이내 큭큭큭 웃으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절세고수의 숨이 거칠어질 정도로 한동안 웃음을 흘리던 그가 문득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 상처들. 왜 생겼는지 기억하고 있나?”
흉터투성이인 일사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백수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눈 밑에서 턱까지 가로지른 상처는 열다섯 살에 난 것이다. 내게 항명을 하다가 생겼지.”
“…….”
“오른쪽 뺨에 깊게 새겨진 상처는 열여섯 살. 숙소를 탈출하려다가 발각된 날에 생긴 것이지.”
“…….”
“이마에 깊게 남은 상처는 열여섯 살 겨울이었다. 날 죽이겠다고 암습했다 실패한 날이었지.”
“…….”
“뺨에서 목까지 이어진 상처는 열일곱에 생긴 것이다. 당시 너는 엿새가 넘도록 사경을 헤맸지.”
“……어째서.”
전부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백수룡을 노려보는 일사도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단 하나도 잊은 적 없다.”
상처 하나하나마다 제자가 어떤 비명을 질렀는지,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얼마나 깊은 공포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렸는지 백수룡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본보기가 필요했다.”
잠시 말을 멈춘 백수룡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 상처를 새기지 않았다면, 너는 죽었을 것이다.
혈교는 항명을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던 너는 누구보다 나와 자주 충돌했고, 종종 정해진 선을 넘었다.
그걸 무마하려면 내가 더욱 잔인해져야만 했다. 교의 수뇌부가 진절머리를 치도록.
그래야 네가 그 이상의 처벌을 받지 않을 테니까.
백수룡은 입 안에 맴도는 말들을 하지 않았다.
“……그래. 이 상처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에 죽었을 테지.”
일사도는 자신의 얼굴에 난 상처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수십 년 전 마음속에 증오만 가득하던 소년은, 이 상처들의 의미를 수없이 되새기며 어른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차라리 그때 죽게 내버려 뒀어야지.”
“…….”
“우리를 위해 위악(僞惡)을 부릴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라도 용서해 달라는 말인가?”
일사도의 조롱에, 백수룡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마저 맺혔다.
“용서받고 싶은 생각 따윈 없다. 이건 그냥 내 이기심이니까.”
일사도 또한 입매를 뒤틀며 미소 지었다.
그는 이기심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부터 자신이 할 행동도 지극히 이기심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니까.
“단 하나. 당신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사도는 그대로 허리춤에서 혈마검을 뽑았다.
우웅-
천하에서 가장 괴이한 기운을 담은 마검이 진동하고 있었다.
혈마검.
혈교의 신물을 탁자 위에 올린 일사도가 뒤로 물러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가벼운 소리였지만 백수룡에겐 심장이 내려앉는 것처럼 크게 울렸다.
“옛 스승이여. 부디 나의 지존이 되어 주십시오. 당신을 향한 나의 깊디깊은 증오와 원한, 은혜를 모두 바쳐 당신을 섬기겠나이다.”
“…….”
그는 맹목과 환희를 담은 눈으로 백수룡을 올려보았다. 그러나 입가에 맺힌 지독한 조소는 그대로였다.
“당신에게도 충분한 형벌이자 속죄가 되지 않겠습니까?”
과거에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 제자는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복수의 방법을 찾아낸 듯했다.
“……일호.”
그런 일사도를 바라보던 백수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염병 떨지 말고 일어나라. 죄책감 때문에 네게 이용당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
제자들을 지옥에서 꺼낸다고 했지, 함께 지옥에서 뒹굴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