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39
639화. 뭐가 되었든
높은 전각의 지붕 끝단.
백수룡은 어스름이 찾아온 도시의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그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승전을 보지 못해서 아쉽지 않나?”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무림맹주가 굶주린 호랑이 같은 얼굴로 백수룡의 시선이 머무르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수룡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보다 학생들이 더 아쉽겠지. 우승하면 개선장군처럼 다 같이 대로를 가로지르며 축하할 예정이었거든.”
“내년에 하면 되겠군. 자네 학생들, 하나같이 보통내기가 아니던데.”
“당연하지. 누구한테 배웠는데.”
“……아직 적응이 안 되는데. 무림맹주한테 존대 정도는 해 주지 그러나?”
무림맹주가 한쪽 눈썹을 사납게 치켜떴으나, 백수룡은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굳이? 이제는 무공, 배분, 직위 어디에도 그럴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자네가 정파에서 태어나 다행이라는 얘길 내가 한 적 있던가?”
“여기저기서 자주 듣는 얘기지.”
두 사람은 잠시 시시껄렁한 농을 나누며 긴장을 풀었다.
용봉비무의 결승, 그리고 천무제의 폐회식은 생략되었다.
결승비무가 시작되기 전, 개방의 급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운무가 급속도로 접근 중이라는 사실이 전해졌다.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었다. 명백한 의도를 지닌 괴력난신의 출현이었다.
‘역천의 술법입니다. 운무 안쪽이 보이진 않습니다만, 저런 술법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천하에 오직 혈교뿐입니다.’
천안통(天眼通)으로 다가오는 붉은 운무를 미리 살핀 현무학관의 술법사들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몇몇은 술법을 사용한 여파로 혼절에 이르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먼저 돌아간 줄 알았던 곤륜파의 옥진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돌아와 곤륜파가 전멸한 소식을 전한 후 쓰러졌다.
‘모두, 모두 다 죽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커허억!’
즉각 천무제를 중단하고 천하무림의 거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무림맹주, 불존, 검성을 비롯한 정파무림의 거두들과 흑도맹의 수뇌들, 북해빙궁, 오대학관주, 남궁수를 비롯한 오대세가의 가주들, 그리고 백수룡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혈교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게 된 기분이 어떤가?”
청룡신협 백수룡이 압도적인 지지로 혈교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할 총사령(總司令)으로 추대되었다.
천무제 결과에 따른 구파일방의 수긍, 흑도맹과 북해빙궁의 지지, 그리고 오대세가와 오대학관 전원의 동의로 결정된 사항이었다.
그러나 고금에 전례가 없던 일의 당사자가 되었음에도, 백수룡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별스럽지도 않소. 계획했던 대로 된 것뿐이라서.”
“……무림맹 총사범일 때 조금 더 부려 먹었어야 했는데.”
투덜거리던 무림맹주가 이내 피식 웃었다. 순간 눈을 빛낸 그가 섬뜩한 안광을 드러내며 말했다.
“하나만 부탁하지. 나를 선봉장으로 세워 주게.”
덤덤한 말투에서 오래된 분노가 느껴졌다.
권왕 야율황.
혈교에 대한 복수심 하나로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른 사내.
그는 백수룡이 이 전쟁의 총사령이 된 것에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기꺼웠다.
복잡한 진두지휘를 그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로지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죽이는 데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상황을 봐서 결정하지.”
“고민할 것이 있나? 내 실력이 못 미더운 것은 아닐 텐데?”
야율황은 몇 마디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남궁수가 표홀한 신법으로 백수룡 옆에 내려섰기 때문이었다.
먼저 무림맹주에게 가볍게 묵례를 한 남궁수가 백수룡에게 용무를 전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준비를 마쳤다. 장문인들과 가주들께서 마지막 점검을 끝내고 곧 오실 것이다.”
“오대학관은?”
“강사들 중 일부는 차출하고, 일부는 학생들과 함께 이곳에 남아 양민들을 지킬 예정이다.”
고개를 끄덕인 백수룡은 사곤이 남긴 쪽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혈교가 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십시오.
천하무림의 고수들이 한데 모여 있는 장소를 향해 정면으로 진격한다?
몇 번을 생각해도 무모한 공격이었다.
‘서찰의 내용을 볼 때 사곤도 혈교가 올 거라는 사실을 갑자기 알게 됐다.
미리 알았다면 이렇게 다급하게 전해 줬을 리 없어.’
며칠 전 일호와의 대화를 되새겨 봐도 이번 공격은 사도들과는 무관해 보였다.
‘그렇다면 누가?’
수뇌부 회의에서도 수많은 예상과 추측이 난무했지만,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적들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으니 몰려오고 있으리라는 것.
전면전을 선택한 혈교의 전력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의미였다.
스스스슷…….
붉은 운무가 몰려오는 모습이 절세고수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동서남북 어디를 돌아봐도 붉은 운무가 보였는데, 스멀거리며 다가오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정도와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들은 이곳을 포위하듯 사방에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 같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불길한 무언가로군요.”
무림맹주와 남궁수가 침음성을 흘렸다. 절세고수들조차 동요를 숨기지 못할 만큼 괴이한 광경이었다.
“…….”
백수룡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핏물처럼 유독 짙게 출렁이는 정면의 붉은 운무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땅거미 진 어둠과 함께 밀려오고 있었다.
스스스슷…….
바람을 타고 비릿한 혈향마저 풍겨 오는 듯했다.
백수룡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적들이 곧 도착하니 모두에게 싸울 준비를 갖추라고 전해.”
고개를 끄덕인 무림맹주와 남궁수의 신형이 동시에 흩어졌다. 백수룡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꿈틀대며 다가오는 거대한 괴력난신을 주시했다.
혈마안이 발현되지 않았음에도 백수룡은 그 내부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천하에서 오직 그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혈교도들을 이끄는 흑야마제, 혈교의 고수들, 그리고 옛 제자들의 모습마저도 백수룡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적발적안으로 변한 흑야마제를 바라보며, 백수룡은 수많은 가정을 떠올렸다. 일사도와 나눈 대화를 되새겼고, 옛 제자들의 분노와 원망을 기억했다. 저들의 심장에 새겨진 술법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게 너희의 선택일 수도 있겠지. 아니면 누군가, 혹은 어떤 것에 의해 강요된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뭐가 되었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휘이이익!
백수룡은 한달음에 성벽까지 다다랐다.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흩어졌다가, 어느새 성벽 위에 도달해 있었다.
순간적으로 백수룡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희들을 그 지옥에서 끌어낼 것이다.”
그와 거의 동시에, 천하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성벽 위에 내려섰다.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을 텐데도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미타불…….”
“……오늘은 놀랄 일이 많을 것 같군.”
“겁도 없는 종자들! 감히 이곳이 어딘지 알고 쳐들어온 것인가!”
“저 안개를 흩어 버릴 방법은 없나?”
“…….”
불존, 천무학관주, 무림맹주, 추혼궁귀, 뇌신, 그리고 청룡신협.
이 시대의 무림십존 중 여섯이 한자리에 모였다.
뿐만 아니라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의 가주들, 강호에 명성을 떨친 고수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천하무림의 힘이 집결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닌 전력.
백수룡은 고요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본 후 외쳤다.
“정사연합의 무인들은 성 밖으로 나가 적을 맞이하라!”
지형 자체를 바꿔 버릴 수 있는 절세고수가 아군과 적군을 포함 여럿이었다. 때문에 성 밖으로 직접 맞이하러 나가는 것은, 도시 내부에 있는 양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최선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전력적으로도 우세한 상황. 상대가 걸어온 싸움에 소극적으로 임할 이유가 없었다. 수뇌부 회의에서 합의가 된 전술이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게!”
백수룡이 다른 무인들과 함께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지친 안색이 역력한 풍월화공이 술법을 펼쳐서 날아왔다.
그 순간 가라앉아 있던 백수룡의 표정이 처음으로 밝아졌다. 풍월화공에게서 익숙하고도 반가운 기운을 느낀 탓이었다.
백수룡이 손을 뻗자 풍월화공의 품에서 창룡신검이 딸려 나왔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허공섭물이었다.
휘이익!
날아온 창룡신검을 다시 손에 쥔 순간, 그리웠던 목소리가 한숨을 쉬며 백수룡을 타박했다.
[설마 나 없이 전장에 나가려고 했더냐?]“조금만 늦게 왔으면 다른 녀석이랑 같이 나갈 뻔했어.”
피식 웃은 백수룡은 급조한 검을 바닥에 풀어 놓고 창룡신검을 요대에 채웠다. 그것만으로도 기세가 조금 더 날카로워진 듯했다.
백수룡의 반대편 허리춤에서 적월이 가볍게 진동했다. 어쩐지 코웃음을 치는 것 같았지만, 반가움도 같이 느껴졌다.
“역시 둘이 함께 있으니 천군만마가 따로 없네.”
백수룡은 오른손에 창룡신검, 왼손에 적월을 들고 성벽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미 많은 정사연합의 고수들이 성벽 밖으로 나가서 진형을 구축하고 있었다.
쿠웅!
강하게 바닥을 찍으며 내려선 백수룡은 고개를 들어 붉은 운무를 노려보았다. 창룡신검 또한 곧바로 그 안의 상황을 꿰뚫어 보았다.
[오면서 춘삼이와 목이에게 들었다. 저 붉은 안개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필시 혈마가 안배한 역천의 술법일 터.]“저 안에 있는 놈이 흑야마제야. 역천신공을…… 아주 멋대로 뜯어고쳤군.”
그 순간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백수룡은 키득 웃음을 흘리는 흑야마제를 무시하고 그 뒤의 사도들을 살폈다.
……옛 제자들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내 예상보다 훨씬 강하고 괴이하구나. 저것은…… 혈마와 다르지 않은 존재다.]현천신녀의 목소리에서 강한 분노와 원한, 그리고 희미한 두려움이 묻어났다.
“아마 저 안에도 깃들어 있겠지.”
백수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혈마의 존재가 희미해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놈이 흑야마제에게 옮겨 간 것인지, 아니면 잠시 숨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문도들은 합격진을 준비하라!”
“고작해야 눈을 현혹하는 술법이다! 두려워할 것 없다!”
“검을 들어라! 악적들을 물리치고 강호의 협의를 바로 세울 기회다!”
정사연합은 성벽 밖으로 빠져나와 넓게 진형을 펼쳤다. 강호의 내로라하는 세력의 무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그 자체로 태산도 무너뜨릴 듯했다.
스스스슷…….
다가오던 붉은 운무는 그들과 약 백여 장의 거리를 두고 움직임을 멈췄다.
자욱하게 낀 안개의 일부가 흩어지고, 그 안에서 흑야마제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저벅.
비현실적이고도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의 등장에 정사연합의 고수들이 잠시 술렁였다.
“축제를 한다고 해서 함께 즐기러 왔는데. 우리가 너무 늦게 왔나 봐?”
그곳에 모인 고수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내공을 끌어 올려 귀를 보호해야 했다.
흑야마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치밀면서 몸 내부의 기가 흔들린 탓이었다.
흔히 말하는 주화입마의 전조 증상이었다.
“대체 무슨 사술을…….”
“공력을 끌어 올려 심신을 보호하라!”
장문인들과 가주들이 사방에서 소리쳐 지시를 내리는 가운데, 정사연합의 절세고수들은 하나같이 표정을 굳혔다.
“저자가 혈마인가…….”
“초면인데도 한눈에 미치광이라는 걸 알겠군.”
절세지경에 든 무인이라면 어느 정도 상대의 경지를 짐작하거나 자신과 견주어 볼 수 있었다.
그런 절세고수들의 눈에 비친 흑야마제는 끝없는 무저갱과도 같았다.
“저런 괴물은…… 본 적도 없군.”
수십 년 전 혈교와의 전쟁을 경험한 검성의 말이었다. 무게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흑야마제의 뒤로는 사도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본 구파의 노고수들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거나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
사도들의 무감정한 눈에는 불과 몇 시진 전까지 느끼던 다양한 감정들 대신, 혈마에 대한 광신만이 느껴졌다.
백수룡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